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인들 가운데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두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는 계몽주의, 경건주의, 완전주의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들이 흔히 인용하는 본문들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산상수훈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등입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완전주의(Perfectionism)의 근거구절로 삼습니다.

오늘 우리가 완전주의 신앙에 우려를 표하는 것은 그것이 교리적 오류라는 점 외에도, 완전에 도달하지 못할 때의 좌절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 자체를 포기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오'입니다. 성경은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가르치지 않으며, 그들이 예시한 성경구절들 역시 완전주의를 지지해 주지 않습니다.

이는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째, 죄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생득적 불완전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은혜 충만하고 언행심사가 완전한 순간까지도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비록 그가 도드라진 '행위의 죄(actual sins)'는 피하고 있을지 모르나, 은밀하고 영적인 '내면의 죄(inner sin)'까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는 순간까지도 그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며, 그의 의(義)는 벌레 먹은 과일처럼 온전치 못합니다.

자타가 율법에 흠이 없다고 인정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이 "그 안에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마 23:27)"이라고 독설하신 것도, 그들의 외형적 경건이 곧 내면의 거룩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죄의 완전한 탈색과 흠결 없는 순백의 의(義)를 기대하는 것은 "표범의 반점이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렘 13:23)"과 같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는 방식이, 죄와의 완전 결별이 아닌 "사해 주시고, 가려 주시고, 인정치 아니하시는(롬 4:7-8)"방식 임을 볼 때, 죄의 불피성(不避性)을 더욱 실감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완전히 벗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죄를 해결하는데 그런 처리방식을 동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용서, 죄의 가리움, 죄의 불인(不認)은 죄의 완전 탈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둘째로 만일 우리가 죄를 아주 안 짓는다면, 자기 의에 배불러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마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적나라한 예가, 율법에 흠이 없어(빌 3:6)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바리새인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한 것은(요 8:44) 남다른 극악한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완전함이 그리스도를 배척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율법적 완전(absoluteness of law)이 하나님의 거룩과 완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2위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마귀 짓거리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죄인의 불행입니다. 죄인은 '죄 있는 죄(sin of guiltiness)'로 망하지만, '죄 없는 죄(sin of innocence)'로도 망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후자에 해당됐습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완전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보다, 차라리 허물지고 약하여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바울 사도가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했을 때의 그 '약함'은 단지 그의 육체의 질병만이 아닌 '죄인 됨'의 유약함도 포함됐으며, 그 유약함이 그리스도를 신뢰케 했고, 그 신뢰가 그를 안전하게 했습니다(고후 12:9).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케 하겠느냐(전  7:16)"는 지혜자의 말은, 죄인의 분수를 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곧 스스로 의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고(갈 2:21), 저주에 빠지지 말라(갈 3:10)는 경고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사실 '완전'은 무죄했던 시절의 아담 같은 사람에게만 요구됩니다. 완전해질 필요가 없는 무죄한 자만이 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의 정확한 의미는, 무흠한 자가 그의 무결함을 '유지'하는 것이지, 흠결에서 무흠함에로의 '변탈(變脫)'이 아닙니다. 완전한 자만이 완전에서 완전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완전이 아닌 행위의 완전을 이루는 것은(사실은 완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이룬다고 착각 할 뿐임), 오히려 자신의 의로 배불림을 받아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마귀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완전할 수 없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어차피 완전케 될 수 없을진대, 대충 죄를 용납하며 살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완전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완전에의 요구는 모두(冒頭)에 언급한 것과는 달리 성취 불가능을 전제한 것입니다(冒頭에는 성취 가능한 '완전에의 요구'를 전제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성취 불가한 완전'을 명령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인간의 불완전이 완전에의 요구를 면제시켜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에의 요구는 그것의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속성의 발로(發露)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신 행위언약을 필두로 인간에게 내려주신 모든 율법은 인간의 타락여부, 성취여부와 무관하게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한 채(마 5:18) 영원히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성취 가능한 것만을 인간에게 요구한다고 믿는 완전주의자들에게는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의 선포이기보다, 그 기저에 오직 기능성과 실용성만 깔려있는 듯합니다. 이렇게 기능적 측면만 고려된 그들의 율법 이해는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는 요구가 성취 가능하다는 전제를 가능케 하고, 그러한 전제가 그들의 완전주의의 기반이 됩니다.

만일 그들의 말대로 완전에의 요구가 인간의 성취 가능성에 기반되어 있고 성취 불가한 것에 대해서는 완전에의 요구가 금지된다면, 그것은 율법의 준행자인 인간에 의해 율법의 권위가 좌지우지 되는 것이고, 율법의 수여자로서의 하나님의 권위는 자리할 곳이 없게 됩니다.

율법은 인간의 성취 가능성에 의해 존립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수여자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존립됩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인간의 능력여부와 상관없이 요구하는 내용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의 무능을 말하면서(시 65:3) 동시에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전 15:34)',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히 12:4)'고 명령합니다. 완전주의(Perfectionism)나 무율법주의(Antinomianism)는 둘 중 하나를 취사선택하므로 생겨난 부작용들입니다. 완전에의 요구에만 부응하므로 '완전주의'로, 인간의 전적 무능에만 부응하려다가 '무율법주의'로 흘렀습니다.

다음으로,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율법의 완전(absoluteness of law)'을 통해 자기의 죄를 보고, 하나님의 자비인 그리스도의 구속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는 소위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 혹은 '율법의 제2용도'에 해당되며,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여(롬 7:13), 죄인이 그리스도께로 인도받게 합니다(갈 3:24).

완전을 요구하는 율법 앞에선 어느 누구도 의의 결핍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사 대단한 성자, 의인이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문둥병자의 고름을 입으로 빤 성자 다미안(Damien, 1840-1889)이나, 아들 둘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은 손양원(1902-1950) 목사님 같은 성자도 율법의 완전(absoluteness of law) 앞에선 의의 결핍을 느껴 그리스도께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율법의 완전(absoluteness of law)은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잠 30:16)"처럼 만족을 모르기에, 어떤 의인에게도 '이만하면 됐다' 라고 낙점해 줄 수 없습니다. 창기 세리나 흠없는 바리새인이나, 율법 앞에서는 호리(毫釐)의 차이도 없는 똑같은 죄인이며, 삼층천(the third heaven)을 넘나드는 신령한 성자의 경건도 무색해집니다.

죄인에 대한 완전에의 요구는 완전주의자들처럼 문자적인 완전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닌, 역설적으로 율법의 완전(absoluteness of law) 앞에서 자신의 흠결을 읽고 그리스도를 의존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