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여기저기서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다. 웬만한 행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달고 나온다. 한국교회가 이번 종교개혁 500주년을 계기로 개혁과 자정을 이뤄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뜨겁다. 실제로 목회자와 교수들 사이에서 그런 움직임과 실천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각 교회에서 평범하게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에게는 먼 나라 얘기다. 많은 성도들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지만, 그저 소속 교회 목회자들의 독려에 기꺼이 동참할 뿐이다. 그들에게 목회자의 권면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것이다. 성도들은 시간과 물질로 '헌신'하지만, 행사의 스포트라이트는 철저히 목회자들에게 돌아간다.

행사 자체를 비판하자는 건 아니다. 면죄부를 팔면서 '구원의 능력'까지 사고 팔던 부패한 교황권과 교회 권력에 맞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치며 뛰쳐나와 '새로운 교회'를 조직한지 500년,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전히 신음하고 있는 교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은 '만인제사장'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세워주지 않는다. 대부분 중대형교회 이야기이지만, '목회자' 또는 '당회'의 지시에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위계 질서'를 갖고 있다.

물론 당회 구성원인 장로를 선출하고 설교권을 가진 목회자를 선임하는 것은 성도들이지만, 성도들의 뜻이 당회에 전달되는 시스템이라기보단 당회가 결정하면 따르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공동의회나 제직회라는 제도가 존재하지만, 당회 또는 목회자의 결정을 추인하는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기에, 그가 '제왕적 목회'를 결심하면 사실상 제어장치가 별로 없다. 일부 목회자들은 자신의 뜻에 의구심을 품거나 반대하는 이들을 설교 도중 공공연하게 정죄하고 저주한다. 그들은 그것을 '특권'으로 여긴다. 그 ‘특권’이 행사되면, 반대자들은 곧 '사탄의 무리들'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 성도들은 '목사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것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한다. 교회에 분쟁이 생기는 것도 달갑지 않다. 그래서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더라도 나서지 않거나, 조용히 교회를 옮긴다. 거칠고 힘든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안식을 찾고 위로를 얻기 위해 온 교회에서까지 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 '감언이설'과 각종 '당근'으로 목회자가 당회원들 '포섭'에 성공해 당회가 하나로 뭉치는 데까지 이르면, 상황은 끝이다. 당회가 아무리 바르지 않은 길로 나아가도, 성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노회는 각 교회 당회원들의 모임일 뿐이요, 총회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당회가 반반으로 나뉘는 교회 분쟁은 (바람직하진 않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나마 민주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섭되지 않는 장로들은 '징계'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담임목사 뜻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부목사들을 포함하면, 당회가 다수결 원칙에 따른다 해도 목회자 측이 승리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왠만한 교회 분쟁은 목회자 측이 절대 유리하다. 심각하고 명백한 범죄가 드러나지 않는 한, 목회자가 쫓겨나는 일은 드물다. 교회가 쪼개지는 최악의 경우라도, 목회자는 생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어느 한쪽의 '수장'으로서 계속 성도들을 거느리며 그렇게 살아간다.

이것이 교회 정치, 특히 장로교 대의정치의 현주소다. 500년 전 개혁으로 마련된 좋은 제도이지만, 악용하는 이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일 뿐이다. 이러라고 종교개혁자들이 피땀 흘려 가며 이뤄낸 것이 아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뜻에 반하는 성도들을 끝까지 포용하고 섬기려 하지 않는 한, 성도들은 수십 년 섬긴 고향 같은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격이다. 징계하고, 욕하고, 저주하는데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렇기에 대놓고 '꼬우면 나가라'는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설치했다는 '3심 제도'도 별 소용이 없다. 노회는 당회의 편이고, 총회는 무력하다. 사실 '3심 제도'라고 볼 수도 없다. 분쟁 당사자들이 판·검사가 되는 ‘1심’ 당회에서 어찌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노회는 그 판·검사들이 배심원이 되는 곳이고, 총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느 교단에서는 '재심재판국'에 '제2재심재판국'까지 생겨났지만, 해결책이 되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그래서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청빙'이다. 목회자의 수준이 곧 교회의 수준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목회자'를 찾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부임 당시 '좋은 목회자'였더라도, 초심을 잃은 채 목회를 '밥벌이'로 여기고, 사명이라는 이름으로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목회자들도 적지 않다. 적지 않은 교회들이 청빙에 실패해 이 같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저 참거나, 옮기거나, 쪼개지거나 셋 중 하나다. 청빙 실패는 대부분 제대로 된 청빙 절차를 지키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원로목사 또는 특정인의 추천이 제도를 앞설 때, 결국 문제가 생겨나는 장면들을 수없이 목격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유독 이러한 '제보'들이 본지에 쇄도하고 있다. 참다 참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 언론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성도들의 의식 수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목회자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구시대적 의사결정 시스템과, '자신의 말'을 하나님 말씀인 것처럼 포장해 전달하는 목회자에게서 어떠한 희망도 찾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교회가 지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전하고, 많은 목회자들이 사심 없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일부 성도들이 울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은혜에 감격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까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는 마냥 피안의 공간이 아니라,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베이스캠프'다. 그러나 세상보다 몇 수 낮은 '진흙탕 싸움'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고 있다. 교회가 합리성만으로 운영돼야 하는 곳은 아니지만, 신앙을 가진 성도들조차 설득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선교와 전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의사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