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불의한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가다 멸망당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해 멸망당합니다. 이것이 죄인의 딜레마(Dilemma)입니다.

성경의 웃사(Uzza)는 성결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다, 하나님의 거룩에 소멸됐습니다(대상 13:10). 심지어 하나님을 대면하도록 허락 받은 거룩한 대제사장까지도 성결의식 없이 지성소에 들어갔다 죽어나오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옷에 방울을 단 이유도, 혹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한 경우 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출 28:33-35).

일찍이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히 12:20)"고 경고한 말씀 역시 그 같은 불행을 막기 위해섭니다.

이 경우들은 모두 죄의 구속을 받지 못한 불의한 죄인이, 종말 때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받을 진노를 예표합니다. 불의한 죄인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오직 한 경우,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소환을 받았을 때입니다. 그 전에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갈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만일 심판 소환을 받기 전에 성결을 입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첫 대면은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 될 것이고, 영원한  저주에 빠뜨려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는다 해서 진노를 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나가지 않는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리는 것이 구원이요 지복인데(롬 5:1; 10-11), 그것을 누리지 못하니 그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주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사 59:2, 히 12:4). 영원한 형벌의 곳인 지옥은, 하나님께로의 접근이 영원히 엄금된 곳입니다(살후 1:9).

그리고 이 하나님과의 단절이, 강제적 엄금이 아닌 자발적인 거부라는 점에서 인간의 이중적 비참함을 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듯 그 자신의 소경됨과 완고함으로 인한 불신앙의 결과인 동시에,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요 12:39)" 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소가 제발로 푸줏간을 들어가고, 미련한 자가 스스로 올가미를 목에 거는 것(잠 7:22) 과 같은, 자발적인 '셀프 심판(self-abandonment)'입니다.  

반면 하나님께 나아가도 소멸되거나 진노를 받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유자재로 출입하며, 마음껏 그와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는 바로 화목제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이 "항상 앞에 계신 주를 뵈올 수 있고(행 2:25)",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복을 입은(시 65:44)"자들입니다.

하나님은 택자들을 당신의 진노에서 건져 그의 곁에 두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며(요일 4:9-10), 이를 제쳐놓고 하나님 사랑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예수(마 1:21)'와 '임마누엘(마 1:23)'이심은, 그가 화목제물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섭니다. 이 두 이름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와 화목(미움과 사랑)'의 속성을 통해, 자신은 인간과 오직 두 종류의 관계만 맺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곧 진노하는 원수 관계이든지, 화목하여 사랑하는 관계이든지 입니다.

인간 사이의 관계는 원수 같은 사이, 친한 사이, 약간 거리를 두고 싶은 사이, 대면 대면하는 사이 등 다양한 형태들이 있지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는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어정쩡한 대상이 없으며, 무덤덤하고 대면 대면한 관계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랑의 대상(습 3:17), 아니면 맹렬한 진노를 퍼붓는 원수(사 30:27)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첫사랑만 있을 뿐, 권태기의 찌들은 늙다리 사랑이란 없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미워하되 철천지 원수 같은 미움만 있을 뿐, 저주 없는 미움이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구원과 유기(abandonment)'의 작정도 '사랑과 미움'이 그 기초입니다. 사랑이 택함(choice)을 낳았고, 미움이 유기(abandonment)를 낳았습니다.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선택(choice)과 유기(abandonment)도 아닌 중간은 없습니다.

이는 그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신(롬 9:13) 사례를 통해 적나라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그들이 선이나 악에 의해서가 아니라(롬 9:11), 대상에 대한 영원한 '사랑과 미움'에 의해 결정됐습니다(엡 1:4-5). 인간의 운명은 오직 이 하나님의 사랑(선택)과 미움(유기)에 의해 결정됐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의 요구에서도, 하나님의 양단간의 속성이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미워하든지 사랑하든지 두 가지 마음만 가질 수 있을 뿐, 중간은 없다고 말합니다(출 20:5-6). 인간의 재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 재물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미워하고 재물을 사랑하든지 할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6:24).

또한 그는 우리에게, 그의 편이 되고 그의 적극적인 협력자가 될 것을 종용하며, 그렇지 아니하면, 그를 훼방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마 12:30).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신 것에서도(계 3:15-16), 처음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긴다고 하신 것에서도(계 2:4-5), 이러한 양단간의 하나님의 성품이 엿보입니다.

그리고 대비되는 하나님의 '미움과 사랑'의 두 속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두 속성에서 비롯됐습니다. 불의를 미워하는 그의 '공의'가 악인을 철천지 원수로 대하게 하셨고, 택자에 대한 그의 뜨거운 '사랑'이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공의와 사랑의 성품이 없었다면, 인간에 대한 불같은 사랑도, 악인에 대한 맹렬한 저주도 없었을 것이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일도 없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복합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미지근할 수 없는 이유도, 기독교가 '적당함'과 '예(禮)'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교양적 종교일 수 없는 이유도, 하나님의 화끈하고 뜨거운 사랑을 받은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면 막무가내의 남녀의 첫사랑처럼 하나님을 향해 물불을 안 가리게 되는 것도,  그가 받은 뜨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