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정통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을 삼위일체적으로 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오소리 다리처럼 들쭉날쭉하여 균형 잡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을 외치는 건전한 신앙인들 중에도 적지 않게 발견됩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이-성자와 성령이 배제된-유대교의 일신론처럼 왜곡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성자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비인격적인 통로(through)로 간주하는, 성자 경시(輕視)도 한몫 합니다. 그리스도의 중보(mediator)직은 성경의 핵심 사상이지만, 그것이 성부와 분리된 비인격적인 통로가 될 때 성자는 삼위일체 지위를 상실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통로 개념이 극대화될 때, 그리스도의 용도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유효하며, 하나님을 만난 후에는 용도 폐기됩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첩경을 예비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 강림 후 순교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에 비견되고, 극단적인 세대주의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이단이, 안식교에서 이탈하여 '엘××선교원'을 세운, 박XX입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님께 도달하는 수단이고, 성부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물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들을 내어준 성부의 희생을 극대화하는 드라마틱한 주제일 뿐,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선 침묵으로 일관합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부의 사랑만 있을 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를 향해 했던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이라는 절절한 고백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부가 분리될 수 없는 일체 임을 부정한 데서 나온 결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mediator)가 분명하지만(딤전 2:5), 중보 대상인 하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일체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인 동시에 중보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지위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제물인 동시에 그 제물을 갖고 하나님 앞에 나타나는 대제사장으로(히 9:24), 기도의 중보자인 동시에 기도 응답자로(요 14:13), 제물의 요구자인 동시에 제물의 제공자로(창 22:13-14) 나타났습니다.

왜곡된 중보자 개념은, 근본 삼위일체의 부정에서 온 것이지만,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 의 통념을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께 무차별 적용시킨 원인도 있습니다.

예컨대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는 거리차가 있고, 각각에 도달하는 데도 시간차가 있다는 통념이, 중보자(mediator) 그리스도와 궁극(finality)인 성부는 거리가 있고, 둘을 조우하는 데는 시간차가 있다는 추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하나님은 일체이시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둘 사이에는 거리가 없으며, 둘의 조우(遭遇)에도 시간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조우할 때 이미 하나님을 조우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와 '궁극'인 성부의 관계를, '통로(through)'와 '목적지(the end)'라는 통념에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한편 그리스도를 통로로만 보는 그리스도 경시적(輕視的) 입장과는 상반되게, 그리스도를 왜곡되게 중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소위 '구속사적 성경해석' 혹은 '구속사 신앙'을 부르짖는 이들에게서 종종 발견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되면 뭐든 정통 신앙인인양 간주되며, 그들의 말, 설교, 어법은 온통 예수로 덧칠되고, 반면 성부와 성령은 홀대를 받습니다. 성경 해석 원리 역시 "오직 예수(마 17:8)"이며, 모든 성경을 이 원리에 맞추어 풀려다보니, 억지스러운 풍유적 해석들이 난무해집니다.

여기서 진일보한 극단의 '오직 예수주의(pure Jesuism)'가 있습니다. 이는 '오직 예수'가 이데올로기처럼 경화된 것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드러내지 않지만 이면에서는 그런 낌새가 물씬 풍깁니다. 이는 '오직 예수(Jesus only)'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삼위일체 무용론까지 들먹이는 그들의 태도에서 확인됩니다. 삼위일체 개념이 '오직 예수'의 초점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들은 앞서 언급한, 유대교의 일신론적인 '하나님 중심'과 유사합니다.

또 한 부류의 왜곡된 예수 강조자들이 있는데, 곧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이 강조하는 예수는 삶의 모범자로서의 인간 예수이며, 그의 이타적이고 모범적인 삶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살아있는 예수에게만 관심이 집중되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에게는 흥미를 못느낍니다.

설사 그것에 관심을 나타내는 경우에도, 그것이 입혀주는 구속의 은혜 때문이 아니라,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정치적인 것이든 종교적인 것이든지를 불문하고-그의 이타적인 행위 자체를 칭송하고 본받기 위해섭니다.

그러나 예수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삶의 활동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고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한 마디로 죽기 위함이었습니다(마 20:28). 곧 자기 육체에 우리 죄를 담당시켜 죽으므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섭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성경이 그의 죽으심에 모든 초점을 맞추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어떤 유력한 성경연구 단체가 쓴 "아직도 그리스도의 대속에만 매달립니까?"라는 글을 대하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2천년 전 과거사일 뿐, 현대인들에게 흥미 없는 주제라는 것과, 더불어 오늘 교회 강단의 메시지가 어떨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게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예수의 하나님 됨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예수가 하나님인 것보다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이질감 없이 그를 모범자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동시에 하나님이심을 말하며(요 20:28, 요일 5:20), 그의 점 없고 흠 없는 피 만이 우리 죄를 속량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벧전1:18-19).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셔야 하는 이유는, 그를 대신하여 오시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 성령은 2위 그리스도의 바톤을 이어받아 오시기에, 삼위 성령이 오시려면 2위 그리스도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야 합니다.

단지 인간 예수의 죽음으로는 성령을 오시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이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위에 오시고, 그의 죽으심을 근거로 역사하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 시대에 송아지의 피가 뿌려진 속죄소 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출 25:22), 제물 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한 것은(레 9:24, 왕상 18:38),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은 언제나 함께한다는 것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간과된 채, 성령만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과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이 펼치는 성령 운동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그들의 하나님 조우 방법도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가 아닌, 소위 침묵, 관상, 센터링 기도, 참회 같은 다양한 '영성적 기술들(Spiritual arts)'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지 않는 성령추구는 이방 종교들의 접신 추구와 다를 바 없으며, 그렇게 하여 만난 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영입니다.

루터가 "십자가가 없는 곳에 임하는 영은 악령"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 원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은 무슨 특정한 훈련이나 영적 기술을 통해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이는 그분의 약속입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그리스도의 대속 외는 구원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죄 값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성찬식 때 떡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죄값으로 받아들인다는 신앙고백적 행위이며, 그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이 받아들여지는 곳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