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임일권이라면 납청정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유기공장 몇 개도 그의 소유였다. 그는 당시 부자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돈으로 박천 군수의 차함(借銜) 자리를 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임박천이라 불렀다. 차함이란 실제로 일은 하지 않고 이름만 빌린 벼슬자리였다.

훈장은 기침을 하곤 말을 이었다. "네 사정이 하도 딱해서 내가 어제 그 어르신을 찾아가 부탁을 했단다. 너를 심부름꾼으로 써줄 수 없겠느냐고 말이다. 그랬더니 그 어르신이 아주 좋아하더구나. 그분도 네 사정을 들었기 때문에 동정심이 생긴 모양이야. 어떠냐, 이렇게 대책 없이 지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승훈은 임박천 댁으로 옮겨 가 심부름꾼이 되어 생활하기 시작했다.

승훈이 맡은 일은 주인의 방을 닦고 마루를 청소하는 일, 손님이 오면 신발을 닦는 일 등이었다.

처음엔 잔뜩 긴장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 익숙하게 되자 한가한 시간이 심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면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꼭 글을 많이 배워야만 사람답게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땅에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보다도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풀꽃 같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은가?'

생각의 변화와 함께 승훈의 생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맡은 일을 끝낸 후 시간이 나면 주인집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글씨를 써보기도 했다.

"그래, 그렇게라도 부지런히 공부하면 성공할 게다. 옛사람 중에도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여 성공한 분들이 많단다."

주인 임박천은 어린 승훈이 책을 읽고 쓰는 일을 볼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승훈이 12세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주인이 선천의 어느 상점에 가 놋그릇값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승훈이 선천으로 가서 가게 주인을 만났더니, 돈을 주기는커녕 어린애라고 얕잡아보며 실실 웃었다. 물건을 외상으로 가져갔다는 문서를 보여줘도 막무가내였다. 부당한 처사라며 따졌지만 능청을 떨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년은 그에게 돌아갈 여비라도 달라고 했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분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터벅터벅 걷던 소년은 마을의 최고령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소년은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자초지종을 들려주었다.

억울한 사정을 들은 노인은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돈밖에 모르는 놈이라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기가 잘 아는 진사댁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떠나라며 데려갔다.

진사댁 앞까지 온 소년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노인이 괜찮다면서 들어가자 해도 소년은 어린 돌부처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고, 노인에게 얘기를 들은 진사는 밖으로 나와 소년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아무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심부름꾼입니다. 만일 신용마저도 없다면 저는 죽은 개미보다도 못합니다."

진사는 그 뜻 깊은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소년에게 좋게 이야기하며 방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진사는 소년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밤늦게 그릇가게로 갔다. 그리하여 승훈은 결국 약속어음을 받아 돌아왔다.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으므로 자립심이 남달랐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몰랐다.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승훈은 비록 어렸지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요모조모 알 수 있게 되었다.

경험을 통해 사회생활을 접하게 된 것이 훗날 남달리 빠르게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서당에서 글만 읽고 지냈다면 개화사상을 훨씬 늦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가 일반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점까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예컨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불균형한 관계는 두드러진 사회 현상이었다.

유기공장의 실상을 보아도 그랬다. 고용인들을 잘 대우해 주는 주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주인들은 고용인들이 땀흘려 일한 대가를 충분히 주지 않았다. 벌레처럼 일하고 있는 고용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햇볕도 들지 않는 실내에서 두더지처럼 새까맣게 변한 모습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모습이 무척 불쌍했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