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라는 말씀은 하나님에 대해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날마다 분노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분노는 인격을 가지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기인합니다. 의인 곧 그의 자녀에 대해서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지만(습 3:17), 죄인을 향해서는 분노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십니다.

종말의 심판은 더 이상 분노를 억제하실 수 없어 터져 나오는 하나님의 분노의 폭발입니다. 이 하나님의 분노에 죄인이 멸절되고 날아 가버립니다(시 1:4-5).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습 1:18).' 죄 값이 지불되지 않는 한 죄인을 향한 분노는 그치지 않으며, 그 분노로 인해 하나님이 고통을 당하십니다(사 43:24; 말 2:17).'

그런데 더 큰 하나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곧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할 죄값과 의(義)를 육신이 연약한 인간에게서는(롬 8:3) 찾을 수가 없으며,-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영원히 풀길이 없으며-오직 하나님 자신의 의로서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분노의 고통을 아실 뿐더러, 그 분노를 풀어드릴 수 있는 유일자이신 성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가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율법의 수종자가 되어주셨습니다(롬 15:8).

그러나 정작 진노의 대상인 인간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이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자기의 소경됨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적 소경인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으면서도 그러한 자신의 비참을 모르고, 진노에서 벗어나는 길도 알지 못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무화과 잎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리려고 한 것은(창 3:7), 죄로 무지해진 인간이 자기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의(義)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의 율법적 행위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했고(창 3:7). 그에게 양의 가죽옷이 입혀졌을 때, 비로소 죄의 수치가 가려졌고 하나님의 진노도 멈춰졌습니다.

대개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을 말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직되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피조물의 영향을 받지 아니하시는 자존적인 하나님(aseity of God)이 피조물로 말미암아 속을 끓이시고 심지어 고통당하기까지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단지 문학적인 수사로 치부합니다.

이와 달리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거나 공감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동정심 많으신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당할 때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신다는, 공감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을 무대로 쓴 소설, 엘리 위젤(Eliezer Wiesel, 1928-2016)의 'The Night'에 나오는, 한 유대인 소년이 교수형을 당하는 현장에서 주고받은 이야기와,-불쌍한 어린 소년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이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지금 저 소년과 함께 교수형을 받고 계시다'라고 말한 것과-유사한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 그대로, 인간의 죄로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직설법적으로 말씀합니다.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사 43:24)'. 실제로 하나님은 죄인과, 그들이 행하는 죄로 인해 고통하십니다(이는 결코 하나님의 자존성이 손상을 입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썩은 오물이나 분뇨에서 나는 악취로 고통을 느끼듯이, 하나님은 오염된 죄인을 보는 것 자체로 고통하십니다.

하나님의 2위이신 거룩하신 성자께서 분뇨통 같은 세상에 오신 것은, 그 자체만으로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라고 탄식하셨던 것은, 다만 세상 사람들의 냉대를 의미하는 것만이 아닌, 죄 된 세상자체가 성자에게는 머물 수 없는 고통이었음을 말한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죄인에 대한 성부의 분노의 고통을 더욱 이해하게 되셨고, 그 고통을 풀어드리기 위해 창세전부터 어린양이셨습니다(계 13:8).

이처럼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죄에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풀어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칭의를 단지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 중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의의 요건이 느슨하게 되어-인간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을 보태는 것이 뭐가 잘못이겠는가 라는 상상을 피어냅니다(그러나 사실 '구원'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다'는 개념인데, 사람들은 둘의 의미에 차이를 두는 것 같습니다).

반면 칭의를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만족시켜 그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으로 이해하면,-의의 요건이 엄격하게 되어-불완전한 인간의 행위적 의는 간과하게 되고, 완전한 하나님의 의(義)인 믿음의 의만을 주목하게 됩니다. 성경이 믿음의 의를 완전한 하나님의 의로 규정하는 것은, 믿음이 하나님의 공의를 유일하게 만족시킬 그리스도의 피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증해 주는 성경구절이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입니다. '피, 믿음, 화목(의)'으로 구성 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어 의롭게 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을 얻는 데는,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를 믿는 믿음 외에 어떤 첨가 사항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심판하지 않는 이유도, 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義)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요 3:18).'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이처럼 성자의 대속 대행을 바탕으로 값없이 시여되는 칭의는, 인간의 공로가 첨가될 어떠한 가능성도 배제시키고, 칭의를 오직 믿음으로 얻는 선물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2:8). 그 결과 인간으로 하여금 의롭다 함을 받은 것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게 만들었고(엡 2:9; 고전 1:29),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칭송토록 만들었습니다(엡 1:6).

그런데 만약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칭의가 부정되고 인간의 공로가 첨가될 때, 위의 내용들을 비롯해 아래와 같은 주요 가르침들도 모두 부정됩니다.

첫째, 인간의 전적 무능 교리가 부정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요성도 부정됩니다. 둘째, 인간의 무능 때문에 세워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의 경륜이 부정됩니다. 셋째, 칭의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시키므로서,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게 됩니다. 넷째,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해 칭의 언약을 견고케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롬 15:8; 4:16)이 무너집니다. 칭의에 믿음 외에 인간의 공로를 요구할 때, 거기에 완벽히 응답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롬 8:3), 칭의의 성공이 담보되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의 의(義), 곧 이신칭의가 하나님께는 완전한 의가 되어(롬 3:21) 하나님의 분노를 풀어드리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어둠의 지배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믿음의 의(義)가 이렇게 서로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이는 믿음의 의(義)의 뿌리인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입니다.

가인이 믿음에 의지하여 양의 제사를 드린 아벨을 죽인 것이나, 유대인들이 믿음의 의를 설파한 스데반을 죽인 것 역시, 그리스도에 뿌리박은 믿음의 의에 대한 적대감이 자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것에서 적대감의 절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여 십자가에 내어줌을 통해 믿음의 의를 일으켰고(롬 10:4), 그 믿음의 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높이셨습니다(빌 2:8-11). 탁월한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