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우 목사의 로마 이야기] 시대가 요구하는 영적 뵈뵈

입력 : 2018.02.07 13:29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기 일에 바빠 주의 일에 무관심합니다”

뵈뵈 로마 한평우
▲뵈뵈가 도착한 보디올 항구. ⓒ한평우 목사 제공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현재만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생은 항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 저편에 계시는 분이시기에 과거나 미래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에게는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2천 년 전에 존재했던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 뵈뵈 같은 인생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뵈뵈

뵈뵈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힘은 항상 상상을 초월하는 눙력을 발휘합니다. 영국 에드워드 8세는 사랑을 위해 대영제국의 왕이라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헌신짝 버리듯 던져버렸습니다. 그것도 이혼 경력이 있는 심프슨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사랑을 위한 헌신은 콧대 높은 영국 국민을 민망하게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진실한 사랑의 정의를 말씀하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4)".

주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시고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목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진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은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평생 고민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함으로 이루어가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흉내낼 수는 있겠으나 그 같은 질량의 사랑을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도해야 합니다.

◈겐그리아 교회의 집사 뵈뵈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롬 16:1-2)".

뵈뵈라는 이름의 의미는 '순결'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처럼 그녀는 바울을 감동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름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기 위해 평생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뵈뵈가 사는 겐그레아는 고린도에서 11km 떨어진 샤론 만에 있는 항구로 헬라와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서원한 것이 있어 머리를 깎기도 했습니다(행 18:18).

겐그레아 교회라고 한 것에 대해, 혹자는 고린도 교회의 지교회 내지는 그녀의 집에 세운 가정교회가 아닐 까라고 생각합니다. 뵈뵈는 그 교회 성도였습니다.

뵈뵈에 대해 일꾼이라고 했는데, 일꾼은 '디아코논'이라는 헬라어로 직책상 종을 의미합니다. 여(女)집사라는 직책은 보통 2세기부터 문서상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뵈뵈를 여집사로 볼 수 없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뵈뵈를 집사로 보았습니다. 그가 한 일은 여 집사가 하는 일임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종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비록 해방노예가 된다 해도, 반드시 자신의 이름 앞에 라틴어 'L' 자를 명기하도록 했다고 로마사의 권위자 기번은 언급했습니다.

또한 해방 노예는 절대로 원로원이나 기타 공직에 나갈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막았습니다. 고로 종은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고 무시당하고 억압당했던 부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 속에서 뵈뵈를 일꾼, 즉 종으로 묘사한 것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호칭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종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피곤하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아주 바쁘기 때문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 일이 하기 싫습니다, 그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핑계 댈 수 없는 것이 종입니다.

로마 교회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을 체험하고 돌아와 세운 자생적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뛰어난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로마까지 찾아온 사도가 없었습니다. 이방인을 위해 사도로 세움받은 바울이 가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써서 신실한 자매 뵈뵈 편에 로마 교회에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저 유명한 로마서 두루마리입니다.  

◈바울의 천거받은 뵈뵈  

우리 자매를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자매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합니다. 천거한다는 말은 '추천하다, 맡기다'라는 의미입니다. 천거하다는 말보다 더 강한 어구인 '맡기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뵈뵈를 로마교회에 맡김을 의미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사람들이 많았고 힘세고 젊은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연약한 여인 뵈뵈를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추천했다는 것은, 당시에 문화적 통념으로 볼 때 놀라운 일입니다. 그 많은 남자들을 제쳐 놓고, 왜 바울은 연약한 뵈뵈를 '픽업'하여 그 편에 로마 교회에 편지를 전해주도록 했을까요?

당시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는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일을 연약한 여인 뵈뵈에게 맡겼다는 사실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하신대로 일하셨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한 뵈뵈

바울은 그녀를 인정하여 주라고 했습니다. 2절에서 '너희가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합당한 예절로 받아들이라'는 구절은 가족처럼 받아들이라는 말로 해석합니다.

모르는 손님을 친절하게 대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회에 추천하면서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마땅히 인정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설명입니다.

우리는 보통 귀한 손님이 방문할 때 정성을 다해 맞이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에 추천하는 뵈뵈를 통해, 신실한 성도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 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신실한 제직들, 신실하게 헌신하는 성도들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알아주고 높여줄 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교회는 마땅히 인정하고 그의 헌신을 기억하고 천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더 열심히 일하고 또한 그 아름다운 헌신들이 전해지도록 해야 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거룩한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또 바울은 그녀를 물질적으로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2절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뵈뵈는 로마 교회를 도와주기 위해 갔습니다. 그 도와주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르지만, 아마 교회가 어떻게 헌신하고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는 일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런 일로 방문하는 뵈뵈를 로마 교회가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기술한 것은 로마 교회가 자존심이 높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수도라는 자부심, 로마 시민이라는 자부심 말입니다. 그러니 제국의 통치를 받고 있는 헬라 사람인 뵈뵈를 얕잡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존경하고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주 안에서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을 강하게 다질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의 보호자 뵈뵈

2절에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보호자란 '프로이스테미'란 단어로, 여자 후원자나 보호자를 뜻합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여기서만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녀가 바울과 수많은 전도자를 도왔음을 의미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단어를 헬퍼(helper), 즉 보혜사와 같은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단어를 다른 사람 앞에 서거나 대신하여 싸워주는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아마도 바울의 재정적 후원자로 평생 도왔을 것으로 봅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에도 막달라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인 요안나, 수산나, 그밖에 여러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그 분을 후원하였습니다(눅 8:1-3).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사역할 때, 자주장사 루디아는 그들 일행을 강권하다시피 하여 자기 집에 머물게 한 후 뒷바라지를 책임져 주었습니다(행 16:14-15).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바울은 전도자의 길을 갈 수 있었고, 수많은 고난 중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독하고 고난이 가득한 선교사의 길을 완주 할 수 있었습니다.

뵈뵈 로마 한평우
▲뵈뵈가 걸어간 아피아 안티카. ⓒ한평우 목사 제공
◈뵈뵈의 목숨 건 헌신
 
우리는 뵈뵈의 헌신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뵈뵈는 바울이 쓴 로마서를 손에 들고,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던 제국의 수도를 향해 먼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그 길은 배를 타고 몇 달을 가고, 또 걸어가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 그 길은 날씨가 좋으면 15일, 좋지 않으면 55일이 걸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 군대가 군사적 목적으로 갈 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 바울이 죄수로 로마에 올 때처럼 보통 화물선을 이용하였기에, 더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대강 항해길을 계산해 보면, 고린도에서 아테네로, 그리고 크레타를 경유하여 몰타, 그리고 발칸반도의 항구들을 경유합니다. 그리고 시칠리의 수라구사와 카타니아, 팔레르모, 레기온 등을 경유하여 최종 항구인 보디올에 도달해야 했습니다.

후에 바울이 죄수로 로마로 가는 길은 풍랑을 만나 모든 화물을 바다에 버렸기 때문에, 항구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로 오려면 고린도에서 에게 해를 돌아 지중해로 나와야 했습니다. 에게 해를 돌아 지중해로 나오는 길만 해도 수 주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잘록한 고린도 반도를 뚫어 에게 해에서 지중해로 통과할 수 있도록 운하를 뚫기 위해 기원전 6세기부터 고민하고 또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그리스를 좋아했던 황제 네로는 노예 2천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했습니다. 운하는 다이나마이트가 발명된 19세기 말에야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최종 항구인 나폴리 만의 보디올에 도착한 다음, 하선하여 로마까지 200km나 되는 아피아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사나운 뱃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몇 달을 버티어 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걸어서 로마까지 가려면 삼관 같은 여관에서 잠을 자면서 열흘 가까이 걸렸을 것입니다.

가녀린 여인의 몸으로 그 먼 길을 간다는 것은 치안이 잘 되어 있다 해도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21세기인 현재 그 길을 걸어간다 해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여인이 홀로 가기에는 여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뵈뵈는 죽음을 각오하고 바울의 심부름을 한 것입니다. 몇 달씩 걸리는 길을 가면서, 가족들은 어떻게 돌볼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뵈뵈는 그 길이야말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요, 자신을 사랑하사 구원하신 주님을 사랑하는 일임을 알았기에, 주님을 위해 목숨을 드렸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 없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한 번 큰 헌금을 하는 일은 왠만하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에 자신을 지속적으로 드리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뵈뵈는 바울의 재정적 후원자로 헌신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드렸습니다. 그 일은 곧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 바쁩니다. 그래서 주의 일에 무관심합니다. 바울은 독백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았다(빌 2;21)고 했습니다. 그러나 뵈뵈는 자신의 일보다, 주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힘든 일에 자신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헌신으로 인해 로마서는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뵈뵈는 자신의 심부름이 그처럼 역사적으로 대단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주님의 일이기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로마서의 위대함

뵈뵈를 통해 햇빛을 보게 된 로마서는 어떤 책일까요? 로마서는 가장 위대한 성경 중의 성경입니다. 로마서는 16장, 433절로, 헬라어 글자 수는 7,000자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신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지금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스펜너(Spenner)는 성경을 가락지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가락지에 달린 보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또 성경을 광맥에 비유한다면 로마서는 금이 묻혀 있는 광맥과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서를 통하여 회심한 사람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로마서를 통해 변화받은 사람들

로마서는 어거스틴에게 엄청난 변화를 주었습니다. 500년 만에 한 사람 날까 말까 한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을 통해 변화되었습니다. 밀라노 시의 대변인으로 있던 그는 영적 깊은 번민에 시달리던 어느 날, 담 너머로부터 들려온 아이들의 동요소리에 엎드러졌습니다. 그 노랫말은 이러했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집어 들고 읽으라, 집어 들고 읽으라)!" 이것은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한 말이 아니라, 담 너머에서 아이들이 놀면서 즐겁게 부르는 노랫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이 노랫말을 붙잡아 역사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여 성경을 펴들었더니, 로마서 13장 12-13절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 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자".

이 말씀은 어거스틴을 단번에 통회하고 자복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충고를 들으면서도 버리지 못했던 음란한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 헌신함으로  교회사에 찬연한 빛을 밝히는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칭의에 대하여 상상할 수 없는 번민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멀리 로마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까지 순례의 길을 가면 죄가 사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에는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모니카 여사가 예루살렘에서 뜯어다 만든 산타 스칼라(Santa Scala) 계단이 있습니다. 그 계단은 28개로 구성되었는데, 일찍이 예수님께서 빌라도 총독의 재판을 받기 위해 걸어가셨던 돌계단입니다. 그 계단을 회개하면서 무릎으로 올라가면 죄를 용서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루터 역시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던 중, 서너 계단을 남겨두고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 번개같이 가슴을 쳤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었고, 칭의는 행위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확신은 당시 가톨릭이 가르치는 행위 구원이 잘못되었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비텐베르크 성당에 가톨릭의 잘못된 95개 조항에 대한 공개적 질문을 붙여 공개 토론의 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이 사건을 무시했습니다. 이유는 2천 년 전 제정 로마 시대부터 북쪽의 게르만족을 무식하고 반문화적인 자들로 치부해 왔는데, 아직까지 그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로 교황은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살려주겠다고 가볍게 상대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저는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근거하여 결단을 내렸고, 나의 확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제 입장을 철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개혁자 칼빈은 로마서를 읽다가 은혜를 받고 절대 주권사상을 확립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from Lord),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 혹은 주님을 통해서(through the Lord) 진행되고, 모든 것이 주님에게로(to the Lord) 간다(롬 11:36)'. 즉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주님에 의해 진행되고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에 영향을 받아,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확립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세상은 다스려진다는 사상입니다. 

그뿐입니까? 로마서는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영국을 구원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파송받았으나, 열매가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져 올더스게이를 무력한 마음으로 지나가고 있는 데, 길가의 작은 교회에서 불빛이 새어나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그래도 내가 목사인데' 하는 자격지심이 있어 들어갔습니다.

여남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담임목사님이 출타중이어서 집사님이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떠듬떠듬 읽고 있었습니다. 옥스퍼드 출신 지성인 웨슬리가 볼 때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러나 나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고 듣는 가운데, 놀라운 일이 그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뜨거움이었습니다. 그 뜨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확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쫓는 무리들로 감리교회를 창시하였습니다.

이런 부분을 나열한다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야말로 2,000년 동안 지구촌의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하고 변화시켰던 서신입니다. 이런 책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는데 있어 연약한 뵈뵈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약한 자를 들어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고 말씀하신 대로 일하셨습니다.

그녀의 헌신으로 인해 로마서는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 뵈뵈는 자신의 심부름이 그처럼 역사적으로 대단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주님의 일이기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뵈뵈의 헌신을 통해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사람 뵈뵈는 위대한 영적 역사를 이룬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우리에게 제2의 뵈뵈가 되기를 소원하십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누가 과연 뵈뵈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시대 제2의 뵈뵈를 찾고 찾으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을 말입니다.

우리 한번 뵈뵈로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바울이 왜 그처럼 힘든 길을 걸어갔을까요? 제가 믿기로는 그가 일찍이 삼층천에 불려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고백했는데(고후 12:4),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가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거는 그리스도인은 아주 드뭅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뵈뵈같이 복음에 목숨을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 이런 사람이 눈물겹게 요구되는 세상입니다.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에 풍덩 빠져서 이런 영적 위대한 선배의 뒤를 따르겠다고 나설 수 있을 까요? 영적으로 혼란한 이 시대에 결단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영적 뵈뵈로 사는 분들이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담임)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