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어 이창우
▲이창우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주님께서 가신 길은 십자가로 끝난 것이 아니다. 그 후에는 승천이 있었다.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내가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요 14:2-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주님은 누구를 이끌겠다는 것인가? 그를 본받아 그의 길로 가고자 하는 자를 이끌겠다는 것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이 말씀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에 대한 주님의 약속이다. 승천 이후 주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고 사역이 끝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이끄는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에 대하여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승천에 관한 한, 사람들은 의심함으로써 거드름을 피우게 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반면, 모든 의심을 초월하여 한 가지만은 확고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 자기 자신은 결코 의심받을 수 없는 존재로 보장받을 수 있었고, 교회에서, 신학계에서 아주 확실하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큰 명성과 영광까지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는 승천에 대하여 대단한 학식과 연구 업적을 남긴 자가 아닌가?

그래서 사람들은 승천을 의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충분한 근거들을 갖고 의심을 거부하려는 자들도 있다. 사실상 그 관계는 이렇다. 무엇보다 그 들은 어떤 근거들로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려 애썼던 것이다. 혹은 기독교를 지지하기 위해 근거들을 확보하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이런 근거들은 의심을 더욱 키웠고, 의심은 더욱 강해졌다. 그러나 기독교의 입증은 "본받음(제자도)"에 있다. 그들은 이것을 제거해버렸다.  

그때, 온갖 근거들로 의심을 거부하려 했던 자들은 '근거들'의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이런 근거들 혹은 근거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미 일종의 의심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의심은 일어났고 근거들을 먹고 산다.

그들은 근거들을 더 제시하면 할수록, 그것은 의심을 더욱 키우는 일이며 의심을 강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이 의심을 죽이기 위해 의심에게 근거들을 제공하는 것은, 마치 제거하기 원하는 굶주린 괴물에게 가장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아니, 의심에 어떤 근거들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적어도 그 의도가 의심을 죽여야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대신 의심에 그 입을 닥치라고 명령하라. 그리고 같은 목적으로 침묵하라. 어떤 근거들도 제공하지 말라.

반면 그들의 삶이 '본받음'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은 승천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무엇보다 그들의 삶이 노력으로 충만해 있었고, 매일의 고난으로 너무 많은 희생을 해야 했기 때문에, 게으르게 앉아 근거들과 의심들을 다룰 수 없었고, 그런 놀이를 할 만한 시간도 없었다.

그들에게 승천은 확고했다. 그들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고 좁은 길 위에 있었기 때문에, 승천에 대해 거의 생각할 수도 없었고, 심사숙고할 수도 없었다.

이것은 마치 훌륭한 예복을 소유하고 있는 군인의 상황과 같다. 그는 그 예복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모든 생애는 매일의 전투와 위험 속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일반적인 군복을 입는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삶이 본받음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은 그들의 주님이자 주인 되신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승천하셨다는 것을 확신한다.

이런 확신에 기여한 것 역시 '본받음'이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이런 매일의 고통스러운 고난, 이런 모든 사람들의 반대, 비난과 조롱과 비웃음과 피비린내 나는 잔인함, '본받는 자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필요를 자극했다.

즉 승천이 자연법칙을 파괴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모든 인간적인 위로의 근거들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선을 행하기 때문에 고난당해야 하는 자들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 길을 가는 자들은 다른 종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들은 주님이자 주인의 승천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승천을 향해 진군한다.

그래서 승천은 언제나 인간의 필요와 함께 있다.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온다(삿 14:14)." 필요가 있는 곳에, 필요는 말하자면, 필요가 필요한 것을 생산한다.

본받는 자들은 정말이지 그들의 삶을 견딜 수 있기 위해서라도 승천이 필요했다. 따라서 승천은 확실하다. 게으르게 앉아 '행운의 날'을 즐기고 있는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사람, 그러나 결코 진리를 위해 어떤 고난도 당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실제로 어떤 필요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필요는 오히려 그가 상상하고 있는 다른 무엇이다. 혹은 그가 돈을 위해 설득당한 무엇이다.

반면 그는 자신이 호기심에서만 이 승천과 관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그는 의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필요도 없으니까. 혹은 그는 어떤 근거들을 발명한다. 혹은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세 개 정도의 근거를 건내줄 만한 친절이 있다. 그러나 저 사람의 필요는 특별히 위대한 것은 아니다!

이제 나의 독자,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승천을 의심했는가? 그렇다면, 내가 했던 대로 하라. 당신 자신에게 말하라.

"승천에 대해 의심하며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그런 의심의 본성과 근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다시 말해, 나는 본받음과 관련하여 응석받이였을 뿐이다. 나의 삶은 그 방향으로 충분히 노력하지도 못했어. 나는 너무 쉬운 삶을 살았고 진리의 증인이 되고 비진리에 대항하는 것과 관련된 위험에는 회피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하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심하면서 거드름을 피우지 말라. 내가 확신컨대, 거기에는 어떤 바탕도 없다. 그런 모든 의심은 실제로 자기 배신에 불과하다. 아니, 당신 자신과 하나님께 이것을 고백하라. 그러면 이 둘 중에 하나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본받음'의 방향으로 더욱 모험하도록 동기부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때 승천에 대한 확신은 갑자기 찾아오게 될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더욱 겸손해질 것이다. 당신은 응석받이였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때 적어도 당신은 자신을 의심하도록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겸손하게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이여, 본받음의 고난으로부터 완전히 면제된 아이처럼 나를 대하신다면, 그 정도로 은혜를 베푸실 수 있다면, 그때 나는 적어도 승천을 의심하는 거만한 아이가 되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왜냐하면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당신의 삶이 본받음의 흔적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당신은 주제넘게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삶에 대한 대답이 다음과 같을 때, 어떻게 당신은 의심하면서 나타날 수 있겠는가?

"먼저 나가서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이렇게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만이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어떤 사람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창우 목사(키에르케고어 <스스로 판단하라> 역자, <창조의 선물>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