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특정 예언가의 예언, 우주 폭발, 자연 재해 등을 바탕으로 내어놓는 인류 종말론들이 있습니다. 16세기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Michel de Nostredame, 1503-1566)의 종말 예언, 빅뱅 이론, 로마 클럽(The Club of Rome)의 종말론들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큰 위성이 지구에 초접근하여 곧 지구가 멸망한다는 예견을 내놓았습니다. 이 종말론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피난처도 제공해 주지 않고 오직 공포심과 절망만을 심어줍니다.

이는 이들의 종말에는 비인격성과 우연성과 차가운 인과원리만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 폭발에 의해 우연히 이뤄진 우주의 생성처럼, 우주의 종말 역시 그들에겐 우연적으로 닥칠 두려움과 혼돈의 사건일 뿐입니다.

이런 우연을 속성으로 하는 비인격적 종말론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작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소위 '인격적 종말론'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일관성과 연속성이 실려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종말을 예견하고 준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물론 종말 개념에 하나님이 담겨진다 하여 다 성경적이지는 않습니다. 표면상으로는 그런 냄새를 풍기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 종말론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신적 이성(divne reason)인 로고스(λόγος)에 의해 창조와 종말이 이루어진다는 헬라철학의 창조 개념은 신(神)을 담지하지만, 그 신(神)은 우주적 원리(universal principle)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데아(Idea, 세상은 이데아의 복사물)를 너무 완벽하게 창조하여, 하나님마저도 자기가 창조한 이데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플라톤의 창조론도 사실 세상을 신격화한 비인격적인 창조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격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작정과 목적에 의해 일관성과 연속성이 견지되고, 종말의 합목적을 위해 여러 경륜들이 유기적으로 상합(相合)합니다.

이러한 인격적 종말 개념은 우주적 종말 개념뿐 아니라 개인의 종말 개념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성경에 의하면 어떤 한 사람의 구원은, 역사성도 유기체성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돌연변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엡 1:4),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과 복음의 소명 등이 유기체적으로 어우러진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구원과 심판을 말할 때는, 이런 유기적인 모든 경륜들이 고려돼야 합니다. 이런 고려가 도외시된 채, 심판 당시 그 사람의 선악간의 행위만을 보고 구원과 정죄를 가르는 것은, 마치 병아리 감별사들이 기계적으로 암수를 감별해 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비인격적 심판 개념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구원 판단을 할 때, 그것의 원기인인 선택과 유기(롬 9:23), 다양하게 섭리된 경륜들에까지 소급합니다. 알곡과 가라지(마 13:25)의 판단 기준도 단편적인 행위보다, 보다 원천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났느냐 마귀로부터 났느냐를 비롯해 다양한 평가요소들이 동원됩니다. 구원 예정과 행위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에, 단지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도 금합니다.

창세 전 생명책에 녹명된 자는 배교에 빠지지 않고(계 13:8), 창세 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오른편의 양(羊)이 선행을 합니다(마 25:34)만, 모두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구원 예정된 자들 가운데서도 일시적인 배교자가 있을 수 있고(마 26:74), 도덕적 몰락자가 있을 수 있으며(고후 3:6), 그로 인해 구원 예정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돼야 할 사항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할 줄 모르는 도덕적 몰락자에게도 자비를 그치지 않으시고, 죽음이라는 최후의 징계를 통해 기어코 구원으로 이끄십니다(고후 3:6).

그리고 기독교의 종말이 인격적 종말인 또 하나의 이유는 종말이 무자비한 파괴와 심판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택자의 관계가 완성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관용의 엄격한 공의만을 요구받는 악인들에게는 종말이 파멸의 날이 되겠지만, 택자들에게는 신부를 취하러 오는 신랑의 귀환일이고, 어린양의 혼인날입니다(계 19:1-9).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은 택자들은, 비록 도덕적 흠결이 발견될지라도, 기왕 입은 피의 구속으로 인해 신부로 받아들여지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못 들어감의 기준은 도덕성보다, 더 근원적인 믿음과 은혜의 기름이 준비됐느냐였습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이 올 때 잠들었지만, 믿음과 은혜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혼인 예식에 들어갔습니다(마 25:5-10).

가장 준엄한 공의가 요구되는 종말 심판의 때에, 도리어 택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더 큰 자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 6:16-17)' 라는 단말마의 외침이 난무할 때, 택자들은 피난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찬 188)'라며 안도의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