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욱 연애는 다큐다
▲ⓒ사진 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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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연락 온 친구가 특별가로 팔고 있는 수십만 원짜리 정수기 같은 제품을 하루 커피 한 잔 안 마시면 부담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친구도 도울 겸 고민 끝에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치자.

하지만 세상에 찌들어 변해버린 친구 녀석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고 마음 한구석이 영 찜찜한 것이...,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괜한 짓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사인을 하게 되고,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갖가지 일들에 직면한다.

마누라는 바가지를 긁고, 제품은 하자 투성이에, 친구는 연락도 안 되고. 설상가상으로 홈쇼핑에서는 같은 제품을 훨씬 싼 가격에 덤까지 얹어 팔고 있다. 그러다 결국 처박아둔 물건은 이사 다닐 때마다 애물단지가 되고, 눈에 띌 때마다 새삼 아내의 핀잔을 불러일으키는 골칫덩어리가 되고 만다.

이런 식으로 누구나 찜찜하면서도 하게 되는 일이 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여러 정황과 눈치 때문에 눈 딱 감고 하게 되는 일 말이다. 대학에 눈치 작전으로 원서를 넣다가 걸려든 어느 학교의 낯선 학과에, 나중에 전과를 하던 편입을 하든 일단 들어가고 보자는 마음으로 입학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늘 대가가 있다. 번복에 따른 시간과 돈의 낭비, 마음의 상처와 자책감, 주위의 비난..., 그리고 뼈저린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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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 덜 든 젊은 나이에, 결혼을 이런 찜찜함으로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나 환상적이고 완벽한 예식을 원하는데, 하물며 배우자 감에 거는 기대는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멋지고 예쁘고 완벽하고, 무엇보다 자기가 정말 사랑하는 누군가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다 그렇듯, 100퍼센트 만족한 상태에서 무언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성향이라든가, 시댁 혹은 처가 사람들의 간첩같이 낯선 언행과 사고방식, 요구 조건 등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지금 번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이렇듯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에 대해 어떤 찜찜함을 가지고 석연치 않게 결혼에 임한다. 그들의 생각은 주로 이런 것이다.

"선배 언니가 그러는데, 그러다간 시집가기 어렵댔어. 자기가 맞춰줘야지, 입맛에 딱 맞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리고 지금 와서 다 취소하면 무슨 망신이야. 남자는 거기서 거기지, 살아본 어른들도 다 그러잖아, 정 붙이고 살면 그만이라고...."

"청첩장까지 뿌린 상태에서 결혼을 번복한다는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지. 서로 좀 안 맞는 것 같아도, 여자는 초반에 확 휘어잡으면 돼. 다시 고른다고 뾰족한 수가 있겠어? 쓰레기차 피하려다 괜히 똥차 만날라...."

심지어는 요즘 이혼율도 높다니까, 정 안 되면 좀 살다 이혼이라도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서도 이런 결혼을 한 사람을 여럿 보았다. 예전에 이혼한 사람에게 남편과 시댁 이야기를 들으니, 드라마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하는 황당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도대체 그런 걸 결혼 전에는 몰랐단 말이에요?"

내 질문에 그녀가 대답했다.

"조금 알긴 했죠. 하지만 애초부터 저는 애정보다는 그 정도 조건이면 되겠다 싶었고 그런 쪽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사람들 하는 말로 정 붙이고 살면 큰 문제 있겠나..., 생각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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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 중, 결혼 6일 전 신부가 도망친 경우가 있었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거의 시댁에 얹혀살다시피 했던 여자였는데, 청첩장을 다 돌리고 주례 선생을 섭외하고 음식 예약까지 다 마친 상태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처음엔 납치된 줄 알고 경찰에 신고하는 등 전전긍긍했지만, 속옷가지와 화장품 등이 없어진 것으로 보아 작정하고 나갔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편지 한 장 남기지 않은 그녀는 나중에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사랑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이 부딪히고 서로 너무 다르다..., 다 내 탓이니 날 용서해라....

사태를 알고 난 다음은 이미 결혼식을 2-3일 앞둔 상태. 결국 주변에는 신부가 교통사고를 당해 부득이 연기됐다고 말했지만 미처 연락이 닿지 못한 지방의 친지들은 예식장에 와서 허탕을 치고 발길을 되돌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실로 망신살이 뻗친 것이다.

물론 그녀는 무책임하다. 그렇게 사라질 것이 아니라, 정확히 의사를 표시하고 혼란을 최소화했어야 한다. 부모의 이혼을 보고 자란 탓인지, 헤어짐에 대해 자기 얼굴만 가리면 다 끝이라는 생각으로 상대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집안에서 그녀에게 감사할 정도라 한다. 그때 그대로 예식을 치렀더라면 정말 안 좋은 결과를 낳을 뻔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동은 괘씸하지만, 그녀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 훌륭한 결단을 내린 것인지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의 결혼은 의외로 애정만 갖고 하게 되질 않는다. 어른들의 성화에, 나이만 먹는 것 같은 조바심에,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발판으로서의 배우자일 것 같은 생각에,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달래가며 결혼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배에 승선한다. 그 배가 암초를 만난 타이타닉이라 해도, 자기는 디카프리오처럼 죽는 쪽이 아니라 케이트처럼 살아남는 쪽일 거라고만 생각한다.

그렇다고, 결혼이 아니다 싶으면 영화 <졸업>에서처럼 더스틴 호프만 같은 숨겨둔 남자를 따라 웨딩드레스를 들쳐 안고 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무책임하고 엄청난 일을 누가 쉽게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신중하게, 또 온 마음을 다해 상대와 자신을 바라보고 후회 없는 선택을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실망할 구석이 많은 것이 결혼이기 때문이다.

예식장에서 깨달을 일은 그 전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득불 결혼 서약 전에야 그걸 깨달았다면, 주저하지 말고 도망쳐라. 그것이 결혼하려던 상대도 도와주는 것이다. 이혼보다는 서로에게 훨씬 나은 선택이 될 것이다.

김재욱 작가

사랑은 다큐다(헤르몬)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
www.woogy68.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