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할머니는 손자를 서당에 보내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하려고, 비록 몸은 노쇠했지만 뒷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따기도 하고 도토리를 주워 모으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등잔불 밑에서 글을 읽던 승훈은 문득 할머니를 향해 물었다.

"할머니,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사람 노릇을 하려는 데 뜻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와 함께 공부하는 애들은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데요."

"엉뚱한 생각이라니?"

"공부를 잘 해야 하는 건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기 위한 것이고 그래야만 출세하고 훌륭한 사람도 된다는 거예요. 정말 그런가요, 할머니?"

"하기야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해 출세하려고 공부하고 있단다. 또 그게 반드시 잘못된 것은 아니고...."

"예?"

"허지만 사람 노릇을 먼저 배운 뒤에 급제도 하고 출세도 해야지, 사람은 못 되고 출세만 하면 어찌 되겠니? 그러니 홍경래의 난 때처럼 벼슬아치가 죄다 썩었던 것 아니겠니. 지금 일본 놈들은 마치 병아리를 잡아채 털을 벗기고 뜯어먹는 독수리처럼 우리나라를 후리고 있단다. 조정의 간신배들을 앞잡이로 세워서 말이다."

"아, 나쁜 놈들! 우선 사람 노릇을 잘 배워야만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럼. 우리 승훈이는 앞날에 바른 사람도 되고, 큰 사람도 되려무나."

"예, 할머니...."

"승훈아, 넌 사람의 영혼이 어디 있는지 아니?"

"머리? 가슴 속?"

"영혼은 사람의 결점이나 약점 속에 깃들어 있다고 하더구나."

"예?"

"그래서인지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 속에 영혼이 숨쉬는지도 모르지. 단점을 욕하기보다 이해하고 사랑해 주면 고운 영혼이 서로 만나게 된다더구나. 승훈아, 가엾고 힘없는 사람들을 늘 잊지 말거라. 나아가 허약한 이 나라도 살리고...."

"예, 할머니 말씀대로 꼭 그렇게 하겠어요."

"우리 승훈이 때문에 그런 날을 보게 된다면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나.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는지...."

"그런 말 하면 무서워요."

승훈은 할머니의 품속으로 파고 들었다.

고향이나 어린 시절에 살았던 고장은 사람의 삶에 큰 흔적을 남긴다.

승훈은 가까이에 있는 유기 공장에서 놋그릇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몇 차례나 보았다. 헌 놋쇠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풀무불에 녹여지고 그 놋물이 밖으로 나오면 제각기 다른 그릇의 형태로 식힌 다음 세밀히 깎고 두드리고 다듬어 여러 가지 새 그릇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 과정은 승훈의 눈에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같이 보였다.

"사람은 누구나 제조공장에서 그릇이 만들어지듯 좋은 배움과 실행을 통해 참된 새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나도 그렇게!"

어린 승훈이 뜻을 세우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집안 살림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올곧게 자라던 아이에게 어느 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불행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겨우 열 살 무렵이었다.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 주던 할머니와 아버지가 병들어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었다.

어린 형제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시련이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께 사랑받으면서 자랐는데 이제 그 할머니도, 얼마 후엔 아버지마저도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돼 버린 셈이었다.

며칠 동안 슬픔과 외로움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었다.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고 할머니와 아버지가 그리워 눈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형도 일터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어둑한 저녁 무렵이 되면 홀로 무서움에 떨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당 훈장이 집으로 찾아왔다.

"승훈아, 그래 어찌 지내느냐?"

"훈장님, 할머니와 아버지는 이제 다시 못 보게 되는 거죠?"

눈물이 가득 고인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훈장은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승훈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말했다.

"내가 달리 찾아온 게 아니라.... 너도 임일권이라는 분을 잘 알고 있지?"

"예."

승훈은 머리를 끄덕였다.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 발굴과 연구 성과에 도움 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