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
본 서평은 페이스북 페이지 '신학서적중고장터'의 독서 지원 프로그램에 의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사랑과 정의(Justice in Love)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 홍종락 역 | IVP | 520쪽 | 27,000원

1. 들어가는 말

사랑과 정의에 관한 문제야말로, 개신교 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가장 뜨거운 감자들 중 하나일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논쟁은 특히나 담임목회자의 세습이나 목사들의 성범죄를 비롯한 여러 사회 문제들에서 두드러진다.

일각에서는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정의롭지 못하며 범죄자들에게 자비 대신 응보를 집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상에 정의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아무리 범죄를 저질렀어도 사랑으로 용납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문제에서 '사랑'을 외치는 자의 손을 들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논쟁이 두드러지는 또 다른 사례는 사회 약자와 소수자들에 관한 개신교의 태도 문제다. 한편에서는 그들이 '범죄'했으며 더럽고 불법적인 존재임을 신사적인 제스처 혹은 적나라한 혐오 표현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주장한다. 또 다른 진영은 그들은 사회적 낙인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정적인 자비를 베풀고, 그들을 둘러싼 편견의 딱지를 떼어 그들이 당당한 삶에 연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문제는 앞서 제시했던 문제보다 더 뜨거운 논쟁이 지속되고 있으며, 사랑과 정의를 각각 대표하는 두 집단이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아닌, 각 진영이 각각의 사랑과 정의를 동시에 주창하는 복합적인 이슈다.

개신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정의에 관한 논의들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사랑과 정의 이 둘이 양립 가능한지 혹은 대립각을 세우는지에 대한 만족스러운 합의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과 정의에 관한 논쟁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개신교의 한편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양립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또한 반사회적인 개신교의 모습을 성찰하고 반성한 이들이라면 대체로 이에 대한 나름의 내부 논리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개신교가 말하는 사랑과 정의는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답은 직관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심도 있는 논의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언제나 대립 구도로만 설명한다. 그리고 대체로 이들은 이 대립에서 꼭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준다. 사랑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에게, 개신교가 정의를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혁파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일이다. 반대로 정의의 손을 들어주는 이들이 볼 때, 개신교의 사랑 교리는 언제나 권력자와 악한 체제의 앞잡이 노릇을 해 왔다고 말한다. 이 진영의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굉장히 피곤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항상 같은 문제를 의미 있게 발전시키지 못한 채 언제나 쳇바퀴처럼 똑같은 논쟁을 반복하는 이유가 각자의 주장만 할 뿐, 서로 제대로 된 합의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난한 문제에 이제는 합의와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부터 나는 사랑과 정의라는 이름의 이 혼잡한 교차로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라는 신호등 하나가 세워지길 바라며, 월터스토프가 논증하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읽어 나갈 것이다.

2. 이 책이 시도하는 것

월터스토프가 이 책에서 뚜렷하게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사랑과 정의는 양립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이 질문에 양립 가능하다고 답한다.

그 동안 월터스토프는 서구 사회가 사랑과 정의를 주로 대립구도로 다뤄왔다고 말한다. 그것이 꼭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음(17쪽)"에도 말이다. 나아가 월터스토프는 서구 사회가 양측 사이를 충돌과 대립의 문제로 인식했던 이유가 양측을 모두 "잘못 이해(14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랑과 정 각각의 이해를 수정한다면, 이 둘은 분명히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월터스토프의 사랑 이해이다. 그는 사랑과 정의가 기존의 이해대로 정말 대립구도라면, 대체 "어떤 종류의 정의와 어떤 종류의 사랑이 충돌한다고 보는 것인가(13쪽)?"라고 질문한다. 사람들은 보통 정의에 대해서는 온갖 종류의 정의를 구분해가며 논의하고 상황에 따라 필요한 정의를 윤리체계로 선택하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오직 '자비'에 대해서만 논한다.

월터스토프가 볼 때, 사랑과 정의가 대립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사랑에 대한 이런 방식(자비)의 이해다. 이는 사랑을 자비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면, 기존의 관점으로는 불가피해 보였던 정의와 사랑 사이의 긴장이 해소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저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3.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사랑

그렇다면 월터스토프가 생각하는 사랑과 정의는 어떤 개념이기에, 서로 양립 가능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월터스토프는 이 질문의 답을 구성할 때, "철학적으로는 기존 윤리학의 관점인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신학적으로는 현대적 아가페주의를 보강하고 발전(504쪽)"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정의관을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그의 전작 『Justice: Rights and Wrongs(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8)』에서 이미 밝힌 바 있고, "이 책에서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게(14쪽)" 될 것이며, 정의에 대한 그 자신의 주장을 위해 힘을 기울이진 않을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그가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논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생각하는 정의에 대한 단서를 유추할 수 있다.

월터스토프의 정의는 현대 윤리학, 특히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사회질서를 정의로 보는 공리주의와는 전혀 궤를 달리한다. 그는 정의를 "각자에게 그의 이우스(ius)를 돌려주려는 항구적 의지"라고 표현한 울피아누스의 『로마법 대전(The Digest)』을 인용한다(157쪽), 그는 여기서 이우스(ius)를 '권리'로 번역하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인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동등하게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인권 말이다. 그의 정의론은 이 인권에서 출발한다.

그는 "인권을 이해하려면 그 이면을 보라(160쪽)"고 권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가 소유한 권리를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상태, "부당한 대우(160쪽)"를 받는 상태를 먼저 생각한다면,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정의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 『사랑과 정의』가 말하는 권리는 그 특성상 "최상의 힘(163쪽)"과 "가치에 대한 존중(165쪽)"을 가지는데, 만약 내가 절대로 침해받지 말아야 할 어떤 최종적 가치(이를테면 인권)를 갖고 있다면, 사람들은 내 권리를 빼앗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따라 생각해 보자. 인간을 최종적으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권리를 그 사람에게 마땅히 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다. 반대로 각 사람들이 소유한 최종적 가치에 합당하게 대우해준다면 그것은 정의이다.

그렇다면 월터스토프에게 있어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어떻게 그가 말하는 정의와 양립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의 단서를 우리는 아가페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현대 윤리체계가 갖고 있는 실패를 지적하면서 이를 대체할 것으로 '현대 아가페주의'를 제시한다.

현대 아가페주의란 "타인의 선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여기고 증진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암시하되, 최대 행복 조건을 거부하는(36-44쪽)" 윤리체계 중 하나의 유형이다. 이 아가페주의는 성서의 아가페를 해석하는 전통에서 비롯됐다. 이 아가페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시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와 비고전적 아가페주의가 그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이 현대 아가페주의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비평하면서, 자신만의 아가페주의를 제시한다.

현대 아가페주의는 기본적으로 월터스토프가 지칭하는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말한다. 이는 보통 사랑의 대상을 향한 자비와 관대함을 일컫는데, 이 자비는 성서의 예수가 의도한 이웃을 향해서 베풀어진다. 이 사랑은 그 "사랑하는 대상이 갖고 있는 어떤 동기도 없이 전적이어야 하고(니그렌, 56-58쪽)", 또한 "의무에서 나와야 한다(키에르케고어, 59쪽)." 그렇다면 이런 아가페주의가 말하는 자비로써의 사랑은 정의와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

여기서부터 고전적 아가페주의와 비고전적 아가페주의의 세부 의견이 갈리지만, 큰 맥락에서 이 둘은 의견 일치를 보인다. 현대 아가페주의자들에게 사랑과 정의는 대립적인 것이다. 사랑은 때때로 불의하며, 정의는 때때로 자비롭지 못하다. 특히 고전적 현대 아가페주의 입장은 더욱 강경한데, 대표적인 고전적 아가페주의자인 니그렌은 "정의 시행에 대한 모든 관심을 삶에서 뿌리뽑아야 한다(90쪽)"고 주장한다.

이런 고전적 아가페주의의 강경함을 비판하고 나선 비고전적 아가페주의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우리가 사는 현실이 갈등과 경쟁의 상황이라는 조건을 달아 "정의는 현실 속 충돌들의 정당한 해결책(127쪽)"이라 주장하며, "타협 없는 자비는 종말에 이르러서 완성될 것(126쪽)"라는 말로 '현실주의'라는 이름에 걸맞는 입장을 밝혔다.

월터스토프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아가페주의라고 설정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아가페주의에 대한 이해를 고려한다면, 월터스토프는 니버의 손을 들어줄 것 같다. 그러나 월터스토프는 현대적 아가페주의의 두 진영 모두를 거부한다.

그는 고전적 아가페주의가 불의를 저지를 가능성을 이유로 거부한다. 고전적 아가페주의는 월터스토프가 보기에, 앞서 말한 권리의 관점에서 누군가를 부당 대우하면서도 그 행위가 허용된다고 보는 무리한 주장이다. 니버의 비고전적 아가페주의는 "갈등의 상황에서는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성서 해석을 근거로 내세운다는 점이 모순(134-136쪽)"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월터스토프가 보기에 예수는 갈등 상황에서 오히려 사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월터스토프가 비판하는 현대적 아가페주의의 주요한 실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사랑이 '자비'의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사랑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랑 개념을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월터스토프는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은 '모든 종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199쪽).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배려'의 사랑이 아가페주의가 채택해야 할 종류의 사랑임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자신이 말하는 '배려'의 사랑을 히브리 성서와 기독교 성서가 가르치는 종류의 사랑이라고 자신하기 때문이다(147-155쪽).

'배려'의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최종적 가치,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이른바 권리를 존중한다. "배려는 누군가의 번영의 증진을 추구하는 일과 그에게 정당한 대우를 보장해 주려는 추구를 아우른다(186쪽)". 즉 배려는 자비를 포함한다. 우리는 월터스토프가 말했던 정의가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지 않는 것', 즉 사람이 누려야할 최종적인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면, 사랑과 정의는 충돌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배려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정의로운 대접을 받도록 하는 것(198쪽)"이 된다.

여기서 초점은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정의가 제대로 준수되는지의 여부다. 월터스토프는 불의를 행하는 사랑이 '기형적 사랑(14쪽)'이라고 못을 박는데, 아무리 누군가의 선의 증진을 추구했어도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했다면 월터스트포는 어김없이 그 사랑은 '기형적'이라고 말할 것이다(187쪽).

이런 점에서 배려도 '기형적 배려'가 될 가능성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으나, 월터스토프는 배려가 반드시 성공하거나 정상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할 것이다. 누군가의 선이라고 믿는 바를 증진시키거나 그들의 권리라고 믿는 바를 보장하려고 시도한다면, 상대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다(189쪽).

Nicholas Wolterstorff
▲<사랑과 정의>의 원작 《Justice in Love(2011)》, 앞서 발표한 《Justice: Rights and Wrongs》.
4. 정의와 하나님의 용서

월터스토프는 앞서 사랑과 정의가 갈등한다고 생각하는 기존 의견들에 대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사랑과 정의는 어떤 양상에서 서로 갈등을 빚는가? 아니, 다시 말해서 "기형적인 형태의 배려는 어느 때에 정의와 충돌하게 되는가(285쪽)?"

월터스토프는 사랑과 정의 사이의 긴장상태로 '보이는' 여러 사례 중 용서의 사례를 유독 길게 다룬다. 기존 의견들이 말하듯이 사랑의 행동이라고 이해되는 '용서'의 사례가 실제로 정의와 충돌을 일으키고 대립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신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문에 맞닥뜨린다. "용서가 정의를 침해하는가(337쪽)?" 월터스토프는 확실히 용서가 정의를 침해하는 부분이 있다고 보았다. "누군가를 정의에 따라 처벌해야 할 때, 다른 누군가가 처벌 받아야할 그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해서 그 처벌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정의를 침해하는 것이 된다(361쪽)".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렇게 용서와 정의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의 법과 그 정의로운 처벌이 하나님이 죄인에게 베푸는 온전한 용서와 마찰을 빚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당연하겠지만, 월터스토프는 이 문제를 '하나님의 용서'가 정의와 얼마나 깊게 연관되는지를 논증하면서 돌파한다. 이는 칭의 교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전통적인 칭의 교리에 따르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는 재판관이 피고인의 범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언하는 사법 행위(450쪽)"이자 "재판관이 범법자를 용서하거나 사면하는 일(451쪽)"이다.

월터스토프가 지적하는 문제는 무죄 판결과 용서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451쪽)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구원론적 성서해석이 자신의 논증을 뒷받침하기에는 일관성이 없고 실패했다고 본다(449-450쪽) .

여기서 월터스토프는 전통적 칭의론의 대안으로 '재판을 기각하는 비유'의 칭의론을 제시한다. "신적인 재판관이 죄인이 믿음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기소를 기각 한다(462쪽)." 칭의와 죄인의 용서를 법정적 이미지로 묘사해야만 한다면, 애초에 재판은 일어나지 않았고, 죄인은 무죄 판결을 받지도 않은 상태로 서술해야 한다.

월터스토프의 모든 논지를 되새기면서 칭의론을 생각해 보자. 인간은 왜 죄인인가? '하나님의 선을 증진시키려 하거나 그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대우를 하지 않아서', 즉 하나님을 부당 대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재판장에서 죄인들이 믿음을 갖고 있다면서 그의 재판을 기각한다. 이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믿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월터스토프가 그동안 말했던 사랑과 정의 개념을 따르면 '하나님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 즉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부당하게 대우했던 죄인이 하나님을 정당하게 대우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삶을 모두 '돌이켜' 하나님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삶으로 향해야 한다. 즉,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칭의를 제안하심으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정체성(491-493쪽)"으로 살아가야 한다.

월터스토프는 하나님의 구원이 '불의'일 수 있다는 비판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방어한다. 그가 논증하는 하나님의 칭의는 '누군가의 번영의 증진을 추구하는 일'을 충족시키며, 그에게 '정당한 대우를 보장해 주려는 추구'도 충족한다. 칭의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는 정의로운 사랑의 행동이 된다. 칭의는 용서를 통해 죄인의 삶에 '돌이킴'이라는 선을 가져다 주었고, '믿음'을 가진 이에게 재판의 기각을 선언함으로 정의를 가져왔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5. 나가는 말

정리하자면 이 책은 사랑과 정의는 결코 대립관계가 아니며, 사랑과 정의가 함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월터스토프는 현대 아가페주의를 비평하는 과정에서 우리로 하여금 보다 넓은 사랑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게 하며, 사랑과 정의의 관계에 정의로운 사랑, 사랑과 함께하는 정의라는 새 구도를 가능하게 한다. 나아가 사랑의 행동 사례들 중 정의와 긴장상태를 만들 수 있는 것들을 다시금 재고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칭의론과 하나님의 용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보여준다.

지금까지 『사랑과 정의』를 '소개'했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사랑과 정의가 대립되는지 아니면 조화를 이루는지, 대립되면 왜 그러한지, 조화를 이룬다면 왜 그렇게 되는지에 관한 내적 근거가 부족한 한국 개신교의 논쟁터에 주요한 시사점과 논제를 가져다 줄 책이라고 확신한다.

월터스토프는 사랑과 정의의 관계가 결코 대립적이지 않음을 논증하기 위해 정말 집요하고 성실하게, 방대한 근거와 각론을 이용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처럼 고시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리뷰를 하는 사람이 코멘트를 달 만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한국 개신교에 조금 더 논쟁을 불러와야 하고,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한국교회의 논쟁에 의미 있는 발전을 불러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옆에 두고 논의해야 할 것이 많다. 월터스토프가 말하는 인권에 대해서도 조금 더 심도 있는 논쟁이 필요하고, 그동안 '바울의 새 관점'을 철저히 경계하고 전통적 칭의론을 고수했던 한국의 장로교 그룹들은 개혁파의 석학 중 하나인 월터스토프가 '구원이 가진 정의의 속성을 변증하기에 기존의 칭의론은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말한 부분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여러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한국 개신교의 '사랑과 정의'에 관한 논의에 더 치열한 토론을 가져다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은 더욱 활발하게 비평되어야만 한다.

글: 권우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