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누가 율법을 존중하는 자이고, 누가 율법을 멸시하는 자인가? 말마다 율법, 도덕을 앞세우며 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면 율법을 존중하는 자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입니다. 더구나 만약 그가 자신의 의로 율법을 성취하려 한다면, 이는 율법을 존중하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멸시하는 자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의로 율법을 이룰 수 있다고 낙관할 만큼, 율법의 의(義)를 하찮게 본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이들이 유대인들입니다. 율법에 집착하고, 율법을 의를 추구하는 그들의 노력이 가상해 보이고 율법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율법을 격하시키는 자들입니다. 자기 행위로 율법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자신할 만큼 율법을 평가절하시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모세와 율법을 멸시하는 자들이라 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그들은 입만 열면 모세와 율법을 칭송했지만, 사실은 율법을 존중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고 했던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므로 율법을 무시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존중했다면, 율법의 지향점이요 완성인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구원자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몽학선생으로 삼지 않고(갈 3:24) 구원의 도리로 삼을 뿐이었습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들은 율법의 지향이 믿음의 주(主), 그리스도임을 말합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바울이 ...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의 글을 가지고 예수님에 관해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였다(행 28:23)'.

따라서 믿음을 무시하는 것은 단지 믿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무시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반면 믿음을 높이는 자들은 일견 율법을 소홀히 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율법을 높이는 자들입니다. 이는 율법의 엄위함을 아는 그들이 자기의 행위로 율법이 요구하는 의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는 말씀의 의미 그대로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포함한 모든 성경 말씀을 '믿음의 말씀'으로 지칭한 것도(롬 10:8; 10:17, 딤후 4:6; 3:15), 성경 말씀이 모두 믿음을 지향하며 그것의 목적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북돋는 데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고 할 때(엡 3:2, 히 10:22), 율법주의자의 공격처럼 율법을 무너뜨리므로서가 아니라, 완성시킴으로서 임을(롬 3:31) 말하고자 합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가려면 완전한 율법의 의가 있어야 하는데, 믿음이 율법의 의를 이루어 그를 하나님께로 이끕니다. 바울 역시 '믿음(믿음의 말씀)'이 죄인을 구원한다(하나님께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8-9).'

반면 율법적 행위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것은, 율법을 파괴하면서 율법을 성취하려는 이율배반임을 지적합니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롬 10:6-7).'

누군가 자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하고 음부의 심판을 면하려는 것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끌려고 이루신 공로와 그를 음부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받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헛되게 하여 결국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차단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하나, 구원의 자비를 거절하는 불신앙에 더 큰 '죄의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믿음이 율법을 무너뜨리기보다는-불신앙이 율법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행위의 불순종이 육신의 연약성에서 나왔다면(롬 8:3, 마 26:41), 불신앙은-육신의 약함과는 상관없이-제공되는 구원의 은혜를 의도적으로 거부한데서 나왔기에 훨씬 더 악합니다. 성경이 불신앙을 '믿지 아니하는 악심(evil heart of unbelief, 히 3:12)'이라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구원의 초청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마음의 문을 염)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리고 불신앙은 구원에의 부르심에 귀를 막는 것입니다. 이 불신앙의 악함은,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귀를 막고 그를 돌로 치는 모습에서 그 절정을 봅니다.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행 7:51-58)'.

마지막으로 믿음을 강조한다 해서, 공격자들의 비난처럼 율법폐기론자(antinomianist)가 되는 것도 아님을 말하고자 합니다. 구원의 의를 이루는 데는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무용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으로 되지만, 여타의 율법의 기능은 여전히 상존합니다.

첫째, 언약 백성의 표징으로서의 십계명 율법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둘째, 악을 제어하고 선을 장려하는 율법의 제 3용도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셋째, 하나님 사랑의 강권으로 시행되는 긍훌의 법은 여전히 유효하며(약 2:12-13, 골 3:12-14), 이는 율법의 완성입니다(롬 13:10).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