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더십 논쟁
여성 리더십 논쟁

토마스 R. 슈라이너 외 | 안영미 역 | 새물결플러스 | 484쪽 | 22,000원

나는 감사하게도 몇 달 전 본서를 새물결플러스 출판사로부터 받았다(새물결플러스 출판사는 얼마 전부터 신간을 꾸준히 보내주고 있다. 부족한 자에게 서평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새물결플러스 출판사에 이 자리를 빌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이 책을 읽는 것이 다른 일들에 밀려 이제야 서평을 쓰게 되었다.  

미뤄졌던 이 책의 서평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그것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매 주일 오후 존 스토트의 책을 중심으로 토론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 나오는 주제가 '성경과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의 텍스트 안에서 문화적 요소와 그 영향과 범위, 그리고 해석의 방법들이 다루어져야 하는데(물론 스토트는 매우 간략하고 압축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어 사실은 더 모호해 지지만), 현재 가장 중요하고 당면한 문제가 '여성'에 관한 부분이라 본서의 도움을 받고자 읽게 되었다.

문화 VS 초문화

본서의 편집 책임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R. 벡이 마지막에서 결론을 맺고 있듯, 성경의 해석과 적용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열려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벡은 현재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여성 안수'에 관한 두 진영, 즉 21세기 현재 '여성'에 관한 신학적 두 관점이라고 마무리하고 있다. 그리고 선택은 독자의 견해에 맡기고 있다.

본서는 상보주의(전통주의, 여성 목사 안수 반대 입장) 2명의 신학자와 평등주의(여성주의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여성 목사 안수 찬성 입장) 2명의 소논문 한 편씩과 그 논문에 대한 논문저자들의 상호간의 비평 12개가 실려 있다.

우선 소논문의 저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주요 본문들을 단어와 문맥, 문법적 사용 용례에 따라 그 정확한 의미들을 추정하고 있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자기에게 유리한 자료들만 근거로 내세우고 주장(추정, 절대 단언하지 않음)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므로, 단어의 의미와 해석에서 공방은 현재로서는 영원히 평행선을 유지할 것 같다(케팔레, 에제르, 디아코노스 등의 핵심 단어들조차 완벽한 의미의 일치를 보이지 못하고, 서로의 입장만 반복하고 있다).

사실 본서에 숨겨져 있는 중요하고 예민한 부분은 성경의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콘텍스트, 즉 그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 방식과 이유와 목적에 해당하는 당시의 문화와 배경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약간의 공방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성경본문들을 문화적(상황적) 텍스트로 볼 것인가? 아니면 초문화적(영원한 규범적, 문자적) 텍스트로 볼 것인가에 따라 서로의 입장이 갈라지고 있지만,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아마 현재 자료와 연구 수준의 한계인 것 같으며, 교회사 속에서는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예외적 상황도 포함하여>이 나오기 때문에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예장통합 전국여교역자연합회
▲한 여성 목회자 모임 모습(사진은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노예제도

본서를 중간쯤 읽었을 때 문득 과거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이 떠올랐다. 산업혁명은 단순한 경제활동의 혁명이 아니라, 기존의 삶의 문화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대체시키는 혁명이었다. 물론 영국의 윌버포스와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의 업적을 충분히 인정해야 하지만, 어떤 면에선 노예제도의 폐지는 산업혁명의 역할이 더 컸을 것이다.

과거 '노예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 소유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은 소유물에서 동등한 인간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분명 문화적 변화가 텍스트를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것이다(텍스트가 바뀐 것이 아니다. 또한 텍스트의 권위가 실추되는 것도 아니었다).

즉 가다머가 '모든 것은 해석(해석자의 관점)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고, 앤서니 티슬턴이 '두 지평'의 해석학을 강조한 것을 우리가 기억할 때 성경은 영원히 열려 있는 텍스트이다.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기에 텍스트가 말하고, 나아가고,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다.  

리더십(Leadership)과 헤드십(Headship)

평등주의와 상보주의 양측 모두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는 서로 일치한다. 그러나 상보주의자들은 은사(기능적) 상호존중을 의미하고 있고, 평등주의자들은 기능적(은사) 상호존중뿐 아니라 직분적(목사와 장로, 감독)인 부분에 있어서도 상호 존중으로서 남성이 여성의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사실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자적 텍스트에서는 상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유리하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화적(1세기 당시) 관점에서와 일부 그 단어 사용 용례에 있어서 평등주의자들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즉 여성이 교회 안에서 리더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에 있어서는 양측 모두 여성이 교회 안에서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데 일치점을 보인다. 그러나 여성이 교회의 머리(목사, 장로)의 직분을 가질 수 있느냐에서, 상보주의자들은 반대를 보이고 있다. 즉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본문들을 초문화적인 문자적 명시로 보고 있는 것이다(이 부분에서 자세한 설명과 논리적 근거가 취약하다).

이 즈음에서 나는 다시 '성경 텍스트 안에서 규범과 문화를 어떻게 분별해 낼 것인가?'라는 딜레마에 다시 빠진다. 아마 이 부분은 신학의 발전에 따라 해결될 것이지만, 그럼에도 영원한 딜레마일 것이라 예상된다.

다만 '남성이 여성의 머리?'라는 논의에서 그들이 문자, 문화, 창조, 예언자, 제사장, 집사, 장자 등의 여러 각도에서 살피고 있지만, 양쪽 다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약성경이 궁극적으로 종결시킨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다(제사장, 장자, 예언자 등 모두).

매우 불완전하고 비약적이고 우발적인 제안이지만, 남자(남편)가 여자(아내)의 머리라는 구약적 관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새로운 아담)으로서 머리 되심으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누가 머리가 될 것인가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됐으면 하는 바람까지 든다(실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의 목사 안수와 장로 직임에 대한 문제는 현실적 문제로 남아 있다. 이러한 가운데 자신의 입장만을 주장하는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토론의 문화가 형성되기를 바라며, 더욱이 일반 사회 여성주의 운동에서 발견되어지는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의 권력 투쟁처럼 정치적으로 비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한 전제에서 본서는 상보주의자들과 평등주의자들의 양쪽 입장을 공정하게 다루고, 공정하게 서로를 비평케 함으로 자신의 입장과 상대의 입장 모두를 아우르고 통합 발전시키고자 하는 자들(편집자 제임스 R. 벡 의 소원이기도 하다)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강도헌 목사
제자삼는교회,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