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50장 마나-인격의 해석기법(1)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타인보다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여 발휘하고자 하고, 또 그런 능력의 존재임을 보이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마나-인격의 개입을 수용하게 되는 편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한에서 언제나 마나-인격이 개입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마나-인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안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이는 분석에서 마나-인격을 해석하여 치료해 나가는 과정이 가장 어려운 이유이다.

1. 마나-인격에 대한 이해

인간은 강한 존재이면서도 매우 약한 존재이다. 강할 때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약할 때는 작은 짐승만도 못하게 나약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삶을 살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운명적인 삶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간이 나약해질 때 가장 의지하고 싶고, 기대고 싶고, 그리고 희망하는 존재가 바로 대단히 강하고 위대하고 힘이 센 초개인적인 힘의 존재를 기대하게 된다. 이런 위대한 존재를 분석심리학에서는 '마나-인격'이라고 부른다.

1) 마나-인격으로서 영웅원형

마나(Mana)는 폴리네시아와 멜라네시아 종교에서 초자연적인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마나-인격(Mana-Personality)이 어떤 마술적인 혹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마나-인격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나 신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사람은 이런 힘을 가짐으로써 한 개인은 샤먼과 같은 존재가 되거나 한 집단의 지도자, 왕, 나아가서는 신적인 인간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나-인격은 영웅의 특성은 전형적인 마나-인격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마나-인격'의 면모는 반드시 고매한 인격적 특성만이 아니라, 동물이나 야수 심지어는 악마적인 면모까지 가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마나-인격이란 초(超)개인적인 특징을 갖기 때문에 집단무의식의 원형상의 특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원형상에서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마나-인격이 바로 영웅원형이다. 영웅원형은 대개 영웅신화에서 그려진다. 영웅신화는 '영웅'이 궁극적으로 '영웅'의 과제를 수행하여 신이 되거나 자신이 통치할 영토를 획득한 왕으로 추대된다. 흔히 영웅신화에서 영웅은 남성적 인물상으로 그려진다. '영웅'이 아들이나 남성인 것은 전체 정신 영역에서 의식성을 가진 정신 영역의 상대적인 위치나 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영웅이 남성적 인물상으로 그려지는 데는 때로 모성적 측면이 부가적으로 기술되기도 한다.

어떤 여성이 남성을 영웅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했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신화 속 모성상도 실재의 어머니가 아니라 영웅을 탄생시킨 근원적 정신의 측면을 의인화하여 모성상으로 나타내는 것에 불과하다.

영웅신화에서는 의식성을 획득한 정신 혹은 자아의 자기 정립과 성숙의 과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더 높은 차원의 원형도 가능한데, 그것은 괴물에서 구해낸 여인이 아니마(anima)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주제를 다룬 신화는 여기에서 다룬 영웅신화의 다음 단계의 신화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모성상을 퇴치하고 등장하게 될 여성상과의 결혼이라는 주제가 중심이 된다.

이것을 분석심리학에서는 대극의 합일이나 천상의 결혼이라는 연금술적 주제로서 다루고 있다. 이 또한 근친상간적인 주제만큼이나 모든 종교가 다루고 있는 고도의 정신적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잘 분화하여 발전한 의식적 정신이 집단무의식과의 재통합이라는 과제로 주어진다.
   
2) 마나-인격으로서 아니마

마나-인격과 관련하여 우리는 대자대비(大慈大悲)-대모(大母)를 생각하게 된다. 의식이라는 주체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려면 마나-인격을 가진 대자(大者) 또는 대모(大母), 더 나아가서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 신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인격에서 아니마의 분화와 관련되고 있고, 아니마가 잘 분화되지 못하면 다양한 측면에서 인격에 문제를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다. 이런 점에서 아니마의 극복은 자율적 콤플렉스와 그 변형으로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관계기능으로 제시된 것이다.

집단성과 집단무의식을 가진 그 모든 착종(錯綜)에서 나온 자아의 해결은 이러한 목표도달로 가능하다. 아니마는 이 과정으로 자율적 콤플렉스라는 악마적인 힘을 상실하게 된다. 아니마는 쇠약해진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사로잡음을 실행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아니마는 더 이상 미지의 보호라는 보호녀가 아니며, 더 이상 메신저, 즉 반신과 반마인 그랄의 악마적 메신저가 아니며, 더 이상 '여주인-심혼'이 아니라 우리가 원시인과 대화할 수 있는 직관적 본성의 심리기능이다. 이는 정령과 대화하기 위해서 숲으로 갔다거나 "뱀이 나에게 말한다." 또는 신화적인 언어에서 표현된 "작은 손가락이 그것을 나에게 말했다."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라이더 해가르드(Ri- der Haggard)의 '순종해야만 하는 그녀'(She-who-must-be-obeyed)의 표식이라는 인격의 마술력을 상기하는 것이다. '그녀'(She)는 마나-인격(Ma- na-Persoenlichkeit), 즉 불가사의한 인식과 힘으로 무장된 완전히 심령적, 마술적 특성의 존재(마나)이다. 물론 이 모든 속성은 무의식적 자기인식의 순수한 투사에 기인하고 있다.

그 무의식적 자기인식이란 덜 시적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 것으로 전해진다. "나는 나의 의식적 의지에는 교묘한 방법으로 회피할 수 있는 정신적 요인이 내 안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정신요인은 내 머리에 탁월한 생각으로 자리할 수 있으며, 나에게 바라지 않으며 환영하지 않을 기분과 정서를 유발시킬 수 있고,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유발시킬 수 있고, 타인과의 나의 관계를 잘못된 방법으로 방해할 수 있다.

분석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무력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을 좋아한 나머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융은 여기에서 시인은 이것을 때로 예술적 기질이라 부르고, 시인이 아닌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드러나는 것을 기대한다.

3) 마나-인격의 상실로서 아니마의 상실

마나-인격의 획득이나 소유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 반면에 우리는 마나(Mana)를 상실한 경우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지금 '아니마'의 요인이 자기의 마나를 상실하고 있다면, 그것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분명히 아니마를 숙달하여 마나를 획득한 사람은 마나-인물을 죽이는 사람이 그녀의 마나에 한 몸이 되고 있다는 원시적 관념에 동의한다. 그러면 아니마와 대결해 온 사람이 누가 있는가? 분석자는 분명히 이를 알고 있고, 또한 그러기에 마나를 수용하면서 의식적으로 마나-인격이 되어간다.

마나-인격이란 융에 의하면 집단무의식의 주요표식이다. 그 집단무의식이란 영웅, 지휘자, 마술사, 주술사 그리고 치료사, 인간과 정령의 주인, 신의 친구들 등의 형태 속에 있는 능력자의 유명한 원형이다. 이는 어두운 배후에서 떠오르는 의식 인격으로부터 소유를 이해하는 남성의 집단적인 모습이다. 이 심혼의 위험은 미묘한 성격이며, 이 위험은 의식의 팽창을 통하여 아니마와의 대결로 획득한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그러기에 아니마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사실은 개인의 인격성장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것이 무의식의 위계질서에서는 아니마가 단순히 최하위의 단계이며 여러 가능한 모습 중의 하나이고, 그리고 그 극복은 아니마에 마나를 수용하는 또 다른 집단적 모습을 취한 것이다.

이는 실제적으로 분석자가 그것을 간단한 방법으로 부르고자 하는 것처럼 마나, 즉 아니마의 자율적 가치를 그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마술사(Zauber)의 모습이다. 이제 이런 모습에 동의하는 한에서 분석자 자신은 아니마의 마나를 소유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니마의 문제는 마나의 소유라는 상황에서 차질 없이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2. 존재의 변형과 마나-인격

존재의 변형은 인간이 가장 바라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변형은 신적인 능력, 즉 마나의 힘이 개입되어야 하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힘의 개입이 때로 인격의 문제를 유발하는 것이 된다는 점에서 마나-인격에 따른 주의력이 요구된다.

1) 모성적 팽창의 위험성

마술사의 모습은 여성에게는 대단히 위험한 등가물(quivalent)이다. 그 등가물은 모성적으로 탁월한 모습, 대모(大母),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그 대자대비의 여신이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항상 최상의 것을 원했고, 언제나 타인을 사랑해 왔으며 한 번도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등가물은 마치 궁극적 진리를 전달하는 자와 같은 위대한 사랑의 발견이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랑이 가치 있게 되지 않는 것처럼 위대한 진리도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둘은 비로소 상호대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예사롭지 않은 오해가 있게 되는데, 이는 의심할 것도 없이 자기팽창(Inflation)의 문제이다. 자아는 그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자아는 마나를 어떻게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는가? 만약 그것이 참으로 아니마를 극복한 자아였다고 한다면 마나 역시 자아에 속해 있으며, 그 결과는 의미 있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나는 다른 것에 대하여 작용하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은 틀림없이 자아와 아니마의 관계에서는 근본적인 시금석일지도 모른다! 자아는 그렇게 의미 있게 된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다른 무의식적 모습에 떨어진 원형과의 혼합이 되었기 때문에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자아는 아니마도 전혀 극복하지 못했고 그에 따라 마나도 획득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단순히 더 큰 힘의 동일한 성(性)의 모습이 부친형상(Vaterimago)과 일치하는, 심지어는 더 큰 힘을 소유하는 새로운 혼합이 나타난 것이다.

"모든 생물과 연합하는 폭거로부터 자기 극복을 하는 사람은 예외적인 자유가 없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모든 폭력을 능가한 초인, 즉 반신(半神), 아마도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 모든 두려운 모순성속에 있는 강압적 친숙성은 바로 이러한 심리적 동기에서 유래된 것임을 의미한다.

반면 애석하게도 자아는 자기인식의 기능을 소유할 때만, 후퇴가 가능하고, 모든 힘과 의미의 환상이 가장 신속하게 와해될 수 있다. 이는 실로 자아의 제한된 특성이자 어떤 기만의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가 아니마를 극복하지 못했기에 아니마의 마나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즉 의식은 무의식에 관한 주인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니마는 자기의 주인적인  월권으로 자아에게 무의식과 대결이 가능할 정도로 손상을 입힌 것이다.

그러나 이 대결은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승리가 아니라 두 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재건이었다. 그러므로 자아는 아니마의 승리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마술사는 자아의 소유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자아의 초(超)개념이며, 자아의 모든 초개념은 무의식 개념에 의해 다음과 같이 따라 나온다. "변형된 형태 속에서 나는 폭력에 관하여 분노한다."

그러기에 만약 자아가 어떤 승리에 대한 자기의 요청이 무산되게 내버려 둔다면, 자동적으로 마술사로 인한 사로잡힘도 중단될 것이다. 그러면 마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만약 마술사까지도 더 이상 마술을 할 수 없을 때는 누가 또는 무엇이 마나가 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도 무의식도 마나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것은 자아가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결코 사로잡힘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이런 경우에는 무의식 역시 우월한 세력을 상실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우월한 세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마나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이거나, 아니면 의식적이지도 무의식적이지도 않은 어떤 것에 떨어지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다. 이런 것은 인격을 열망했던 '중점', 대극이나 대극의 통일, 또는 갈등의 결과나 에너지의 긴장이라는 '결과'사이의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것, 인격이 되어감, 가장 심원하게 개인적으로 나아가는 단계, 가장 근접한 단계 등이었다.

때문에 분석자는 이상의 전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소박한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위의 신속한 개관으로 모든 단계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무의식적인 것은 비로소 다음의 보다 더 명확한 사고의 분석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아니마 현상과 아니무스 현상은 무의식의 내용이다. 이런 현상들은 무의식 내용이 충분히 의식에 동화된 상태일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런 경우의 무의식 내용은 개인의 영역에 해당하는 일차적인 것, 아마 위에서 인용된 남성 환자가 가졌던 환상의 종류와 비슷한 것이다. 그 후에 본질적으로 집단적 상징을 포함하는 비개인적 무의식의 환상이 환자들의 환상에서 어느 정도 발전된다. 이런 환상은 대개는 단순한 방법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처럼 조야하고 무질서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환상은 일정한 목표에 대하여 수렴적이게 하는 특정한 무의식적 방향의 선을 따르고 있다.

2) 변형의 신비로서 성인식의 문제

무의식의 환상은 무질서한 상태만은 아니라고 전술했다. 특히 위의 환상에서 나중의 환상은 성인의 과정(Initionaprozessen)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장 근접한 유추는 원시인들의 성인식이다. 하나의 방법으로 조직된 모든 원시집단과 부족은 종종 특이하게 발전된 성인식을 갖고 있다.

그 성인식이란 그들의 사회 및 종교생활에서는 대단히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 그 성인식을 통하여 소년은 남성이 되고 소녀는 여성이 된다. 카비론 지역에 사는 카비론도(Kavirondo)인들은 '동물'을 가지고 할례나 절제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모욕을 준다. 이는 성인예식이란 사람이 짐승의 상태에서 인간의 상태로 동화된다는 주술적 수단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원시인의 성인식은 융에 의하면 대단한 영적 의미를 갖는 변형의 신비(Verwandlungsmysterien)다. 성인식은 때로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행위의 방법에 복종하게 되며, 동시에 원시인들에게는 부족의 신비가 분배되는 것이다. 그 부족의 신비란 한편으로는 부족의 법과 위계질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적이면서도 또 다른 신비적인 교훈이다.

성인식은 모든 문화민족에게서 유지되어 왔다. 그리스에서는 고대적이고 엘레우시적인 신비의식이 외관상으로는 7세기까지 존속되었기에 로마는 신비의 종교들로 범람했다. 융은 기독교를 이에 대한 것 중의 하나로 대비시킨다. 기독교는 오늘날의 형태에서는 옛날의 성인예식을 세례식, 입교식 그리고 성찬식에서 유지해 온 변색 및 변질된 상태라는 생각이다. 이는 물론 신앙적인 입장에서 보다는 현상학적인 것으로서 단순한 예식의 범주에서 이해된다. 그러므로 의미에서 어느 누구도 성인식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부정할 수는 없게 된다.

성인식의 상징은 무의식 내용에서 오해될 수 없는 명료성이 나타난다. 이는 실로 옛날의 미신이며 완전히 비학문적인 것이라는 것을 반박할만한 것이다. 비록 어느 누가 콜레라병의 출현에서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전염병이며 대단히 비위생적이라 해도 그것은 지적(知的)인 것이다. 그 점은 성인식의 상징이 객관적 진실성인지 아닌지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순히 그런 무의식 내용이 성인식의 실제성이라는 등가물이며 인간의 정신에 영향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성인식의 상징이 바랄만한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결코 아니다. 성인식의 상징이 이미 존재해 왔고 성인식이 작용한다는 사실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3) 존재의 변형과 관련된 꿈-해석

존재의 변형과 관련해 때로는 일련의 매우 긴 상(像, Bilder)을 자세히 제시하기는 불가능하다. 사례에 대한 충분한 제시는 필요하면서도 사례의 제시로 인한 불만은 여전할 것이다. 여기에 결과적으로 구축된 것이 목표에 들어맞는다는 식이다. 그렇다고 '목표에 들어맞는' 용어를 사용하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 용어는 주의 깊게 또한 제한성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정신병에서는 일련의 꿈이 그리고 노이로제에서는 어떤 목적도 없이 그 자체로 진행되는 일련의 공상이 고찰될 수 있다.

융이 위에서 자살공상으로 언급하였던 젊은 환자는 목적 없는 일련의 공상산출에 이르는 가장 좋은 길이다. 그 환자는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배우지 않은 경우이다. 다만 그러한 것을 통해서 목표에 대한 방향이 생겨난다. 무의식이란 한편으로는 의도적이지 않은 채 순수한 자연의 과정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 과정이 철저하게 특징화된 잠재능력의 방향을 가지고 있다.

만약 의식이 무의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그 과정의 모든 단계를 체험하며 그리고 적어도 예감적으로 이해한다고 하자. 그러면 가장 직접적인 상(像)은 그것을 통해 얻어진 더 높은 단계 위에 자리할 것이며 그리하여 목표의 방향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4) 존재의 변형을 위한 무의식과의 대결

무의식과의 대결은 일정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가장 직접적인 목표는 무의식 내용이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더 이상 간접적으로 아니마현상과 아니무스현상으로서 표현되지 않는 상태로의 도달이다. 다시 말하면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가 무의식에 대한 관계의 기능이 되는 상태이다. 무의식의 내용이 관계기능이 되지 않는 한에서 무의식은 자율적 콤플렉스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의식의 조절이 관철됨으로써 올바른 평화의 방해(Stoe- renfriede)를 취하는 장애요인이다. 이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로서 콤플렉스라는 표현도 일반적인 용어사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콤플렉스'를 갖는 사람일수록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또한 자기의 콤플렉스로 표현되는 각자의 인격의 상을 만들고자 시도할 때 신증적인 여성이 틀림없이 갖는 결과, 즉 아니마가 나타난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이 우선 개인 무의식의 내용으로서 자기의 무의식 내용을 의식화 할 때는 집단무의식의 환상으로서 자기 콤플렉스의 근원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그 방법으로 자기의 사로잡힘의 해체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니마 현상이 중단된다. 사로잡힘을 유발시킨 모든 초능력은 논리적으로 아니마와 더불어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즉 '콤플렉스가 없는' 상태, 이른바 심리학적으로는 방의 내부가 청소된 상태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자아가 체험하지 않은 것이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약 자아가 어떤 것을 원한다고 하면 그 동안에 방해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자아는 초인의 불가피성 또는 완벽한 지혜의 탁월성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위치가 보장될 것이다. 그 두 모습은 융이 한편으로는 나폴레옹(Napoleon),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Laotse)라는 이상적인 상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두 모습은 레만(F. R. Lehmann)이 그의 유명한 책에서 마나(Mana)에 대해 설명적으로 표현하였던 '특이한 영향력'이라는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기에 융은 그 인격을 간단하게 마나-인격(Mana-Persoenlichkeit)이라 부른다. 마나-인격은 집단무의식의 지배, 즉 인간 정신에서 태고이래 유사한 경험을 통하여 형성된 원형(原型, Archetypus)과 일치한다는 점에서다. 원시인은 분석을 행하지 않으며 타인이 원시인을 능가한 것인지에 관하여도 설명하지 않는다. 만약 타인이 원시인보다도 더 똑똑하고 강하다면 마나를 갖고 있다고 간주하는 것인데, 그런 사람은 마나와 동일한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다. 또한 원시인은 그 힘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수면 때에 어느 누가 그를 밟거나 그의 그림자를 밟는 것을 꺼리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마나-인격의 해석기법에 대해서 기술했다. 인간은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자신이 타인보다도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여 발휘하고자 하고, 또 그런 능력의 존재임을 보이고자 한다는 점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마나-인격의 개입을 수용하게 되기 머련인데,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한에서는 언제나 마나-인격이 개입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은 마나-인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동안에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분석에서 마나-인격을 해석하여 치료해 나가는 과정이 가장 어려운 이유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