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으로 보는... 한국교회 초기 평신도들의 영성과 역동성

입력 : 2018.01.14 18:52

서상륜의 형형한 눈빛과 은색 수염

흔히 알려진 서상륜의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일까?   

한국개신교 첫 개종자 중의 한 분이요, 평생 전도인으로 산 서상륜(徐相崙, 1848.7-1926.1) 선생의 생애는 책마다 다르게 소개된 것이 많다. 바로잡아야 할 사실이 많지만, 이 글은 그를 찍은 대표적인 사진의 촬영연도를 확정하려 한다.

잘 알려진 그의 초상 사진은 언제 어디서 촬영한 것일까? 그가 무엇을 할 때 찍은 것일까? 1882년 4월에 로스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가 34세였다. 그가 조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1890년 42세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아직 젊다. 그러나 아래 사진은 50대 후반으로 보인다.

서상륜
▲서상륜.
이 사진은 Mrs. Lillias H. Underwood가 남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 사후에 쓴 그의 전기 《Underwood of Korea (1918)》54쪽에 나온다.

그 책에 나오는 사진을 보자. 언더우드는 1884년 한국에 파송될 때(25세)의 모습이다. 중간의 노춘경도 세례 받았을 때인 1886년 사진과 비교하면 후대의 사진이다.

서상륜에 대해서는 '첫 본토인 목사'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첫 본토인 조사'로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조사(助事)란 '안수받지 않은 목사'이므로, '첫 본토인 목사'라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서상륜
▲《Underwood of Korea (1918)》 54쪽의 사진.
사진을 자세히 보면 서상륜 뒤에 벽돌 건물이 있다. 장로회 교회나 기관 중에서 벽돌 건물은 언제 등장했을까?  바로 1904년 세브란스병원이 첫 건물이었다. 서상륜은 아직 완공되지 않은 세브란스병원 건물 앞에서 서양식 의자에 앉아 이 사진을 찍었다.

다음 1904년 북장로회 연례보고서 중 한국 보고서 앞에 나오는 사진에는 이때 완성된 숭실대의 한국식 본관 건물(1910년대에는 도서관으로 이용)과 함께, 서울의 세브란스병원과 직원(캡을 쓴 간호원이 이색적이다), 그리고 병원의 전도사인 서상륜의 사진이 나온다. 위의 첫 사진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에는 의자 뒤 손잡이 양쪽과 상반신이 다 보이는 사각형 사진이다.

서상륜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1904)에 나오는 사진.
따라서 잘 알려진 서상륜의 사진은 그가 54세였던 1904년, 서울 세브란스병원 건물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병원 전도사로 일하던 시절 찍은 사진이다. 첫 조사로서, 장로회 첫 벽돌 건물인 세브란스병원 건물이 거의 지어졌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사진에서 탕건 아래 부분부터 붉은 벽돌이 아닌 시멘트 형식인 것도 세브란스병원의 아래 부분과 일치한다.  

서상륜은 1890년 조사 때는 정동(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와 함께 일했고, 1897년 일부다처제 문제로 소래로 내려갔다. 다시 1898년 말 서울로 올라와 구리개 제중원에서 병원 전도인으로 사역할 때는 에비슨 의사와 함께 일하면서, 무어 목사의 곤당골교회(승동교회 전신)와 병원교회에 출석했다.

1903년 서상륜의 교회 직분은 집사였다. 세브란스병원이 남대문 밖으로 옮긴 후에도 병원 전도인 일을 계속하다, 곤당골교회와 홍문동교회가 합친 1904년 승동교회(클라크 목사 시무)에 출석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후 1906년 의병 선유사로 나가면서 병원 전도사 일은 중단한 듯하다.

이어 1907년 승동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장로로 피택되었으나, 선교사들로 구성된 정치위원회가 허락하지 않아 장로로 안수를 받지 못했다. (1887년 9월 정동(새문안)교회가 설립, 조직될 때 서상륜은 장로로 안수 받은 사실이 없다.) 1907년 9월 독노회가 구성되기 전이었다.

서상륜은 장로로 안수받지 못했고, 독노회에도 대표자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권서, 조사, 전도인, 집사 등의 다양한 직분을 맡아 초기 한국 장로교회를 위해 헌신했지만, 집안끼리 중매로 맞이한 첫 부인과 살지 않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과 함께 살았기에 처첩제를 금지한 한국 장로교회의 첫 장로나 첫 목사가 될 수 없었다.

만일 그가 장로직이나 목사직에 연연했다면 그런 명예를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직분보다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까닭에, 그는 집사요 전도인으로 머물렀다. 그래서 그가 사망하자 추도문은 그를 '선생'으로만 불렀다.

만인제사장설이 죽어버리고 '목사교'가 된 오늘 한국장로교회는 1907년 이전 목사가 없던 초기 평신도들의 영성과 역동성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에서 전도인으로, 승동교회 집사로 사역하던 서상륜의 형형한 눈빛과 은색 수염에서 우리는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도 자유인의 영혼을 잃지 않았던 선생의 내면을 느낄 수 있다.

옥성득
▲옥성득 교수.
옥성득

현재 UCLA 인문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임동순·임미자 한국기독교학 석좌교수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장신대 신대원을 거쳐 프린스턴 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역사로 학위를 받았다.

저술로는 『마포삼열 자료집』 1-4권(책임편역),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이상 새물결플러스), 『대한성서공회사』 1, 2권(1993, 1995), 『대한성서공회사 자료집』 전3권(2004, 2006, 2011), 『언더우드 자료집』 전5권(2005-2010), Sources of Korean Christianity(2004), 『한반도 대부흥』(2009),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2013),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2016), 『한국 근대 간호역사 자료집』 1, 2권(2013, 20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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