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칼럼] 성령, 복음의 유일한 통역자

입력 : 2018.01.11 19:02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복음은 오직 성령만이 설득하여 믿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대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입을 벌려 그것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한글 성경이 '전도하다(행 5:42)'라고 번역한 단어는, 사실 정확한 의미는 '선포한다(preach)', '전파한다(proclaim)'입니다. 이는 전도한다는 것은 복음을 그저 입에 올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자신을 일컬어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요 1:23)"라고 한 것도, 자신은 단지 입을 열어 복음을 말하는 스피커(speaker)에 불과하며, 자기의 외침을 효력 있게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서신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실 분이 성령임을 우리에게 확언해 줍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바울이 말씀을 성령의 검(엡 6:17, the sword of the Spirit)이라 했음은, 말씀이라는 무기를 운용하는 자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했다(고전 2:4)"는 말씀 역시, 복음 증거의 주체를 자기가 아닌 성령으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절절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당대의 대학자요 변증가였으며, '말쟁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달변가(eloquent speaker)였지만, 아덴에서의 변론(reasoning) 전도의 실패를(행 17:17, 18, 34) 경험하곤, 언변 중심의 전도방식을 버리고 성령의존적인 전도자가 됐습니다(고전 2:1-4).

이후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 복음을 가르칠 때는, 과거의 자신감 넘치는 달변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말할 때 마다 두려움과 심한 떨림이 있었으며(고전 2:3), 사람들로부터 말이 시원치 않다(고후 10:10)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경험한 후, 달변가에서 눌변가(a poor speaker)로 바뀐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그의 언어 감각이 무뎌지거나 구강 기능의 약화 때문이 아니라, 성령 의존적인 신앙이 그의 전도 태도를 변모시킨 것입니다.

복음 전도자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입니다. 복음의 출처가 사람의 마음이 아닌(고전 2:9), 하늘에서 보내진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벧전 1:12), 일반의 종교 상식이나 윤리, 법, 철학, 문학 같은 사람의 지혜로는 설득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1).

"하나님의 아들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어찌 사람의 지혜와 논리로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것을 선포할 뿐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그것을 설명하려다가는, 바울의 말대로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할 뿐입니다(고전 1:17).

이 점에서 영지주의의 영향 아래 있던 헬라 철학이, 신인식(knowledge of God)에 이르는 데는, 인간 이성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 것은, 주지주의를 경계하는데 일조했습니다. 물론 그 무엇은 로고스(λόγος)의 왜곡인 '신적 이성(divne reason)'을 뜻했고, '철학적 명상'을 통해 획득되는데, 이 철학적 명상 역시 또 다른 차원의 이성일 뿐입니다.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의 '섬광적 지식', 퀘이커 교도들(Quakers, George Fox1624-1691)의 '내면의 빛' 같은 신비주의를 비롯해 명상, 관상 같은 종교다원주의 영성은 모두 초이성을 꿈꾼 영지주의(Gnosticism)의 사생아들입니다. 나아가 건조한 이성주의는 반드시 신비주의와 손잡게 된다는 것을 반증하며,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왜 신비주의와 결탁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합니다.

이교적 중세 철학의 정글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신비주의에로 사경(斜徑)되지 않고,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고전 1:21)", "예루살렘과 아덴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 고 외쳤던, 바울과 터툴리안(Tertullianus, 155-230)의 제자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남은 자(a remnant, 롬 11:5)'의 은총이 입혀진 결과입니다.

복음이 오직 성령의 설득에 의존된다는 것은, 성령 강림 때까지 복음을 전하러 나가지 말라(행 1:4)는 예수님의 명령에서도 확인됩니다. 성령의 증거가 결여된, 말의 지혜로만 된 복음 전도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그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먼저 성령을 수납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눅 4:18)."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제자들의 입에 방언(a tongue)이 임한 것 역시, 그들의 입에 올려진 복음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낯선 외국어(방언)이며, 오직 성령으로만 해득(解得)된다는 표징이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알고(고전 2:2),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4) 그것을 전한 것은, 복음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과 함께, 그 낯선 방언이 오직 성령에 의존돼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도자나 설교자는 자신들이 오직 복음을 말하도록 부름받은 자이며, 이 복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해득(解得)되는 외국어(방언)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하며, 동시에 자기 지혜로 말하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합니다. 물론 복음전파에 이성(理性)의 조력이 필요하냐 안하느냐는 종교개혁자들 사이에도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루터(Martin Luther)에게 이성(理性)이 복음의 조력자가 아니라 음녀로 치부될 만큼 방해물이었다면, 칼빈(John Calvin)은 이교도들의 문학, 학문까지도 복음을 전하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복음은 성령의 통역 없인 천의 한 사람, 만의 한 사람도 믿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확고불변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세상이 낯설어하는 방언, 곧 '십자가의 복음'을 말해야 하는 이유는, 십자가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롬 1:16, 고전 1:18).

택자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독생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지만, 그 사실을 듣지 못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는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지만, 듣지못하는 이를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는 이는 부를 수 없다(롬 10:13-14)"고 한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는 복음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것의 상징적인 행위가 유월절(출 12:7)과 성만찬(눅 22:19-20) 의식입니다. 유월절 이스라엘 집 문설주에 피를 뿌리고 양고기를 먹은 것이나, 신약의 성만찬 때 대속주로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죄값(죽음)으로 믿는다는 것을 예표하며, 그 믿음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저작권자 ⓒ '종교 신문 1위' 크리스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