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선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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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선택하라
로완 윌리엄스 | 민경찬·손승우 역 | 비아 | 256쪽 | 15,000원

원제 Choose Life : Christmas and Easter Sermons(저자 Rowan Williams)

1. 들어가는 말: '나머지 날'을 위한 '한 날'

그리스도인에게 성탄절과 부활절, 이 두 절기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예수의 삶이 보여주는 신비함이 성탄과 부활에 잘 나타나기에,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탄과 부활을 기념하는 날에 집중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기념하는가?' 성탄과 부활을 기념하는 '날'인가, 아니면 성탄과 부활 그 자체인가, 하고 말이다.

달력에 눈에 잘 띄게 표시된 '한 날'이 '나머지 날'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책에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스물 한 편의 설교가 담겨있다. '삶(life)'에 관한 저자의 설교는 '한 날'에 선포되었지만, 정확히 '나머지 날'을 겨냥하는 설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인간이 마주하는 '삶' 전체에 관심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필자는 책에 나타난 저자의 중심 생각을 다루려고 한다. 필자는 성탄절과 사순절 설교 각각에 드러난 저자의 몇 가지 논지를 파악하는 데 집중한 뒤, 이를 간단히 평가할 것이다.

2. 성탄절,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을 기억하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교회절기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이 단순한 명제는 저자의 설교에서 어떻게 삶과 연결되고 있을까? 그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성육신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셨다는 사실이다. 인간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마주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에게 하나의 희망이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의 아름다움과 풍성함, 그리고 자유를 그 스스로 쟁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방어로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누리려는 인간의 애씀은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를 앗아갔고, 결국엔 삶의 지속가능성까지 빼앗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의 삶에 조용히 들어오셔서 인간을 지속가능한 삶으로 초대하신다.

둘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생겼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이 관계는 창조자인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땅의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심지어 땅의 상처까지도. "우리가 아무리 타락했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로 끔찍한 것은 우리가 실패에 안주하기로 마음먹고 끝끝내 냉소와 절망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조차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으로 계십니다(79쪽)."

인간은 피조물인 자신과 전혀 다른, 인간 자신 밖으로부터 안으로 향하고 계시는 창조자에게 의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아름다움과 풍성함, 그리고 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인간 개인으로 하여금 타자를 위한 삶이 참된 실재임을 깨닫게 해 준다. 이는 저자의 설교 거의 모든 곳에서 강조된다. 국제사회, 지역사회, 개인의 삶 모두 타자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요지이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 모두를 생명으로 초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함을 수여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자신뿐 아니라 타자의 풍성함도 목표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서 있는지 묻고 계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물음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다. 타자를 위해 서 있는 바로 그곳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삶, 은총과 진리에 기대어 사는 삶, 아낌없이 관대하며 더 없이 정직한 삶,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 유일한 삶의 편에 서 있습니까?(122쪽)"

3. 부활절, 인간에게 새로운 세계가 다가온 사건을 기억하다

부활절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에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로운 세계가 뚫고 들어온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삶과 죽음이 그어놓은 날카로운 경계를 하나님의 생명이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 그것이 부활이 가져온 새로운 세계인 것이다. 필자는 저자의 설교에 나타나는 부활의 의미를 정리해보려고 한다.

첫째,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모든 죽음을 그 손에 간직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데서 살리신 일은 하나님이 그 죽음을 기억하고 계심을 뜻한다. 저자의 설교에서 예수의 부활은 잊혀진 죽음, 또는 잊혀지길 바라는 죽음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재해석된다.

필자는 죽음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잊으라고 강요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잊지 않으신다는 저자의 해석이 인상적이었다.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는 바, 부활이 가져다 주는 희망이다. 모든 죽음은, 세상이 그 죽음에 가치를 얼마나 부여하든 상관없이, 그것은 하나님 손바닥에 새겨져 있다. 이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에 둘러싸여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매는 우리 인간에게 안정감을 준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에 기초한 화해를 지향한다. 저자는 부활이 가진 창조성에 주목한다. 부활은 그저 죽음에서 죽기 전으로 시간을 돌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은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밖으로 나와야 하는 불안함을 수반한다.

그리스도인은 죽는 것과 같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삶으로 자신을 초대하는 부활 사건에 응답해야 한다. "이 차원은 세계 안에 있는 또 다른 세계이며 사랑과 화해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와 연결됨으로써 우리는 정직하고 용기 있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241쪽)."

셋째,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진정한 생명이 죽음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죽음을 이겼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포는 죽음 반대편으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을 이기는 것은 죽음이 주는 공포와 불안함을 뚫고, 그 뒤에 있는 생명을 향해 용기를 가지고 걸어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가 죽음이 주는 불안함을 그대로 안고 십자가에서 죽었듯, 그리스도교인 또한 죽음이 주는 불안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남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창조되기를 희망해야 합니다(205쪽)."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는 죽음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부활은 세계를 지배하는 죽음의 힘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저자는 부활이 죽음이 주는 현실성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 근원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뚫고 새로운 생명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4. 나가는 말: 기억하다, 그리고 살아가다

절기는 기본적으로 과거를 기억하는 날이다. 성탄절에 그리스도인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억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한편 부활절에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을 기억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가 다시 사셨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성탄과 부활을 기억하는 절기에 단순히 과거의 일을 재확인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설교는 성탄절과 부활절이 과거를 기억하는 날인 동시에, '삶을 선택하라'는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날이라는 사실을 잘 일깨워 주었다. 하나님이 성탄과 부활을 통해 '삶'을, '생명'을 드러내셨기에, 성탄과 부활의 중심에 있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 안에 있는 삶과 생명을 그들의 삶과 생명 속에 녹여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저자의 논지가 설교 전체에 잘 나타난다고 보며, 독자들로 하여금 성탄과 부활을 기억하는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삶에 대한 지적동의를 넘어, 그들의 삶에 성탄과 부활이 영향을 미쳐야 함을 깨닫게 해주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저자의 설교를 통해 예수 안에 나타난 삶의 풍성함을 만끽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다. 성탄과 부활은 결코 과거의 사건에 머물 수 없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인간에게 다가오시고, 우리 인간을 삶으로 초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글 김종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