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삼용 조만식
▲추모식이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故 고당 조만식 선생 순국 67주기 추모식이 18일 오후 서울 YWCA 대강당에서 진행됐다.

이우열 고당기념사업회 이사가 사회를 맡은 추모식은 국민의례에 이은 고당의 생애를 담은 영상 시청, 우윤근 이사장의 개회사,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과 박유철 광복회장의 추모사, 오현정 시인(한국문인협회 이사)의 시낭송, 송삼용 목사(하늘양식교회, 크리스천포커스 발행인)의 강연, 숭실동문중찬단의 특송, 전체합창, 송삼용 목사의 축도 및 기념사진촬영 순서로 진행됐다.

이날 '고당의 애국관과 십자가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송삼용 목사는 "고당 조만식 선생은 민족의 큰 스승이요, 시대의 등불이었다. 고당은 일제 시대 때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훈 등과 함께 우리 민족을 이끌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며 "고당이 끼친 대사회적, 민족적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고당은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평신도의 신분으로 우리 사회와 민족과 교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송 목사는 "고당은 8.15 직후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고당은 평양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직함을 맡아 8월 17일자로 '과거의 소사는 청산하고 동포여 건국에 돌진하자'는 주제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발기문을 발표했다"며 "북한의 건준 활동을 계기로 고당은 북한 사회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했다. 1945년 11월에는 고당을 비롯한 이윤영, 한근조 등의 민족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조선민주당이 창당됐다. 당시 고당은 창당 원칙을 '민족의 독립, 남북의 통일, 민주주의의 확립'으로 내세워 창당 3개월만에 당원수 5십만을 돌파하는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고 했다.

그는 "소련 측에서는 고당을 이용해서 민심을 주도하려고 했다. 더욱이 스탈린조차도 고당의 영향력을 인정할 정도였기에 소련군은 고당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들은 고당이 아니고는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라며 "북한 사회에서 고당의 신임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그런 정치적인 영향력 외에도 각 분야에서 고당은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예컨데, 교육, 경제, 언론, 체육, 종교, 농촌 운동, 청년 활동, 반공 등 각 분야에 고당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특히 송 목사는 "고당의 애국관은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며 고당은 청년 시절 친구 한정교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접한 후 러일 전쟁 피난길의 불안한 정국 가운데서 친구 한석진에게 복음을 전해 듣고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며 "당시 고당은 가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며, 국가 역시 난리로 인해 위기 상태였다. 러일 전쟁 피난길에서 돌아온 후 친구 한정교로부터 권유받은 신학문과 교회 생활은 그의 생애를 바꿔 놓았다. 그는 신학문을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23살의 만학도로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후 장대현교회를 거쳐 산정현교회에서 평생 동안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고 했다.

그는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평양대부흥은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진 고당의 순교적 신앙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당시 평양대부흥의 영향으로 인해 숭실중학교에 일어난 영적 바람은 고당의 신앙심을 뜨겁게 해주었다"며 "숭실학교에서 동료들에게 임한 성령의 역사들, 교장 베어드 박사의 철저한 기도 생활, 그리고 선교사들이 매일 정오에 드렸던 정오 기도회 등의 영향은 고당을 평생 동안 기도의 사람으로 만들어준 계기가 된 것"이라고 했다.

조만식 송삼용
▲송삼용 목사가 강연하고 있다. ⓒ김진영 기자
송 목사는 "YMCA 총무로 재임하면서 고당은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민립대학 기성회, 신간회 활동, 숭인상업학교 이사장 등을 수행하면서 민족 운동에 헌신했다. 그런 헌신과 왕성한 활동, 깊은 신앙과 본받을만한 인격 등을 통해서 기독교계와 민족 지도자로서 우뚝 설 수 있었다"며 "일제의 서릿발같은 압제 속에서도 그와 같은 업적을 남겼던 것은 고당의  끈질긴 추진력과 무저항주의의 결과였다. 이 운동이 평양을 중심으로 한 민족 운동으로 그쳤지만 3.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에게 활기를 심어 주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해방 후 고당이 북한 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하자 소련군은 고당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 때마다 고당은 그것을 거부하면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며 "삶과 죽음의 기로 앞에서 고당은 밤새도록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새벽녘에야 최후의 결정을 내렸다. '민족과 동포를 위하여 기꺼히 십자가를 짊어지리라!' 이로써 고당은 민족과 동포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순국 및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고당이 끼친 영향력은 말과 행동, 사상과 삶, 정신과 실천, 그리고 신앙과 행위 등에서 일치를 이룬 실천적 지도력에서 나왔다"며 "지도자들에게 심오한 사상은 많지만 삶이 뒷받침된 사상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다. 구호는 화려하지만 실천이 빈약한 지도자들도 많다. 신앙은 고귀한데 행위를 보여주지 못한 신앙인들도 허다다. 여기 저기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많지만 참된 사표가 없는 듯하다. 스승은 많은데 참스승을 찾기 힘든 시대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당의 애국관과 십자가 사상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다. 고당의 애국관과 십자가 사상이 널리 확산되어 우리 사회와 민족이 번영함으로써 통일의 역량을 길러 나갔으면 좋겠다"며 "고당이 평생 소원했던 것처럼 민족이 하나되고, 단결하여 조국 통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