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입력 : 2018.02.15 12:56

[크리스찬북뉴스 서평] 합력과 성장

복음주의 신학사 개관
복음주의 신학사 개관

로저 E. 올슨 | 이종원·박욱주 역 | 크리스천투데이 | 236쪽 | 13,000원

로저 E. 올슨은 국내에서도 이미 유명하다. <삼위일체(대한기독교서회)>, <신학 논쟁(새물결플러스)>,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살림)> 등 적지 않은 책들이 출간되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필자는 수년 전 그가 스탠리 그렌츠와 공저한 <20세기 신학(IVP)>을 읽으면서 처음 저자를 접했다. 그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이 신기했고, 어떻게 한 시대를 아우르는 신학을 '초월과 내재'라는 난해한 주제로 명징하게 풀어낼 수 있는지에 놀랐다. 올슨은 명료함과 포괄성이 특징이다.

이 책은 복음주의를 경건주의로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망라한 것이다.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1부에서는 간략하게 '복음주의를 정의'하고 마지막 4부에서는 결론으로 '복음주의의 신학 내부의 긴장'을 다룬다. 왜 결론이 긴장으로 끝나야 하는지는 2부와 3부를 통해 밝혀낼 것이다.

2부는 근대 속에 은닉된 복음주의 신학을 시작으로 부흥주의와 청교도 전통, 웨슬리 운동 속에서 복음주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9장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의 신학'의 차이를 구분한다.

10장부터 시작되는 3부는 후기 복음주의에 속하는 현대의 복음주의를 탐색하면서 네 명의 학자들에게 집중한다. 필자는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복음주의가 무엇이고, 어떤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신학 속에서 복음주의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청교도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필자에게 복음주의는 지나치게 관용적이다. 이러한 필자의 관점은 복음주의가 갖는 복음적 성향과 청교도적 배타성이 낳은 결과이다.

저자는 복음주의 용어가 갖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먼저 복음주의는 '복음'이란 신약적 의미를 반영한다. 즉 배타적이지 않고 '율법적인 종교와 대조(10쪽)' 된다. 즉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기독교 운동(11쪽)'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앞으로 갖게 될 '긴장'의 전조를 발견한다.

또한 복음주의가 갖는 불분명한 관용적 특질(特質)로 혼합주의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하다. 올슨은 복음주의 정의를 초대교회의 복음을 넘어, 종교개혁 시기의 루터, 칼빈, 그리고 영공 성공회의 저교회파까지 끌어들인다.

나아가 소위 경건 운동과 부흥운동에서도 찾아낸다. 필자는 저자가 다섯 번째 정의로 제시한 19세기와 20세기 초에 등장한 '진보적 개신교에 대한 보수 개신교의 반동에서 비롯되었다(14쪽)'고 주장한다.

당시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1940-1950년대가 되면서 후기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전투적이고 분리주의적인 특성을 강조하는 1920-1930년대 근본주의와 결별(15쪽)' 하기에 이른다. 일곱 번째 정의는 대중적 이해로서 정의한다.

복음주의 신학사 개관
▲저자 로저 올슨 교수. ⓒyoutube.com
저자는 이미 서론에서 앞으로 전개할 복음주의 역사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루었다. 이러한 구분은 앞으로 전개될 복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론 역할을 감당한다.

어쨌든 1장에서 저자가 하고 싶은 것은 복음주의는 죽은 전통에 대한 비판과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부흥(21쪽)'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를 접해본 이들이라면, 그들이 빌리 그래함이나 WCC 등의 복음운동과 연합 운동을 비판하고 심지어 배교로 몰아가는 것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현대의 근본주의가 복음이 아니라 '교리'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향은 불가피하게 분리주의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복음주의는 사람들의 현실과 필요에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교리적 느슨함이 불가피하며, 이로 인해 모호한 진리에 대한 정의를 갖게 된다. 이것은 두 진영 사이에 긴장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불가피한 것임을 말한다. 일단 저자의 정의를 들어보자.

"결과적으로 복음주의는 적실성을 통한 기독교의 갱신을 추구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적 메시지의 상황화, 그리고 이 메시지를 현대의 문제들과 연관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23쪽)."

복음주의는 성경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두 극단,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복음을 변형시키지 않으면서 '개인의 영적 필요에 호소(23쪽)'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교리가 아닌 부흥 운동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기에 다양한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참여할 수 있다.

경건주의를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차이이긴 하지만, 화석화된 교회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경건 운동은 '부흥운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다.

이것은 곧 18세기에 일어날 영미의 부흥 운동과 연결된다.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운동가들을 통해 재현된다. 후기에 피니와 무디가 이어가고, 빌리 선데이와 빌리 그래함 등으로 이어지는 부흥운동은 그 뿌리가 경건 운동 속에 있다.

칼빈주의 교리에 천착한 조지 휫필드나 조나단 에드워즈는 제외하지만 웨슬리와 무디, 심지어 빌리 그래함 등은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거의 배교 수준에 이른 자들로 취급받는다.

올슨은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청교도적 견해는 토마스 후커 같은 목회자들에 의해 뉴잉글랜드 식민지인 메사추세츠와 코네티켓 지역에 이식되었다(59쪽)'고 말한다. 올슨의 주장 속에는 뉴잉글랜드(그러니까 지금의 미국 동부)가 초기부터 청교도적 신앙으로 일관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청교도는 크게 왕정복고 이후 남겨진 청교도와 완전히 분리해 나간 분리파 청교도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 선택을 취한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로 건너간 청교도들이다.

그들은 타락한 영국을 떠나 새로운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해 자신들의 정신을 이식한다. 이것이 미국 청교도의 기원이다.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후커가 만들어낸 '계약 신학'이 바로 그 정점이라 할 만하다.

9장은 우리가 유의해서 봐야 할 대목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변화는 현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긴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동안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 큰 차이가 있거나 다른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근본주의자들은 많은 개신교와 결별하고 스스로 퇴화되거나 게토화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근본주의는 고등 비평으로 무장한 자유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성경을 지켜낸다. 그러나 괴물과 싸우면서 자신들이 괴물이 되고 만다. 세대주의자들과 어색한 동거를 시작하며, 성경을 과도한 문자로만 해석하려는 반과학적 성향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인 오르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하지만 '단 한 번도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옹호한 적이 없다(126쪽).' 그럼에도 미국의 근본주의자들은 오르의 주장을 수용하고 근본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수용한다. 또한 이전에 다양하게 인정했던 재림과 휴거가 정설인 것처럼 근본주의 안에 뿌리내렸다.

복음주의 신학사 개관
▲책 3부에서 소개한 복음주의자 5인. 왼쪽부터 칼 헨리, 에드워드 카넬, 버나드 램, 도널드 블로쉬, 클라크 피녹.
이러한 재림과 휴거의 강조는 세상과 기존 교회를 '배교자' 또는 '음녀 바벨론'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퇴보에 환멸을 느낀 많은 목회자들이 오켄가를 중심으로 1942년 뉴잉글랜드 협회를 창설했다.

이것으로 이전 분리주의 성향의 구 근본주의와 분리되고, 후기 근본주의 신복음주의가 탄생한다. 어쩌면 20세기는 신학적 논쟁 시대라 할 만하다. 이 부분은 데이빗 비일의 <근본주의의 역사(CLC)>를 참조하면 좋다.

3부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은 독자들에게 남겨두고 싶다. 올슨의 주장은 명백하다. 그는 퇴행적인 근본주의보다 다양한 관점을 가지는 복음주의를 옹호한다. 어쩌면 복음주의에 대한 물음보다는 현대 교회가 '복음'에 합당하게 반응하고 있는가를 묻는 듯 하다.

복음주의 운동은 화석화되고 생명력을 잃은 교회가 부흥운동을 통해 되살아난 역사다. 경건주의나 청교도 운동, 18세기의 대각성 운동과 그 이후의 부흥 운동들이 그렇다.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복음주의 양상도 바뀌었다. 미로슬로라브 볼프, 스탠리 그렌츠, 케빈 밴후저, 낸시 머피, 존 샌더스 등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젊고 혁신적인 사상가로 복음주의 신학의 개혁을 선도하고 있다. 반대 근본주의 진영에는 밀라드 에릭슨과 웨인 그루뎀이 있고, 좀 더 구(舊)근본주의에 가까운 학자로는 노만 가이슬러와 알 몰러가 있다. 저자의 결론은 이것이다.

"만약 상기의 신학자들과 그 추종자들이 서로 대화하기를 멈추고 두 개의 캠프로 분열된 채 서로를 무시하고 심지어 중상모략을 행하기까지 한다면, 이는 복음주의 신학에 심각한 손실을 초래할 뿐이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복음주의 신학의 미래는 영향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들로 구성된 이 두 집단의 화합에 달려있다(226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님은 결코 분리를 원하지 않으신다. 다양한 관점은 때로 긴장과 갈등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합력과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든, 하나님께 대해서든 부족하고 열악하다. 계속하여 합력하고, 성장할 필요가 있다.

정현욱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