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약할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이 역설적 진리는 특히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는 멸종하고, 맹수를 피해 굴이나 바위틈에 숨어사는 토끼 사반(잠 30:26) 같은 약한 짐승들의 번성을 통해 확인됩니다. 이는 비단 자연 생태계만의 아닌 영적 세계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40여년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 바로 그랬습니다.

자급자족이 불가능해, 일용할 식량부터 물까지 오직 하나님의 손끝만 바라보고, 자연의 앙화나 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전혀 무방비인 채 오직 하나님만 의존하고 나아갔으나, 그들은 멸절당하지도 않고-오히려 그들을 공격하던 강대국들은 소멸됐습니다-의복이 해어지지거나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신 8:4).

성경에 의하면 그들을 따르는 반석 그리스도가 그들의 공급과 보호가 되어 주신 때문입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시 62:6)."

이 역설적 진리는 성경은 물론 기독교회사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까지 변함없이 유효합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안위는 불문한 채, 어떤 호구지책이나 안전망도 없이-그야말로 세상에 내 동댕이쳐 진 것처럼(벧전 2:11, 히 11:13;38)-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을 좇았음에도, 멸절되지 않고 건재했습니다.

물론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런 천수답 같은 삶의 양식이 유별나고 광신적으로까지 비쳐질 수 있으나, 무죄했던 태초의 에덴에서는 보편적인 존재 방식이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경륜하셨고,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즐겨 공급자와 보호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만일 아담과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죄된 욕망이 빚어 낸 오늘 같은 눈부신 발전은 이루지 못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으로 만족하는 극락(joy unspeakable, 벧전 1:8)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보듯, 과학 문명의 발전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의 힘을 우상시하는 타락의 산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과학문명의 주도권이 육의 사람 가인(Cain)의 후손들에게 쥐어졌음을 명시합니다(창 4:20-24).

이 하나님 의존은 우리 앞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 생애에서 몸소 체현해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2위(位)이셨으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 절대 의존의 삶을 사셨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고(요 5:30)",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심지어 그리스도는 말 한마디, 가르침 하나까지도 자의적으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이러한 그리스도의 하나님 절대 의존 방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하나님의 2위시라는 사실을 잊게 만들 정도이며, 피조물인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가를 교훈합니다.

이런 그의 삶의 태도는 태초에 무죄했던 아담의 삶을 능히 유추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고 하신 말씀은, 사실 하나님 의존적인 그리스도의 삶을 우리에게 그대로 투영시킨 것이었습니다.

그의 기도 중심의 삶 역시, 전적인 하나님 의존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공생애 시작 즈음 드려진 40일 금식 기도(마 4:1-2), 매일 새벽과 밤 기도(막 1:35),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드린 겟세마네 기도(눅 22:44),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고자 몰려오는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홀연히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눅 5:15-16) 등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의존적이셨는지를 증명합니다.

사도 누가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쳤던,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전력투구적인 기도(눅 18:1-8)는,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 의존적인 삶의 방식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하나님 의존에 있습니다. 이는 공리주의자들(a utilitarian)의 주장처럼, 하나님 의존을 인간 잠재력의 사장(死藏) 여부와 연결지우기에 앞서, 하나님이 경륜하신 인간 정체성의 규현이라는 훨씬 중차대한 문제로 파악합니다.

누구든 진정으로 거듭나 그리스도가 내재하는 사람이라면,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갈 5:25)"을 자신의 본분과 긍지로 삼으며, 자력적인 삶을 배교적이고 부끄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 의존을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빌 3:3)."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하나님 의존은 자기 보존을 넘어, 하나님의 강함과 능력을 덧입는 원천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이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고후 12:10)고 한 것은, 그가 약하여 하나님을 전심 의뢰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삶에서 확증된 바입니다. 그가 약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나-정확하게 말하면 스스로 생명을 버린 것입니다(요 10:18)- 하나님이 그를 다시 일으키셨습니다(고후 13:4).

이러한 하나님 의존에서 오는 능력과 강함은 욕망에 매몰 된 세속적인 교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도용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의 왜곡과는 다른, 하나님 절대 의존에서 오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일찍이 바울은 이 강함의 원리를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움이 아닌 자랑으로 여겼으며, 우리를 향해서도 강해지려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약해지라고 권면했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 12:9)."

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능력과 지혜는, 세상의 어떤 능력자, 지혜자의 그것들 보다 탁월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한 사람보다, 약하여 하나님의 도움 없인 못사는 사람이 훨씬 더 강하고 지혜롭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약함이 약함이 아니고 강함이 강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약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의 안전함을 거듭 거듭 강조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 29:2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잠 30:5)",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 28:25)",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 26:4)".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