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다음 날, 평양에서 볼일을 마친 이승훈은 정주 읍내의 용동(龍洞)에 자리잡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그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고향을 떠나 장사를 하며 평양을 비롯한 여러 타관 땅을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이태 전 큰 실패를 겪은 후에야 다시 가족을 데리고 귀향한 것이다.

고향은 포근했다. 하지만 세상의 거친 풍파는 아담한 시골 마을에도 서서히 밀려오는 낌새였다.

'인생이 공수래 공수거란 말은 맞지만 왠지 좀 허무해. 내가 죽더라도 내 자식은 핏줄을 잇겠지. 아니, 내 자식뿐만 아니라 우리 청소년들이 모두 한겨레의 뜻을 이어 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살아가겠지. 그러려면 나라의 힘이 강해져야만 해. 우리 청소년들이 바른 마음을 깨우치고 세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지녀야만 희망이 있어.'

그런 생각으로 얼마 전 집에서 가까운 황성산 기슭에다 작은 서당을 세우고 훈장을 모셔와 자식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마을 아이들도 뜻만 지녔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서당을 개방하고 학용품을 대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낀 바가 있어 얼마 전부터는 자신도 공부를 시작했다.

이승훈은 평양에서 사 온 책을 책상 위에 놓고 표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천부경(天符經)의 깊은 뜻'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아직은 자세히 읽고 싶지 않아 건성건성 보며 계속 넘겨 나갔다. 어느 순간 그의 눈길이 한 곳에 멎었다.

참된 마음은 본바탕에 따른다.
착하고 도리에 맞게 살면 하늘의 도움이 있고​
나쁘게 살면 하늘에서 죄과에 따라 재난을 내린다.​

기운은 맑고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있는데
맑은 것으로 나타내어 다스리면 오래 살고
흐리고 더러운 것이 나타나 다스리면 일찍 죽는다.

성정을 보호하여 안전하게 기르면 소중한 사람이 되고
방치하여 쓸모없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는다.​
참다운 마음과 몸으로 옳은 일을 해야 한다

그는 머리를 끄덕거리며 그 구절을 골똘히 읽었다. 부인이 찻잔을 들고 들어와 옆에 놓았지만 계속 감탄하기만 했다.

"곧 대학자님이 탄생하시겠구먼요. 조선의 갑부였던 분이 책방 서생이 되셨으니....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군요."

부인은 조용히 한 마디 던지곤 방을 나갔다.

사실 사업에 실패하기 전 이승훈의 위세는 대단했다. 비록 평민 신분이었으나 재산과 함께 신용까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양반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당시 평안감사 민영철이 양민들의 돈을 반강제로 거둬 평양에 서궁을 지으려다가 이승훈의 반대로 중지했고, 유서 깊은 연꽃 정자를 헐어 그 자리에 애첩의 집을 지으려다가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훈은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옳고 그른 일엔 대쪽 같은 성품이었다.

하지만 사업 실패 후 그의 기세는 좀 누그러졌다. 어떤 모색의 시기라고나 할까.

동서고금의 위인들의 삶을 잘 살펴보노라면, 하나의 실패가 결코 인생 전체의 실패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패란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에서 생기는 드라마인 것이다. 실패를 거울 삼아 자기 자신의 문제점을 명확히 반성하여 바른 길을 찾기만 한다면 실패란 불운이라기보다 오히려 행운이 된다.

연달아 실패의 아픔을 경험한 이승훈은 어느 날 한 친구를 찾아갔다. 그는 한숨을 쉬곤 말했다.

"여보게, 아무래도 난 이제 사업에서 손을 떼어야겠네."

"그게 뭔 소린가?"
친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고향으로 돌아가서 편히 쉬고 싶군."

"그게 진심인가? 대체 지금껏 벌여 놓은 일들은 어쩔 셈이지?"

"자네가 맡아서 정리해 주게."

그런 며칠 후 이승훈은 돌연 잠적해 버렸다.

그가 은신한 곳은 황해도 안악에 자리잡은 연등사(蓮燈寺)라는 절이었다. 떠날 때 부인에게만 살짝 귀띔해 두었기에 세상 사람들은 갑부의 행방불명에 대해 무척 궁금스러워했다. <계속>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발굴과 연구성과에 도움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