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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천 초등학생 살인사건,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 어금니아빠 이영학 사건을 비롯한 범죄로 국민들은 소년법 폐지를 주장하고, 처벌 강화를 요구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형량을 높였을 때 잔혹한 범죄가 줄고 소년범죄가 감소하는지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지역사회 붕괴와 학교 밖 청소년 증가 등 근본적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형량만 높이는 건 문제 해결이 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또 한결같이 체계적인 재사회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강력범들의 재범 이유는 먹고 살기 힘들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인 경우가 많다”며 “재범을 막는 방법은 결국 재사회화 뿐”이라는 입장을 표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쉬웠다. 일과는 살인. 나는 누구에게도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집으로가는길
▲집으로 가는 길 원서 표지.

과거 소년병이였던 <집으로 가는 길(A Long Way Gone)>의 저자 이스마엘 베아(Ishmael Beah)는 과거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는 가난했지만 랩 음악과 힙합 댄스를 좋아하던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1980년 무렵, 그날은 장기자랑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뿐이었다. 시에라리온 전쟁에 휘말릴 줄은 몰랐을 것. 전쟁에 휘말린 그는 그는 소년병으로 징집돼 전장 한 가운데로 내몰렸다.

소년병의 삶과 180도 다른 삶을 살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총과 마약을 빼앗긴 소년병들은 극도의 공격성을 보였고 이유 없이 민간인들에게 돌을 던지기 일쑤였다. 오랜 기간 끝에 그는 현재 유니세프 대사이자 국제 인권감시기구인 ‘휴먼 라이츠 워치(Human Rights Watch)의 어린이 인권 분과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생존을 위해 잔혹한 일을 저질러야 했던 소년병의 이야기. 여기에 또 한 사람이 있다. 조용진 목사. 그는 사실 목사가 될 수 없었다. 30대 초반에 무기징역과 청송보호감호 10년을 선고 받아 사회로부터 끊어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29일, 부천 서문교회에서 ‘전도는 생명이다’라는 제목으로 초청 간증 집회를 가졌던 조용진 목사는 다음과 같이 그날을 회상했다.

조용진목사
▲초청 간증 집회중인 조용진 목사. ⓒ부천서문교회

“무기징역은 그냥 주는 게 아니에요. 무기징역을 줄만한 사람이면 그만큼 죄질이 나쁘고, 엄청 나쁜 짓을 한 사람이에요. 근데 그것도 적다 해서 청송보호감호 10년까지 줬죠. 한 마디로 말하면 사형 가지고는 안돼, 그냥 죽이는 거도 아깝다는 얘기. 당시 제 나이 32세, 사람들 패고 남의 것 뺏어먹는 데 박사였죠.”

그의 이야기는 아직 한국이 가난했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던 그는 친구 따라 고개를 들고 제비 집을 구경하고 있었다. 친구가 막대기를 이용해 제비 집을 건드리는데 때마침 이물질이 눈에 들어갔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됐다.

이후 부모님 등에 업혀 병원이란 병원과 약국을 전전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날 쯤, 그는 겨우 눈이 조금 보이게 됐다. 이미 때를 놓쳤지만 뒤 늦게 학교를 들어갔다. 눈이 안보이니 맨 앞자리. 그런데도 보이지 않아 딴청을 피우는데 갑자기 무언가 얼굴에 딱 하고 부딪혔다. 분필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동태눈깔 조용진!”

선생님의 한 마디에 교실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어린 조용진은 수치심과 모욕감에 그 자리에서 무작정 교실을 뛰쳐나왔다. 그것이 학교의 마지막이었다. 곧장 서울로 상경한 어린 조용진. 불행의 시작은 그때부터. 하필이면 ‘왕초거지’에게 잡혔다. 그것도 앵벌이와 폭력을 일삼는 우두머리 거지였다. 훈련이 시작됐다.

깡통에 밥 얻어오기. 청바지 훔쳐오기. 그땐 청바지가 돈이 되던 때였다. 성에 안 차면 피가 흐르고 기절할 정도로 때린다. 그러면 어린 아이는 복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도구를 이용해 사람을 때려 기절시키고 금품을 갈취해 오란다. 당시 한국의 치안상황은 좋지 않을 때였다. 거기다 어린 아이는 잡혀도 훈방(경찰서 등에서 잔소리 훈계 한번 정도 듣고 넘어가 주는 것)이니까 더 이용해 먹는다.

조용진목사
▲출소 후, 교정위원으로서 출소자를 위한 초청 강연을 진행 중인 조용진목사. ⓒ조용진 목사 제공

시체 더미에 버려진 적도 있다. 당시 가난했던 한국은 임시적으로 연고지 없는 시체를 넣는 기차 화물칸이 있었다. 거지들이 어린 조용진을 때리다가 죽은 줄 알고 그곳에 버린 것이다. 어린 조용진은 5-6명 되는 시체 사이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을 반복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일상의 반복을 지나, 어느덧 어린 조용진은 소년원을 갈 나이가 됐다. 처음으로 소년교도소에 들어갔다. 맨날 맞고 살면서 씻지도 못하는 냄새가 나는 거지였는데 씻겨주고 밥도 주었더라. 처음으로 교도소를 간 어린 조용진은 ‘여기가 천국이다. 내 집으로 찜 했다’고 생각했다. 조용진 목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게 말이 됩니까? 밖에서 얼마나 힘들게 살고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으면, 그 어린 나이에 교도소가 내 집이라고, 천국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한글도 못 배운 어린 조용진이 유일하게 배운 것은 ‘강도 짓’뿐이기에 그는 교도소를 일상적으로 들락날락했고, 갈 때마다 징역을 꽉꽉 채워 살다 나왔다. 대낮이든 밤이든, 옆에 경찰이 있든 없든, 범죄를 일삼았다.

그러다 무기징역과 보호감호 10년이 구형됐다. 그런 그에게 어떤 법관위가 “청송보호감호는 빼주겠다”고 제안한다. 의심스러워서 ‘정말이냐?’고 계속 물었다. 그러자 법관위가 이렇게 말했다.

“야! 내가 예수 믿는 집사야.”

32세 조용진은 이때 ‘예수’란 소리를 처음 들었다. 사실 부처도 몰랐다. “집 사는 사람이 집산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뭔가 느낌상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가보다’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기징역에 보호감호를 받았다.

당시의 조용진은 다른 수감자들에게 폭행을 일삼았다. 보호감호 10년은 무거운 죄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음에도, ‘예수 믿는 집사가 거짓말 했다’는 이유를 대며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특별대우 해서 더 때렸다. 통제가 안되니까 일반 수갑 두 개에 가죽으로 만든 수갑까지 채워졌다.

어느 날은 밖에서 누군가가 “조용진 형제님”하고 부르더라. ‘형제님’이라기에 갔더니 들어온 지 얼마 안된 교도관이다. 조용진은 “형제도 아닌데 왜 형제래” 이렇게 생각할 찰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들이박고 눈에 보이는 건 다 집어 던지면서 난리를 쳤다. 처음엔 교도관이 깜짝 놀라는가 싶더니, 날마다 와서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더라. 조용진 목사는 “그 예수쟁이 질기데. 끄떡도 안 한다”라며 그때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북한 선교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크리스천투데이 DB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더 열 받는 일’, ‘뚜껑이 열리는 일’이 생겼다. 교도관이 최고의 서비스(?)를 한답시고 성경책이랑 찬송가 두 개를 가지고 와서 “이거 보시라”고 한 것. 조용진은 ‘내가 한글을 모른다고 날 약 올려?’ 이렇게 생각하고 “올 때마다 구원 구원. 도대체 10원도 안 되는 9원도 안주면서 매날 구원받으라 하냐”고 소리치면서 그 자리에서 성경책을 찢고 밟고, 그걸 교도관한테 던졌다.

또 한 번은 교도관이 “기도하는데 조용진 형제님이 전도자가 된대요”라고 말하더라. 이젠 전도자의 뜻을 알았다. 조용진은 ‘으악!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무기징역에 보호감호 10년인데, 내 이름 석자도 못 쓰는데!’라고 생각하며 난리를 쳤다. 너무 시달려서(?) 교도관이 꿈에도 나올 지경이었다고. 어느 날은 ‘이렇게 하면 더 이상 교도관이 오지 않겠지’라는 생각으로 교도관 얼굴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러자 교도관이 침도 안 닦은 채로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며 기도하더라.

“전 일찍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서 택해주셔서 구원받았는데, 조용진 형제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저지르는 게 뭔지 모릅니다. 일찍이 조용진 형제님을 만나지 못해 전하지 못한 죄인인 저에게 모든 것을 벌 하시고… ”

뒤통수를 맞은 거 같았다. 조용진은 큰 충격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거짓말 한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누구지? 하나님이 두 분인가?’… 별의 별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내로라하는 대학의 법대생 출신 수감자가 새롭게 교도소에 들어왔다. 성경을 읽기 위해 그들을 통해 한글을 배웠다. 그리고 맨날 구타소리와 신음소리만 들리던 수감방에서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쪽 저쪽에서 놀라서 교도관이 달려왔다. 지옥 같은 수감방에서 찬송소리와 성경 읽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게 조용진은 교도소 안에서 성경 50독 이상, 가지 못했던 학교를 검정고시 합격하고, 교도관의 보증으로 12년만에 출소하게 됐다.

조용진목사
▲조용진 목사. ⓒ김신의 기자
“그 교도관의 입에서 나온 건 거짓이 아니었어요. 전도자가 됐잖아요. 제가 죄 받아 마땅했던 놈인데, 당연한 죄의 대가인데도, 재판 당시 무기징역 준 판사한테 ‘내가 70, 80, 100살이 돼도 조선팔도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너를 갈기갈기 찢어서 잔인하게 죽일 거다. 와이프랑 자식, 친척들 다 죽일 거’라고 소리를 쳤었습니다. 그 정도로 잔인한 놈이었고 흉악한, 악독하고 나쁜 놈이었어요. 예수를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 뻔 했나. 40이 넘어서 교회를 처음 갔습니다.”

그때부터 막노동을 뛰면서 이제는 목사가 된 교도관을 따라 교정사역을 시작하고 신학교도 갔다. 그리고 지난 2001년 강도사 인허를 받고, 사람이 되야 목사가 될 수 있다며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12년에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서울총신대학교 총회목회대학원을 나온 조용진 목사는 현재 여주 교도소 교정위원이자 예수사랑선교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그에게 소리소문 없이 이야기를 듣고 찾아 오는 출소자는 의식주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활동하고 있는 예수사랑선교회는 이들을 위해 취업할 공장, 숙소, 일터 마련을 위해 주은농장을 운영하며 자비량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조 목사가 다쳐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 그 동안 농장을 돌볼 때를 놓쳤다. 어려운 현실에 처했다.

“지금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가라고 하시니까…”

가진 것 없어도 궁핍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어 감사했다는 조용진 목사는 망설임 끝에 출소자들의 자립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지난 10월 29일 전도간증집회에서는 자신의 삶, 그리고 성경 속의 인물들, 살인했지만 하나님 안에서 겸손하게 변화된 모세,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들어간 요셉,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이야기, 잔인했던 사울이 바울로 변화된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전도가 왜 필요한가? 우리 주님께선 저 같은 죄인 때문에, 저를 전도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전도가 생명인 줄 믿으시길 바란다”며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이용하라고 사명으로서 주신 것이다. 전도해야 한다”고 삶과 물질로 선교를 위해 힘쓸 것을 독려했다.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는 출소자와 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더했다. 조용진 목사는 “교도소에 오는 사람들 보면, 다 사연이 있다”고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강력범죄의 재범률 및 재범예측에 대한 연구’를 연구자료에 따르면 친부모 여부, 방임적 양육태도, 적은 의사소통, 부모의지 정도, 부모 등의 보호 능력, 가족의 소득 여부, 가출 횟수, 학업중퇴여부, 학업성취도 차이, 무직여부, 음주빈도, 향정신성 마약 등 사용여부, 소년보호처분횟수 등이 재범 비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연구는 가정환경과 학교, 개인적 요인, 보호관찰 처분 사건 및 개입 관련 요인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특성을 비교하며 “재범요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재범률을 감소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교정교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가 사역하고 있는 주은농장에는 작은 일 하나에 기뻐하는 순박한 제자들이 있었다. 출소 후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오랜 기간 함께 살고 있었다.

“젊은 청년들도 일자리가 없어서 백수가 많은데, 전과자를 안 쓰는 거예요. 전과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걸 보면 가족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단 의식주가 해결이 안되고, 자기 하나 희생하면 가족이 괜찮아진다고 순간 잘못된 판단을 하고 사건을 저질러요. 가장 힘들 때가 위험해요. 안 도와주면 사건이 터져요.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더 받아야 하는데 여건이 부족하니 많이 받을 수 없어요.”

조용진목사
▲주은농장에서 뒤늦은 때에 수확 하고 있는 조용진 목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제자들. ⓒ김신의 기자
조 목사의 아내 박종애 강도사도 “일반인들은 교도소 소리만 나와도 싫어한다. 나쁜 놈들이라고 외면하니 악순환이 된다”고 이야기를 보탰다. 그러면서 조 목사는 보다 많은 이들, 특히 교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독려했다.

“제가 후원요청이나 부탁을 안 했었는데… 하나님 일은 저 혼자가 아니라 믿는 사람이 함께 해야 한단 걸 이제 깨달았어요. 교도소 안에서는 사역이 많이 있는데, 출소자들과 함께할 사람이 별로 없어요. 힘들면 해코지하는 사람도 있고, 무섭다고 안 하고 포기해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 중에 변화되는 한 영혼을 보잔 거예요.

많은 생각을 했어요. 제가 출소했는데, 예수로 변화 안 돼서 사고를 저지르고 다니면 얼마나 무서운 얘기겠어요? 하나님 말씀과 사랑밖에 없어요. 12년 형을 살다 온 제자를 예로 들면 말씀에 붙들려 있는 거예요. 말뿐이 아닌 행동, 떡이 필요합니다. 당장 배고픈 사람에게는 금은을 줘도 소용이 없어요. 빵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 교회가 협력한다면 안전한 사회가 됨과 동시에 죽어가고 떠도는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어요. 같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잔 거예요. 저들을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해서 세상과 기술적으로 잘 보필해, 저들을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돼요.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