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석
▲고용석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
국내 최초 비건(vegan)채식주의자 고용석 대표의 글입니다.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1세기에는 핵이나 양극화, 지구온난화처럼 국가나 민족 단위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기후만 봐도 전형적인 공공재다. 다들 남들이 잘 해줘서 무임승차로 득보기를 원하지, 솔선수범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러니 기후변화를 비롯한 현대의 난제들은 어떤 국제회의라도 합의를 이루기가 만만치 않다. 글로벌 경제는 있지만 글로벌 정치가 없기 때문일까. 설사 합의해도 그 실효성이 의문이다. 이제 민족과 국가의 역사를 넘어서는 인류 공통의 역사의식 나아가 우주적인 정체성까지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일종의 이야기 과도기에 살고 있으며, 인류 사회의 최대 도전은 공동의 비전 즉 총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못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세계대전으로 서구 문명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했던 슈바이처의 입장과 비슷하다.

슈바이처는 문화의 파국은 이야기, 즉 세계관의 파국에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문화에 대한 의지는 윤리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의식하는 보편적인 진보 의지이다. 아무리 세계와 인생을 긍정하는 훌륭한 세계관이라도, 문화의 창조는 그 세계관이 내면화 되고 윤리화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지식과 능력이 이룩한 업적이 대단해도 인류가 윤리적 목표로 나아가지 않으면 물질적 진보의 혜택은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위험도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구 사회가 나름의 세계와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을 가졌음에도 몰락한 것은, 그것을 외부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근본적 사고가 없는 세계관은 결코 내면화되고 윤리적으로 실천되지 못한다. 그 문화는 아류일 수밖에 없다.

슈바이처는 근본적이고도 보편적인 윤리 개념을 찾아내려 고심했다. 깊은 영감 속에 문득 '생명 외경(畏敬)'이 찾아온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여 살려고 하는 생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의식 속에 항상 내포된 근원적이고 가장 직접적인 사실이다.

이 명제는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뻔한 사고가 아니라, 사고의 시작을 규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체험하게 한다. 생명 외경은 특히 인간뿐 아니라 동식물에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체험된다.

생명 외경은 그 자체가 세계와 삶을 긍정하는 세계관일 뿐 아니라 윤리이다. 우리는 우리 영역에 들어오는 세계의 생명을 생명의지 속에 체험하고, 우리의 생명의지를 행동을 통해 무한한 생명의지에 내맡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생명외경은 윤리적 신비주의이며, 그 완성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 슈바이처는 이렇듯 생명 외경에 기초한 문화재건을 노래한다.

이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도 깊게 관련되어 있다. 사실 이 황금률은 기독교뿐 아니라, 표현은 약간 달라도 모든 영적 전통과 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는 물론, 힌두교도 '아힘사(Ahimsa)'란 이름으로 '네가 원하는 바를 상대에게 베풀라'고 강조한다. 공자 역시 평생 행할만한 것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상대에게 베풀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의 전통풍속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상대의 범위가 인간뿐 아니라 자연스레 동식물 무생물까지 확대된다. 옛사람들은 콩을 심을 때 세 알을 심곤 했다. 하늘의 새가 한 알, 땅의 벌레가 한 알, 사람이 한 알을 먹도록 배려한 것이다. 오합혜(五合鞋)와 까치밥, 고수레 풍속도 마찬가지다. 자연과 동식물은 결코 인간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구조인류학의 창시자 레비 스트로스는 인간들 간의 단절인 바벨탑 사건에 앞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채소와 열매만 먹다가(창 1:29) 노아 이후 인간이 육식동물이 된 점(창 9:3)에 주목한다. 인간들 간의 단절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단절에서 비롯된 결과이거나 그 특수한 사례라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아기들에 동물 인형을 안겨주고 동물 그림이 가득한 그림책을 보여주는 것도 이런 관계를 막연히 의식하고 있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육식이 '채식의 특수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주기도문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3)'라는 구절이 있다. 후자는 '용서받고자 한다면 용서를 베풀라'는, 앞서 황금률의 실천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만약 전자의 일용한 양식, 특히 우리의 밥상 선택이 그 가르침과 모순되는 선택이라면 문제는 사뭇 달라진다.

밥상에 오르기 위해 연간 700억 마리의 동물이 무자비하게 도살당한다. 어류의 50%와 세계 농지의 80%, 물 소비의 70%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낭비된다. 또한 세계 식량의 40%가 가축사료로 투입되면서 연간 10억명은 배고파 죽어가는 반면, 20억명은 배불러 만성질환으로 죽어간다. 그리고 그 질환치료를 위해 연간 수억마리의 동물들이 실험대상으로 희생된다.

채식주의자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 영문판 표지.
이러한 과정에서 경제 구조의 왜곡과 인수공통 전염병은 물론, 지구온난화, 생물 다양성 같은 온갖 치명적 생태계 파괴가 초래된다. 이 고통과 죽음의 악순환은 미래의 아이들과 생명들에게 무의식적 폭력과 고통을 가하며  대대손손 황금률에 위반된다.

폭력, 아동학대, 자살, 약물중독, 비만, 스트레스 등, 현대 사회의 심각한 문제들도 성찰해 보면 모든 것이 우리가 오로지 이익을 쫓아 고기를 빨리 살찌우기 위한 과정에서 동물들에 가한 행위들이다. 인공수정을 통해 갓 태어난 새끼들을 떼어놓고 강제 임신을 거듭시키며 온갖 약물을 투여한다.

공장식 사육환경과 도살 과정은 현대판 홀로코스트에 다름 아니다. 동물들에게 엄청난 두려움과 스트레스, 분노 등을 야기한다. 동물들에 가한 폭력은 부메랑이 되어, 인간 사회 곳곳에서 똑같이 발견된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고통과 죽음의 쳇바퀴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진다는 것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 황폐해진 생태계, 그리고 후손에 끼치는 고통과 단절하는 데도 익숙해진다. 생명을 물건으로 보는 것도 당연히 여기게 된다.

그런 면에서, 동물을 식용으로 삼아 학대하는 행위는 단연코 우리 문화 최대의 그림자라 할 수 있다. 사실 끔찍한 것은 동물의 고통과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고기를 먹는 것은 본연의 생명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짓뭉개고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죄의식을 형성하고, 이 집단적 죄의식은 우리가 먹는 폭력을 감추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도록 조장한다. 지구적 생태계 파괴, 소비지상주의, 여성억압, 인종차별, 약물중독 등은 어떤 면에서 소위 그림자의 외부적 투사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생명 의지는 생명 의지의 신비로운 상승이라는 동경과 생명 의지의 신비로운 하강이라는 불안과 고통에 둘러싸여 있다. 이제 우리는 자신과 세계의 생명 의지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지 분명하게 결정을 내려야 한다.

특히 일용할 음식에 깊은 깨어있음이 요구된다. 오늘날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며, 상황이 매우 긴급하기 때문이다. 이 음식을 선택하는 인식의 질에 인류의 지속가능성과 인간회복, 그리고 슈바이처가 노래한 문화 재건의 성패가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생명 속에 깃든 영성과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존재이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능한 모든 부분에서 영성을 회복해야 한다. 환경과 문화·정치·경제 등의 총체적 위기의 근본 원인도 바로 영성의 부족에 있다.

영성의 회복은 생명 외경이라는 사랑의 실천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한 생명으로서 소망한다. 매 끼니의 밥상에 생명 외경의 빛이 비추어져 고통과 죽음의 악순환이 종식되기를!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들도 유독 이 문제에 대해서만 침묵하는 태도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기를!

고용석
생명사랑채식실천협회 대표
한국채식문화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