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56장 꿈의 기능(3)

꿈이 개인의 무의식과 관련되어 발생한다고 했다. 이것은 무의식의 특성과 그 범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무의식은 의식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의 문제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이 기초가 된 후에야 꿈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의 기능의 문제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다. 실로 꿈의 기능을 잘 알게 되면 위험에 대하여 미연에 방지하는 것, 고민하지 않고 좋은 길로 안내를 받는 것, 그리고 심리적 갈등을 해소하여 현실에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것 등 유익한 점이 많을 것이다.

1. 원시성 전달기능으로서 꿈

꿈은 원시적 본능을 되살린다. 이것은 꿈이 태고로부터 정신에 이어져 온 유사 이전의 무구한 정신의 경험과 역사를 무의식이 담아 의식에 전달하는 기능을 의미한다. 정신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무구한 역사를 담아 내려온다. 선조들이 가졌던 정신체험, 인간 본연의 태고의 체험이 출생 때부터 전수되어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얼마나 깨닫는지 등은 별개의 문제인데, 이는 한꺼번에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1) 회상을 통한 원시성을 전달하는 꿈

꿈은 원시성을 전달할 수 있다. 이 원시성을 전달하는 교량역할에 대해서 꿈은 회상을 통하여 수행한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이 유아기와 함께 유사이전의 '회상'을 되살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정신의 치유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유아기의 기억의 결손, 건망증은 커다란 손실이고, 그 회복은 생명과 행복을 증진할 수 있다는데 근거한다. 꿈에서 근원적인 정신이 어린이에게 이어져 내려와 여러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한 어린이가 꿈을 꾼 것을 아버지에게 선물한 것을 예로 든다. 대단히 운형과 관련된 그 꿈은 어린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상징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아버지조차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융을 찾아왔던 꿈이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기억상실에서나 후기의 정신병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이상한 신화적인 조각들이다. 이런 회상들은 고도의 신성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에 어른의 생활에 나타난다면, 심각한 심리적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기적적인 치유나 종교적인 귀의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것은 유아기 기억의 회상과 정신행동의 원형적 방법의 재현을 통하여 보다 넓은 시야와 의식의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미 오랫동안 상실하였던 생의 일부를 되살려서 인생에 목적을 주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의식의 동화를 통하여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동화가 없는 한 인격은 변화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상징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기초가 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2) 신화와 같은 원시성의 꿈

원시성을 드러내는 꿈이란 대개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석자는 그것이 환자에게서 작용을 일으키는 것, 즉 실재적인 것이라는 모험을 해야 한다. 이런 분석자에게 원시인의 심리학, 신화, 고고학, 그리고 비교종교사에 관하여 가급적이면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 분야들은 환자의 연상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값진 자료들을 분석자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분석자와 환자는 겉보기에는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가 풍부한 것으로 옮길 수 있기에 꿈-해석의 효력을 높일 수 있다.

비록 그것은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거기에서 의미와 만족을 찾지 못하는 보통 사람에게는, 비합리적인 경험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에서다. 그것을 통해서 환자의 일상적인 측면이 변화되고, 이런 변화는 그런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측면에 하나의 새로운 빛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지, 사물 그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삶에서는 때로 의미를 갖고 있는 가장 작은 것이 의미가 없는 가장 큰 것보다도 항상 더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3) 환상이 가미된 원시성의 꿈

원시성은 때로 해석이 작업이 어렵다는 점에서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은 마치 허공중에 하나의 다리를 놓기 시작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분석자가 환자와 더불어 환상을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환상은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가치가 적은 것이라고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환상을 가치가 적은 시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환상은 결국 남성적인 정신 속에 있는 모성적 창조성이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환상의 영역을 결코 벗어나 있지 않다."

물론 우리에게는 무가치하고 하찮고 병적이며 만족스럽지 못한 환상들이 있고, 그 환상의 비생산성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곧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런 잘못된 활동이 정상적인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융의 생각이다. 인간의 모든 업적은 창조적인 환상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우리는 상상력을 과소평가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환상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불시에 적절히 나타나지만, 상상력의 착오적인 활동은 인간을 무엇에 '불과'하다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여 놀이의 주재자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놀이의 주재자라는 시각에서 독일의 문호 쉴러(Friedrich Schiller)는 "인간은 오직 자신이 직접 놀이를 할 때 온전한 인간이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융은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작용(Wirkung)이란 환자가 그의 본질을 실험하기 시작하여 더 이상 고착되거나 절망적으로 굳어지지 않고 정신적 에너지가 흘러 움직이고, 자신이 변하고 미래의 무엇이 되는 정신적인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2. 반응하는 기능으로서 꿈

꿈을 해석하는 분석자의 태도는 오로지 하나의 틀에 맞추어서만 꿈을 해석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처음부터 다른 입장을 무시하고 하나의 입장에서만 그것을 파악하려 드는 어떠한 방법에도 정확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것은 꿈이 의식과의 보상적인 관계에 있기에 상대적인 성질이기에 꿈을 이해하려면 분석자가 환자의 의식 상황에 관한 지식이 필수적인 이유이다.

1) 현실적 반응으로서 꿈

반응하는 꿈(Reaktionstraum)이란 무의식이란 현실에 대하여 반응하는 성격이다. 이것은 꿈꾸는 자의 의식과 관련되는 것이다. 의식의 현실적인 삶에서 무의식에 대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반응적인 꿈이란 단순히 재생적인 꿈과는 대립된다고 볼 수 있다. 재생적인 꿈이란 대개 개인이 잃어버린 상징적인 측면을 다루고 있으며, 오직 이 측면만을 위해서 체험이 꿈속에서 재생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다.

현실적 체험이 꿈에서 재생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쉽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마도 현실적인 미진한 것이나 미련이 많이 남는 것이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반응적인 꿈이란 어떤 객관적인 사건들이 정신적인 상처를 만들었고, 그것이 정신적 상처가 될 뿐만 아니라 신경체계의 신체적인 외상을 의미하는 꿈만이 여기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전쟁은 이러한 심한 충격의 사례를 풍부하게 만들어냈고, 그런 경우에 특히 많은 순수한 반응하는 꿈을 기대해도 좋은데, 이때에 반응-꿈의 결정적인 인자를 나타내는 것은 그러한 충격적인 상처라는 것이 융의 생각이다.

2) 상처의 재생일 수 있는 꿈

반응적인 꿈은 보상적인 꿈과는 다르다. 반응-꿈은 대개 상처의 재생일 뿐이므로 보상적인 꿈이라고는 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상처 입은 내용이 자주 체험됨으로써 서서히 그 자율성을 상실하여 다시금 정신의 어떤 위치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정신의 전체적인 기능에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반응-꿈은 정신의 분열된, 자율적인 부분을 되돌려주는 듯 보이지만, 꿈속에서 재생된 부분을 의식적으로 동화해도 상처를 결정하는 충격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 편이다.

물론 꿈은 계속 재생되기에 자율화된 상처의 내용은 스스로 작동하여 상처를 주는 자극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실제로 꿈이 본질적으로 반응성인지 또는 다만 상징적으로 외상적인 상황을 재생하는지를 결정하기란 쉽지 않지만, 분석의 경험은 이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심각한 상처를 입었을 때 개인을 그것을 쉽게 지우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외상적인 상황을 재생하는 경우에는 바른 해석을 통해서 외상적인 상황의 재생을 즉시 정지시킬 수 있는데 비해, 반응성 재생은 꿈의 분석으로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점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병적인 신체의 상태와 관련되는 꿈

반응-꿈은 자신의 신체의 상태와 관련되는 측면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신체가 정상적이지 않은 경우에는 생활에서 불편을 경험하는 것의 원인이 되므로 생각에서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상태와 관련하여 융은 병적인 신체의 상태를 들고 있다. 신한 동통(疼痛)이 꿈의 경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는 신체적인 자극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신체질환과 정신적인 문제 사이의 특이한 내적, 상징적인 결합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이 경우에 신체장애는 바로 정신 상황의 모방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장애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 데도,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여 간과하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크리스천 사이언스처럼 신체장애를 단지 정신 장해의 표현으로만 이해하려는 것도 문제이다. 그것은 꿈이 신체와 정신 사이의 합동적인 활동에 대해서 꿈은 고도로 흥미 있는 조명을 던진다는 점에서다.

3. 계시적인 기능으로서 꿈

꿈은 계시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꿈의 계시적인 역할은 대단히 특수한 기능에 속하며, 특수한 만큼 매우 희귀한 경우에 속한다. 계시적인 기능이란 대개 종교에서 인정하거나 통용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류적인 꿈이나 세계와 관련된 꿈들은 미래예시적이며 계시적인 성격이 있다. 주로 원형론과 관계된 이런 꿈은 강한 특성이 있다. 이는 원형과 관련된 것이며 나의 내부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온 '신의 음성'과도 같다. 꿈의 계시적인 시각과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 할 수 있다.

1) 신의 영향으로서 꿈

신의 영향에서 신의 음성은 어떤 형태로 인식이 되든 간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의 음성'과 관련하여 우리는 종교, 특히 기독교의 역사에서 그 사례를 찾아야 한다. 꿈이 한편으로는 신의 목소리이며 신의 알림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결코 마르지 않는 고난의 샘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것은 원시인의 마음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원시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우리는 유대예언자들의 심리학에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들도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주저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는 구약성경의 호세아(Hosea) 같은 신앙심 깊은 남자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창녀와 결혼하는 것이 견디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계시적인 꿈을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할 수 있다.

신의 영향으로서 꿈은 일종의 신의 목소리라는 데서 이해된다. 과거 2000년 동안 기독교의 교회제도는 이런 초자연적인 영향들에 대해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중세 교회 문서에는 신앙의 영향이 경우에 따라 꿈속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교회는 그것이 참다운 계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유보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한다.

꿈의 계시와 관련하여 융은 꿈과 기능에 대하여 다룬 베네딕투스 페레리우스(S. J. Benedictus Pererius)의 논문을 예로 든다. 페레리우스는 그의 논문에서 "하느님은 그런 시간 법칙들에 매이지도 않고 자기의 꿈을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가 원하는 대로 불어넣기 위해 적절한 순간들을 놓치는 일이 없다."

나아가 페레리우스는 "우리는 또한 카시아누스의 교합 제22에서 저 장로들과 영적 지도자들이 어떤 종류의 꿈의 원인을 매우 면밀하게 탐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언급한다. 이런 언급은 모두 신이 필요한 경우에는 꿈을 통하여 계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기독교인은 이런 계시적인 꿈을 꾸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의 꿈을 우리는 영적인 꿈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대개 이런 영적인 꿈이면서 계시적인 꿈은 꿈을 깨고 난 후에도 매우 인상적인 것이고, 그 해석에 대해서도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 없이 자신이 스스로 알게 된다는 점이다.

2) 신의 알림으로서 꿈

신의 알림으로서 꿈은 신으로부터 보내온 꿈, 즉 꿈의 신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이런 신적인 알림이나 신적인 성질로서 꿈에 대하여 페레리우스는 다음과 같은 것들과 관련하여 입증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 오직 신의 인정과 선물을 통해서라야만 입수할 수 있는 것들에 관한 보다 확실한 지식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때, 즉 정통신학(Schultheologie)에서 미래에 관해 말하는 사실들이다.

나아가 신적인 알림이나 신적인 성질로서 꿈은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모두 마음의 비밀들로서 아득히 먼, 가장 깊은 영혼의 내면에서 숨어 있어 인간의 지식에서는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비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신앙의 가장 주된 신비들, 즉 신의 가르침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신비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로 신적이라고 볼 수 있는 그것, 즉 신이 인간적인 정신을 계발하는 내적인 깨달음과 충격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에 영향을 주고, 인간으로 하여금 꿈의 권위와 신뢰성을 확신하게 함으로써 그 꿈이 분명 신이 만든 것임을 인식하게 되며, 그것이 너무나도 분명하여 그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자 하고 또한 믿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등이다.

아울러 페레리우스는 부가적으로 그레고리우스 성인의 말을 인용하면서 신적인 꿈의 확실성을 입증하고 있다. "성인들은 착각과 계시 사이를 구별한다. 그리고 목소리와 상(像)들 가운데서 가장 내적인 가치감정을 가진 환상들을 구변한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 좋은 영(靈)으로부터 받은 꿈이고, 무엇이 속임수의 영에 의한 괴로움을 견디어야 하는 꿈인지를 안다." 이렇게 그가 성인의 말을 인용하는 것은 영적인 꿈, 계시에 대한 꿈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우리의 오성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빛이 첫 번째 원리의 진실을 분명히 식별하게 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그 원리를 더 이상의 해명 없이 즉시 동의하며 수용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이 보낸 여러 꿈속에서 신적인 빛이 우리의 정신을 깨우쳐 주고 이 꿈들이 진실이며 신적인 근원에서 나온 것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또한 이를 확실히 믿도록 하는 것이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3) 마귀와 관련된 꿈

마귀와 관련된 꿈, 즉 마귀가 주는 꿈에서 대해서는 앞의 신의 꿈과 대립되는 성격의 꿈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꿈이 아닌 반대적인 꿈이 바로 마귀와 관련된 꿈이라는 점에서다. 실제로 기독교인들은 마귀와 관련된 꿈을 자주 꾸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우는 임상의 경험에 의하면 대개 신앙이 향상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런 편이다. 물론 꿈에서의 마귀는 일정한 형체를 작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먹구름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마귀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어떤 경우에는 그 꿈이 심한 경우에는 소리를 지르면서 깨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점에서 페레리우스는 중요한 꿈에 대해서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컨대 느닷없이 찾아와 나쁜 일을 하도록 자극하는 꿈은 마귀가 슬쩍 밀어 넣은 꿈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는 꿈, 예를 들면 독신생활, 자선을 베풀거나, 영적 생활에 입문하도록 격려하는 꿈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지를 깊이 고려하는 것은 미신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의 징후가 아니고, 신앙적이며 영리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염려하는 사려 깊은 정신을 가진 사람의 징후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역시 그가 쓴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에서 마귀가 얼마나 교묘하게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언하는지, 이에 관한 생각을 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마귀들은 심지어 수도승의 모습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큰 소리로 성격을 읽으며, 수도사들의 도덕적인 행실들에 대해서 당황스러운 논평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히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인본주의자인 카르파 포이케르(Caspar Peucer)는 마귀적인 꿈에 대해서 훨씬 더 확신에 차 있고 단정적이다. 그는 "신이 보낸 꿈이란 성서가 신이 보낸 것이라고 제시하는 꿈이다. 그것은 우연히 누군가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개인적인 계시를 얻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의견에 따라 계시를 기대하는 그런 사람에게 제시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신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성부(聖父)들과 예언자들에게 제시되는 것이며, 그런 꿈이 보여주는 것은 또한 하찮거나 표면적이며 시대적으로 제약된 사건이 아니고 그리스도에 관한 일, 교회의 인도에 관한 일, 국가 통치상의 일들이고, 그 밖의 그런 큰 질서를 지움에 결부된 경이로운 사건들"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 융은 가톨릭 동시대인의 자연신학과 비교하면, 잠재적인 칼빈주의가 명료하게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런 점에서 융은 꿈에서 이런 계시적인 차원을 인정한다. 그러기에 신화나 신의 이미지를 중요시한다. 물론 이는 고태적인 특성과 관련되어 논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 가능성을 말하는 여지를 여기에서 찾는다. 신의 이미지는 어떤 각도에서 보나 생명이 없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어느 신학자가 에스겔의 환상이나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한 것을 지적했다.

그 신학자는 에스겔이 병적으로 환상을 보고, 모세가 환각적으로 하늘의 소리를 들은 것이라 말했다. 융은 이에 너무나 합리적인 세계에 익숙해 있어서 상식이나 논리를 뛰어넘는 비합리적인 세계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지적한 것이다. 논리에만 매달려 초월적인 형상을 인정하지 않는 그 신학자의 모습에서 융은 현대인의 심각한 정신의 불균형을 입증하는 예로 사용한다. 누가 신학자이고 누가 심리학자인지를 혼동케 하는 대목이다.

4. 정리

이상에서 우리는 꿈의 다양한 기능을 다루었다. 꿈의 다양한 기능은 프로이트의 단순 기능과는 매우 비교되는 점이다. 꿈은 실로 다양하기에 그 다양성은 꿈의 해석을 곤란하게 만든다고 했다. 분석가가 되었다고 해서 모든 꿈을 아는 것은 아닌데, 이는 다만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단히 연구해 나가야 하고 경험해 나가야 하는데, 꿈을 해석하는 문제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꿈이 개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의 콤플렉스의 발현일 수도 있고, 일종의 계시일 수도 있는 등의 다양성을 갖는데 어떻게 간단히 답할 수 있겠는가?

특히 융은 꿈의 계시기능을 인정하여 종교적 역할을 수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에는 신앙적 체험을 가진 자만이 해석이 가능한 문제가 된다. 실로 폭넓은 꿈에 대한 이해는 인생의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과 경험이 요구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살려야 하는 일종의 예술인 것이다. 무의식을 이해하는 길은 그만큼 험난한 등산이자 산악여행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