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 이승훈
▲남강 이승훈 선생.
2018년, 김영권 작가가 남강 이승훈 선생의 삶을 토대로 쓴 소설 <꽃불 영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프롤로그-침묵 속의 말

백두산 천지연에서 솟아난 맑은 생명수는 깊은 골짝과 가파른 폭포와 계곡을 흘러내려 이윽고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큰 강줄기로 유유히 이어진다.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뿐만 아니라 차츰 서녘으로 물길을 돌려 짙푸른 대동강을 이룬 후 넘실넘실 흘러 남쪽의 한강, 금강, 낙동강, 섬진강에도 핏줄을 잇는다.

강물은 땅을 적시며 흐르고 흘러 그 주변에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의 심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옛사람들이 명산뿐만 아니라 큰 강도 신비스레 생각하고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강신제(江神祭)를 지낸 것은 강이 곧 생명의 젖줄이기 때문이었다.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노라면 사람들은 작은 욕심에서 벗어나 큰 마음을 지니게 된다. 아무런 사리사욕도 없이 수억 수천 년을 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가는 강. 누가 욕을 하고 침을 뱉어도 대꾸 없이 제 길을 간다. 그러면서도 땅을 옥토로 만들어 곡식이 자라게 하고 사람의 갈증을 가셔 주는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강물은 침묵 속에서 알려 준다. 지금 이 순간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고 꿋꿋이 견뎌내라고.... 속세에 살면서도 세속의 더러움에 물들지 말고 늘 스스로 정화하여 새 삶을 이어 가라고....

하얀 들꽃

여름도 막바지라 저녁녘엔 선선한 바람이 분다.

대동강(大同江)은 북한의 유서깊은 도시인 평양을 끼고 돌며 시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석양이 서녘 하늘가에 잔광을 뿌리다가 진홍빛 노을을 펼쳤다. 핏빛으로 타오르던 노을이 보랏빛을 거쳐 점차 스러지는 동안 강물을 지그시 바라보고 선 한 인물이 있었다.

갓을 쓰고 흰 무명 두루마기를 걸친 그 사람은 마치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강물에 비친 울긋불긋한 노을빛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두루마기 자락만 강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다. 간혹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숨소리로 인해 그가 석상이 아니라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중년 남자는 마흔 살이 될까말까 해 보였다. 골상은 좋았으나 살이 빠지고 창백하여 더 늙은 듯 느껴졌다. 코밑과 턱의 수염에 흰털이 약간 섞여 그가 한숨을 쉴 때마다 파르르 떨었다. 얼핏 보면 평범한 인상이었는데, 우수에 젖은 듯하면서도 뭔지 모를 어떤 심각한 고민에 굴복치 않으려고 애쓰며 순간순간 반짝이는 눈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아, 돈이란 무엇인가? 과연 재물이 사람 목숨보다 귀중한 것일까? 내가 바보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내가 죽으면 아무리 많은 돈도 무슨 소용이 있으리. 허허허...."

그는 마치 미친 사람이나 무대 위의 비극 배우처럼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일이 성공했다면 나는 명실공히 조선의 최고 갑부가 되었을 텐데 말이지. 아, 아쉽군. 물론 욕심이 지나치면 망신한다는 선현(先賢)들의 가르침도 있지만 좀 억울하군. 허, 요즘 밤마다 꿈은 또 왜 그리 끔찍한지...."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머리를 흔들었다. 뇌리 속의 악몽을 털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꿈은 원래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나는 것인지라 사람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수많은 소떼가 뿔을 세운 채 달려오고 있었다. 소들의 눈은 증오로 잔뜩 달아올라 벌겋게 번쩍거렸다. 그는 사력을 다해 달렸으나 발이 진득진득한 소똥에 빠져 허우적댔고, 바로 뒤에서는 날카로운 쇠뿔이 등과 머리통을 곧 찌르려 하고 있었다. 그는 무서운 나머지 차라리 죽으려고 스스로 혀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자기가 석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소떼는 갑자기 누런 털가죽을 벗어 내던지며 피가 흐르는 알몸뚱이로 씩씩대며 쫓아왔다. 그는 하느님을 부르며 절벽 밑으로 몸을 던졌다. 이젠 죽어 삼도천(三途川)을 건넌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꺼운 쇠가죽이 그의 몸을 찰싹 감쌌다. 그는 답답해서 발버둥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의 귀에 구슬픈 소울음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엔 또 이런 꿈도 꾸었다.

노름판에서 재수가 좋았는지 갑오와 장땡이 계속 나왔다. 그는 희희낙락하며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돈을 두 손으로 긁어모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엽전은 푸석푸석 부서져 먼지가 되어 버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우렁찬 쇳소리가 들리면서 엽전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엽전들은 네모난 입으로 낄낄 웃으며 사정없이 그의 몸을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숨이 찬 나머지 헐떡대며 손톱이 닳아 피가 밸 때까지 엽전더미를 파헤쳤다. 그러나 쇠로 된 엽전들은 조금 틈이 생길 때마다 즉시 허물어져 그의 숨을 막곤 했다. 엽전은 결국 그의 머리 위에 쌓여 큰 무덤을 만들었다.

대동강 푸른 물결 위에 떠가던 돛단배에서 문득 애잔한 노래 한 가락이 들려왔다. 평안도 지방의 민요인 배따라기였다.

금년 신수 불행하여 망한 배는 망했거니와
봉죽을 받은 배 떠들어옵니다

돈을 얼마나 실었나 돈을 얼마나 실었나
오만칠천 냥 여덟 갑절을 실었다누나

배 주인네 인심 좋아 비녀 가락지 다 팔아 술 받았다누나
지화자 좋다 어그야 더그야 지화자자 좋다

순풍이 분다 아하 돛 달아라
아하 어그야 듸야 어허 어허 어허야

간다 간다 아하 배 떠나간다
아하 어그야 듸야 어허 어허 어허야

달은 밝고 명랑한데 고향 생각 절로 난다
아하 어그야 듸야 어허 어허 어허야....

작가의 말

여기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나무는 입으로 떠들지 않고 온몸의 삶과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 줍니다. 아니, 보여 준다기보다 나무는 자신의 영혼과 몸 전체를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사해 던져 버리지요.

나무는 고아처럼 외로운 어린 시절과 고생스런 젊은 날을 거쳐 점차 고목이 될수록 더 기품 있고 향기로운 영혼의 얘깃소리를 인간에게 들려줍니다.

여기, 인생의 중반기부터 자기 이익을 벗어나 남을 위해 살고, 그리하여 늙어갈수록 아름다운 기품을 보여 준 인간이 있습니다.

청춘 시절에 꿈과 이상을 갖고 입으로 떠들어대는 건 쉬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나이가 들고 늙어 가면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추악해지는 경우가 많지요. 이제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요즘 정치계, 경제계, 교육계, 문화계 등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겉으로 깨끗한 척 하다가 막상 알고 보니 더러운 오물 깡통으로 변해 버려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남강 이승훈은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인생의 전반기까지는 자기 자신과 일가족의 안락을 위해 살다가, 중반기부터 푸른 산이나 나무나 강처럼 이타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타성은 한 마디로 '세계화니 뭐니 떠들어도 만일 나라가 없으면 사람은 진실하고 자유롭게 살 수가 없다'라는 뼈저린 깨달음에 의한 것이었지요.

일본 제국은 조선을 지배하면서 '조센징'을 개와 돼지보다 못한 짐승으로 취급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미국이나 일본을 모방하면서 희희덕거릴 수 있는 것도 작으나마 나라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만일 어느 때라도 미, 소, 중, 일 등 주변 강대국의 식민지가 된다면 하루 아침에 남자는 전쟁터의 총알받이가 되고 여자는 종군위안부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위에 말한 4대국은 사실상 이 세계에서 가장 민족적인 이해타산이 강한 민족일지도 모릅니다. 물 한 방울도 남을 위해 내주기를 싫어하지요.

우리나라가 홍익인간의 큰 뜻을 실현하려면 우선 치밀한 의식으로 주변 4대국과의 관계를 분석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대통령 자리나 일개 파당을 위해 대한민국이 희생되어서는 안 되잖겠어요?

우리가 옛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서 새것을 알게 됨으로써 오늘날 무엇이 필요한지 찾기 위함이죠. 자신의 재산을 몽땅 털어 오산학교를 세운 남강 선생의 교육철학은 오늘의 우리 교육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책을 읽되 암기만 해서는 안 되고, 각성을 통해 실천해야만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있습니다. 닭이 알을 깔 때에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오기 위하여 껍질 안에서 쪼는 것을 '줄'이라 하고 어미 닭이 밖에서 쪼아 깨뜨리는 것을 '탁'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행해지기 때문에 사제지간(師弟之間)의 인연이 서로 무르익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학생들이 입시 위주의 암기에 시달리다 보니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선생님을 폭행하기도 합니다. 마음 밝은 청소년들은 어려운 때일수록 더 힘을 내어 미래에는 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수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남강이란 고목의 그늘 아래에서는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민족시인 김소월을 비롯해 춘원 이광수, 씨알 함석헌 등 무수한 인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빛났습니다.

'소나기'라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이 오산학교 학생이던 소년 시절에 먼 발치에서 남강 이승훈 교장선생님을 보고는 "아, 남자란 저렇게 늙을수록 아름다운 빛을 띨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합니다. 그는 민족의 현실을 고민한 주옥같은 작품을 쓰면서, 옛 스승을 본받아 늙어갈수록 아름다운 향기를 주변의 제자들에게 풍겨 주었다고 하더군요.

김영권 남강 이승훈
▲김영권 작가(점묘화).
어두울 때 더욱 반짝이는 등불처럼,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천재들처럼, 이 책을 읽는 분들도 각박한 현실에 짓눌리지 말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 주어진 하루를 귀하게 사용하기 바랍니다.

2018년 정초
연신내에서 김영권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

*이 작품은 한국고등신학연구원(KIATS)의 새로운 자료발굴과 연구성과에 도움받았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