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어 헬라어 사전
신약성경과 초기 교회 문헌, 그리스-로마 고전문헌 연구를 위한 최고의 연구자료로 불리는 <바우어 헬라어 사전(BAAR, 1988년 독일어 제6판)>이 10년간 번역과 2년간 편집·제작 과정을 거쳐 최근 생명의말씀사에서 최초 한글 완역본으로 출간됐다.

양장 크라운 변형판(165·234mm)으로 1,720쪽에 달하는 <바우어 헬라어 사전>은 독일 신학자 발터 바우어(Walter Bauer, 1877-1960)가 에르빈 프로이셴(Erwin Preuschen)의 <신약성경과 기타 원시 기독교 문헌의 헬라어-독일어 소사전>을 대대적으로 개정, 1928년 <신약성경과 기타 원시 기독교 문헌의 헬라어-독일어 사전>으로 출간한 데서 시작된다.

이후 여러 차례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고, 그 중 본 한글판의 원전은 1960년 바우어 소천 후 쿠르트 알란트(Kurt Aland), 바르바라 알란트(Barbara Aland), 빅토어 라이히만(Viktor Reichmann) 등이 20년 이상 전면 개정해 1988년 출간한 독일어 제6판, 일명 BAAR(Bauer-Aland-Aland-Reichmann)판을 번역한 것이다.

출간 전부터 목회자들의 관심을 모은 <바우어 헬라어 사전>은 단어의 의미만 단순하게 나열한 것이 아니라, 구문론·의미론에 따라 각 어휘의 의미를 분류하고 용례를 소개한다. 각 단어를 명확히 설명하고 미묘한 뉘앙스까지 전달하기 위해, 확장된 해설을 달아 곡해와 몰이해를 최대한 피하도록 했다.

또 신약 본문뿐 아니라 기독교 고전, 초대교회 및 교부 문헌, 외경 문헌에서의 용례를 풍성하게 밝히고, 각 단어의 하부 의미마다 적용된 성경 구절을 상세하게 제시해 빠르고 정확한 성경 독해에 적절한 도움을 준다.

이 책을 번역한 이는 1,029쪽에 달하는 <게제니우스 히브리어 아람어 사전>을 번역했던 이정의 선생이다. 이 선생은 이 책을 1995년부터 번역하기 시작해 5년만인 2000년 1차 번역을 완료했고, 2003년 심장수술을 받았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교정과 수정 작업을 계속해 2005년 마무리했다. 이 책도 생명의말씀사에서 2년간의 작업 후 2007년 출간됐다.

이 선생은 곧바로 2006년부터 <바우어 헬라어 사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2010년 암 발병으로 위 절개 수술을 받았음에도 몸을 추스른 후 2016년 5월 10년만에 번역을 완료했다.

이 선생은 1940년 부산 출생으로 올해 한국 나이로 79세의 '노장'이다. 1964년 광부로 독일에 파견돼 1970년까지 근무했고, 보훔 광산대학교와 베를린 공과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독일 루어 광산협회 산하 광산에서 이사까지 역임했다.

1993년 퇴임과 동시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자 보훔 루어 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으나, 고전어를 연구하면서 한국의 젊은 신학도들을 위한 원어 사전 번역이 시급함을 절감하고 9년간 관련 과목들을 공부하며 번역을 준비했다.

이정의 선생은 '역자의 말' 첫 마디부터 "이 책의 번역을 마칠 수 있도록 시간과 건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린다"고 했다. 다음은 독일에 체류중인 이 선생과 이메일로 진행된 인터뷰 내용.

바우어 헬라어 사전
-이번 헬라어 사전을 10년간 번역하셨는데,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온 작업이 완성될 때는 각각 나름대로 마음 속에 특별한 회포와 만족감을 갖게 됩니다. 저라고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먼저 부족한 제게 이 일을 할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끝낼 수 있었다는 것에 기쁨과 자랑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젊은 신학도들을 위한 원어사전 번역이 왜 시급하다고 느끼셨는지요.

"이러한 생각은 우연이었습니다. 독일 광산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독일 연금법에 의해 1993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53세로 퇴직할 수 있었습니다. 퇴직하자마자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제 여식이 그때 신학을 하는 것을 보고 저도 신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딸과 같은 신학과에 입학하여 제 딸의 후배가 되었습니다.

독일 신학생은 우선 고전어, 즉 히브리어, 헬라어,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우지 않은 학생은 라틴어도 의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 무렵 독일에 유학 와서 박사학위 과정에 있던 젊은 목사님들에게서 '한국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쓸 만한 고전어 사전이 없다'는 말을 듣고,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은 이러한 일을 하라는 암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어 시험이 끝나자마자 번역을 시작한 것이 <게제니우스 히브리어 아람어 사전> 이었습니다."

-목회자들이 헬라어와 히브리어·아람어를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목회자가 꼭 헬라어 히브리어 아람어를 알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음이나 목회의 전제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된 신구약 성서는 정말 잘 번역돼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 성서말씀을 풀이하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인용한다면, 그 말씀의 의도와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어를 알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물론 2천년이 넘은 오늘에 와서 그때의 생각과 관습을 그대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말씀의 맥락에 따라 당시 상황과 생각을 재구성한 바탕에서 말씀을 풀이해 나갈 때 그 뜻을 어느 정도 원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록된 말은 생각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모르고 그 역사의 주인공에 대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회자들은 성경 말씀을 설명할 때, 적어도 그가 말하는 구절의 내용을 원어의 뜻에 가깝게 접근해 알아보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

-사전의 활용 방법이나 특징에 대해 간단히 말씀해 주신다면.

"저는 사전을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제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우리말로 옮겨서 내어놓은 것 뿐입니다. 활용 방법이나 특징은 그 사전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 사용하면서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10년간의 번역 중 가장 힘들었던 일이나,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으신지요.

"'시간을 허락해 주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칠십이 넘은 사람에게는 '오늘이 마지막 같은 느낌'이 엄습할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이 오기 전 작업을 끝내기를 바라던 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컴퓨터 문제였습니다. 옛날 대학교에서 헬라어를 배울 때, 우리 학생들은 대부분 윈도 프로그램을 사용했고, 교수님은 매킨토시 컴퓨터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 사전을 번역하기로 작정한 후, 저도 맥킨토시 컴퓨터를 구입하고 헬라어 폰트를 얻기 위해 그 헬라어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워낙 많은 학생들이 윈도 프로그램을 쓰기 때문에 자기도 할 수 없이 몇년 전에 윈도 프로그램으로 바꿨다'면서, 지금은 맥킨토시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워낙 컴퓨터에 대한 지식이 없는 제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행히 듀쎌도르프 한인교회 김재완 목사님께서 번역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모든 프로그램과 정말 마음에 드는 헬라어 폰트를 설치해 주셨습니다. 김재완 목사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 책 이전에 <게제니우스 히브리어 아람어 사전>도 번역하셨는데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모두 섭렵하신 뒤 읽는 성경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합니다.

"비록 성서에 기재된 모든 단어를 적어도 한 번은 읽었고 그 의미를 번역했다 해서, 그 언어를 통달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전은 단어마다, 심지어 사전의 줄마다 다른 뜻이 되기 때문에 문장의 맥락이 없으므로, 성경 단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읽고 썼다 해도 그 이상의 것은 바랄 수 없습니다.

다만 읽고 쓰고 번역한 덕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이 색다르지 않고 친근감이 온다고는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혹시나 하며 사전을 펼쳐보려는 마음의 태도가 훨씬 호응적이고 긍정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작업 완료 후 근황을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지에서 설교도 하시는지요.

"요즘은 참 재미있게 살고 있습니다. 게으름 피우는 재미입니다. 모든 것에서 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는 도시에는 한인교회가 없습니다."

바우어 헬라어 사전
-심장과 암 수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더불어, 지금은 건강이 어떠신지요.

"지금은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심장병이나 위암이 제가 병원에서 진찰받기 전까지는 바깥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던 병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술 후에는 움직임에 제한이 왔기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으므로, 심심풀이로 컴퓨터 앞에 앉았기 때문이지 다른 의욕이나 포기할 수 없었던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작업하는 동안 힘이 되었던 것은 제가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감사함과, 이런 작업을 하는 재미였습니다. 솔직한 이야기로 작업을 마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고, 하루 하루 할 수 있는 일을 재미나게 하는 것이 제 일과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제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파독 광부 출신이신데, 신앙을 언제 어떻게 갖게 되셨는지요. 신학을 하게 되신 계기도 궁금합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부산은 피난민들로 뒤끓었습니다. 부산 최남단 영도 태종대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피난민들이 우리 동네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사서 고사포탄 껍질로 종을 만들어 1951년 처음으로 우리 동네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동네 아이들로부터 예수쟁이라는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64년 광부로서 독일로 왔습니다. 다행히 독일 광산협회에서 장학금을 받은 덕분에,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할 수 있었고, 다시 독일 광산에서 퇴직할 때까지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퇴직 후 다시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신학을 택한 것은 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장난 삼아 덧붙인다면, 수십 년 직장생활 동안 땅속에서 땅귀신을 만났으니, 퇴직 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웃음)."

-앞으로의 계획이나 비전도 궁금합니다. 혹시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 있으신지요.

"예, 고국은 올해 가을쯤 가 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계획이나 비전은 없습니다. 그저 게으름 피우면서 하루하루 넘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전을 읽을 독자들이나 한국의 목회자, 신학자들 또는 한국 기독출판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지요.

"제가 한국에 살지 않으니, 그곳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꼭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저의 남은 소원입니다. 게제니우스의 구약성서에 대한 히브리어 아람어 사전 18판이 전 6권으로 독일어로 완성 출판되었습니다. 17판에 비해 18판은 분량뿐 아니라 사전 자체가 히브리어와 셈어의 현 학문적인 수준에 맞추어졌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히브리어와 성서적 아람어가 속한 셈어에 대한 연구와 학술은 굉장히 발전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우가릿어뿐 아니라 다양한 새로운 문헌들이 (예를 들어 사해 근처의 동굴에서 나온 문헌 등) 새로 수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아카드어, 수메르어, 헷어, 고 남아라비아어 등은 물론, 서북 셈어적 제명학의 본문도 문헌 표기에 올려졌고, 언어학적으로도 이제야 옳게 해명되었습니다. 동시에 지금까지 있던 게제니우스 사전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려 노력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이 18판은 현재로서는 구약성서에 대한 히브리어와 아람어 사전으로서는 완벽한 완성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후배들 중 어느 누가 그 방대한 작업을 할 사람과 그를 도울 수 있는 학계와 출판계가 나왔으면 합니다. 이것이 제 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