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술원
▲(왼쪽부터 순서대로) 정호광 교수, 김영한 박사, 최태연 교수 ⓒ기독교학술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지난 13일 아침 포도나무교회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케직 영성'이라는 주제로 제64회 월례포럼을 개최했다.

먼저 경건회에선 학술원 이사장인 이재훈 목사(온누라교회 담임)가 '연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고, 이어 발표회는 학술원장 김영한 박사의 개회사와 최태연 교수(백석대)의 발표, 정호광 교수(안양대)의 논평 및 토론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김영한 박사는 '케직 정신(더 높은 성결 추구의 삶)은 오늘날 한국교회 갱신에도 타당하다'라는 제목의 개회사에서 "케직운동은 1870년대 중상류층 신자들 가운데 크게 확산된 '더 높은 영성'(the higher spirituality)을 추구하고자 하는 운동이었다"며 "케직사경회가 수용한 웨슬리적인 부드러운 알미니안주의와 정통개혁주의적인 부드러운 칼빈주의는 교리적 장벽을 넘어섰다"고 했다.

이어 "케직사경회는 전도대회가 아니라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모임이었다. 케직사경회의 지향점은 고도의 영적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성결이었다. 케직운동은 '성화'란 회심 시 시작되어 일생동안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제자들처럼 간구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적인 축복으로서 ​거듭날 때 받는 은혜​라는 입장"이라며 "또 성령을 받은 것과 충만케 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고, 인간은 전적적으로 부패했기에 지상에서는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웨슬리주의 및 미국 성결운동의 완전주의 가르침과는 다른 입장을 취했던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는 "케직운동은 140년 전에 역사적으로 있었던 과거의 운동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를 중심으로 오늘날까지 전개되었으며 1980년에 한국에 도입되어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예장 합동, 통합 등의 지도자들(한경직·임옥·림인식·옥한흠·김명혁 목사 등)이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하였던 한국교회 영성운동이었다"며 "칭의 신앙을 생활하는 것이 바로 성화 신앙이다. 한국교회의 신앙 생활은 이제 생활 신앙이 되어야 한다. 생활 신앙이란 칭의의 은혜에 감격해 매일의 삶 속에서 칭의의 은혜를 생활화하는 것이다. 더 높은 성결의 추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해야 할 과제"라고 했다.

이후 '아브라함 카이퍼와 케직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최태연 교수는 "카이퍼와 케직 운동의 만남은 1875년에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첫 사경회가 열린 1875년 7월 이전에 영국 브라이턴의 집회에서 이루어졌다"며 "카이퍼는 네덜란드에서 참여한 40명과 더불어 그가 기대하던 이상의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했다. 그는 이 집회를 통해 '습관적이고 형식적이며 지적인 예배에서 신자들이 감격하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예배로의 변화'를 경험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카이퍼는 브라이턴에서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은 모든 신자들의 연합(unity)이었다. 카이퍼는 모든 교파로부터 온 신자들이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세력까지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며 "그에게 브라이턴의 체험은 영적 정체에 빠진 네덜란드 개혁교회 신자들의 영혼을 깨우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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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럼의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기독교학술원
그러나 브라이턴의 지도자 피어슬 스미스의 성적 탈선과 총선에서의 참패로 카이퍼의 의지는 한 차례 꺾이고 만다. 최 교수는 "장기휴양에서 돌아온 카이퍼는 1878년 한 언론에 '완전주의'(perfectionism)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논설을 싣는다. 이 논설은 그가 브라이턴에서 경험한 영미 성결 운동의 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며 "한때 영적 거룩함에 도달하는 분명한 길과 능력의 근원으로 여겼던 '더 거룩한 삶'의 추구가 이제 그에게는 '잘못된 전제를 감추고 위험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오류투성이의 신학으로 간주되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완전성화론자에 대한 이런 비판은 동시에 브라이턴 이후 성결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자신에 대한 준열한 자아비판이기도 했다"며 "그러나 카이퍼는 우리에게 개혁주의와 성결 운동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만한 하나의 단서를 남겨 두었다. 특별히 인간의 완전성화론과의 싸움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싸우는 사람'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카이퍼는 불완전성화를 믿는 개혁주의자가 완전성화론자를 비판할 때조차 '불완전'(imperfect)하다는 사실을 낮은 톤으로 인정했던 것"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카이퍼가 네덜란드 개혁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케직사경회를 반드시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만났던 피어슬 스미스 같은 초기 지도자들이 완전성화론에 치우쳤고 실천에서 자기모순을 보여준 데 있었다"며 "케직의 영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카이퍼의 영성과 만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첫째는 헌신(consecration)의 측면이고 둘째는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의 측면"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케직 운동에 대한 카이퍼의 단절은 이론적으로 검토되었기보다는 급박한 현실 상황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일방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케직 운동의 영향이 카이퍼의 영성에 남아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며 "그리고 오늘의 시점에서 양자의 관계를 비교해 볼 때, 카이퍼와 케직 운동 사이에는 서로 수용할 수 있는 부분이 헌신과 성화의 문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