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했습니다. 이번이 그 마지막 편입니다.

제4회 종로포럼
▲김재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3) 가치체계의 재설정: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이원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노동은 노예들과 종들이 감당하던 업무였고, 이들을 사용하여 온 귀족들이나 왕족들에게는 정당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들에서 마저도, 중세시대에 노예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동일한 형상을 부여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평가가 나온 것은 1520년이다. 루터는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모든 세상 일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노동마저도 거룩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겉으로 드러나는 거룩함에 속지 말 것을 주문했다.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종이라고 하였다. 일반 가정에서 여성들이 감당하는 일이나 신부와 수녀들이 하는 일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을 확장시켰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예정하시고 선택한 백성들을 부르신다. 신앙을 갖도록 중생케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생활의 성화를 위해서 일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성도들은 거룩한 생활에 힘쓰게 된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소명이란 오직 세상을 떠나서 은둔과 고독한 삶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길이라고 왜곡시켜 버렸다. 이에 따라서, 윤리의식도 크게 왜곡되어져 버렸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거룩하기에, 세속사회에서 하는 일은 항상 더럽고 부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은 부패한 세상을 개혁시키지 못하였고, 마침내 수도원 내부에서도 온갖 죄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소명의식을 재해석했다. 루터가 "소명" (Beruf)이라는 개념을 처음 창출해낸 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단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소명의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세상에서 편리하게 살고자 하거나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특권을 누리고자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화는 논리가 아니었다. 영국의 초기 종교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은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과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의 일과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각각 다른 행동들이지만, 모두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나가서 직업을 가지고 노동의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더욱 고취시키는 행동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헌신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도록 원하셨다. 노동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서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게 섬기는 방식이다. 바울 사도의 모범을 통해서, 성도들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살후 3:10)는 말씀을 듣지 않았던가!

칼빈의 소명의식은 제네바에서의 사역과 깊이 연관을 맺고 있다. 처음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에나, 한번 쫒겨 났다가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올 때에나, "이 도시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동료들, 기룜 파렐과 삐에르 비레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추기경 샤도레토에게 보내는 답변서에서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도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에 대해서 강변하였다.

소명의식을 감당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도록 은혜가 각 사람에게서 역사하여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온전히 새롭게 하여 죄의 수렁에서 건져냈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헌신하게 하는 능력이다.

4)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귀천이 없다

노동의 개념과 윤리적 가치평가에 이어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새롭게 배우게 된 개념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교훈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한국에서도 자주 사용하고는 있지만, 모두 다 대학교 이상의 고등학문을 추구하고, 일류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도 실제로 강한 영향력이 있다. 험한 노동에 대한 차별의식이 오랫동안 심화되어져 있다.     칼빈은 성도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부여해 준 위치에 있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두고 싶어하는 자리에 위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릇의 비유를 들어서,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쓸 그릇도 있다 (롬 9:21) 고 하였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일들을 다 알 수는 없다. 칼빈은 우리의 지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무한하신 지혜를 우리의 작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오로지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일 뿐이고, 그 대신에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처지와 본분을 깨달아서 제정신을 차리고 절제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직업이나 지위에 대해서 영적인 중요성과 우월성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평가나 안목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냐를 가지고 평가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의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사람의 인격과 중요성을 폄하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행동의 범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의 욕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직업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떤 직업이라고, 어느 직책이라도 하나님의 평가를 사람의 기준으로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종에는 젊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매우 높이 평가하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그 실상은 마찬가지다.  어느 직업이나 위험과 고통이 수반되며, 누구나 힘들어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대륙을 오가면서 비행기를 조종한 분이 은퇴 후에, 지난 날 조종사로서 직무를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에 대해서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매우 존귀히 여기고 흠모한다. 하지만 어느 마취과 의사로 일하던 분이 환자를 돌보면서 겪어야 했던 긴장감을 설명하는데 필자는 그 하소연을 들으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은퇴한 분들이 자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시금 어린 손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 같지 않은 몸을 가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육체적 고통이야말로 또 다른 체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곳에서나, 노동은 힘들고 고단하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헌터 박사는 현대인들에게서 노동의 중요성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서 마저도 노동에 대한 영적인 가치와 영원한 중요성이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한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고백하는 것과 세상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 사이에 커다란 불일치가 커지고 있다. 노동의 신성함을 잃어버리고 주말을 즐기고자 하는 기독신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참으로 신앙의 역설이자 비극이지만, 동시에 가능성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신자들이 노동과 직업의 존귀함을 회복해야만, 성경적인 삶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경작하고 지켜 나갈 것을 명령하셨다(창 2:15). "경작한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인데, 일하다, 영양을 공급하다, 유지하여 가꾸다는 뜻이다. "지키다"는 단어는 "샤마르"인데, 보호하다, 돌보다, 지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등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술, 음악, 문학, 상업, 목축, 작물 재배와 경작, 법률시행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가족, 집안, 국가, 교회 등 여러 공동체를 건설하여서 인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정착하게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생명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하지만, 구원선을 타고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수행해야만 한다(마 5:14-16).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담겨있는 영적이고 도덕적 축복과 기쁨을 제공하고, 신실한 믿음을 보여 줄 때에 황폐화된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헌신하는 모습, 순수하고 고상한 인품,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품격 등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데, 성도들의 참여 속에서 제시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향기는 매우 독특해서 용기와 생명력이 넘치며, 아량과 지혜로 메마른 영혼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

교회의 지속적인 개혁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원론 전체의 기초로 삼았고, 교회론의 근거로 재설정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핵심으로 손꼽았다. 루터는 은혜와 율법과의 관계를 매우 세밀하게 대조시켰다. 칼빈은 은혜 안에 있는 율법의 용도와 특징을 풀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을 통해서 성도의 것으로 전가시켜주신다는 개념을 강조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죄인에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발동되어진다고 설교하였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확신이 들어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무능력과 부패, 수도원 중심으로 전개된 왜곡된 세계관이 성도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나치게 구원을 판결하는 권위를 장악해서 제도화되고, 세속적인 권력을 사용하면서 전혀 왜곡된 기능을 수행하다가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종은 전혀 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제도들처럼, 교회라는 모임도 역시 죄로 오염되어있다. 교회의 연합체인 교단이나 노회나 지방회나 전국 총회마저도 역시 개혁의 필요성이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통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신앙적 유산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완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 누구라도 안심하거나 방심할 수 없다.

첫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냉소적인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개혁교회에서는 교회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성도라고 하면, 진정한 사랑과 기도를 병행하면서,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셋째, 그러나 무리를 지어서 당파를 만들고, 교회의 분란을 자초하는 행위는 엄히 책벌을 받아야 한다. 넷째, 교회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온갖 교리적 왜곡과 혼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단들과 사이비 기독교를 경계하고, 순결한 복음의 생명령을 회복시켜야 한다. 다섯째, 현대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해야만 한다. 세속적인 방법과 원리를 흉내 내려던 교회들은 심각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세속주의의 영향이 몰려 들어와서 교회가 혼탁해지고 말았다. 신선한 성경적 경건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청교도들의 정결운동과 각성운동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교회를 깨끗하게 하였다. 오늘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갖고 선지자적인 지침을 제공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절대적 권위를 부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지켜 나가야만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지켜주신다 (계 1:4,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