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43장 분석심리학에서 치료의 특징(2)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같은 시기에 태동되었다. 정신치료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완성 궤도에 이르지 아니했으니, 융의 분석심리학도 마찬가지였다. 초창기에 서서히 기초를 다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 있었기에, 치료 초기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경증론은 치료론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당시 신경증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의 신경증과는 다른 정신병을 통칭하는 정도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1. 분석심리학의 신경증 치료

신경증에 대한 이론과 분석치료는 학파마다 차이가 있다. 신경증론은 분석치료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학파간의 치료관을 이해하는 근간이 된다. 신경증론을 이해하는 입장에 따라 학파의 치료관과 분석기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기술하였던 분석심리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신경증의 치료를 고찰함으로 치료관에 이해를 더하고자 한다.

1) 인간을 보는 전체성으로서 분석치료

분석치료는 인간을 보는 관점에 기초해 있다. 분석심리학에서의 치료는 인간을 어떤 존재로 인정하느냐의 관점이나 시각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다. 인간은 생물학적-심리적-사회적 존재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분석치료 역시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융은 인간의 전체성이 실현되는 것에 주목하기에, 분석치료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전체성 회복이라는 데에 기초한다.

융의 전체성 사고(Ganzheitdenken)는 정신의 전체성 뿐 아니라, 생물학적-심리적-사회문화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전체성을 내포하고 있다. 정신의 전체성이란 그 개인의 생물학적, 사회문화적 측면과 불가피하게 결부되어 있다. 다만 융은 인간과 그의 분석현상을 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한다. 인간이 생물학적, 사회문화적이라는 것은 정신(精神)이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심리적인 것이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것임은 당연하다.

정신의 전체적인 관점에서 노이로제는 내적 해리(內的 解離), 자기 자신의 분단(分斷)이다. 이런 분단(分斷)을 강화시키는 모든 것이 병을 만들고, 이것을 완화시키는 것은 건강하게 한다. 자기 자신의 분단이란 의식과 무의식의 분단, 의식에서의 자아와 무의식에서의 '자기'의 분단을 가리킨다. 분단은 마음이 갈라져 정신의 기능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다시 말하면 분단은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의식과 무의식이 갈라지는 현상이거나, 외적인 자아와 내적인 자기와의 분리로 정신이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융은 무의식을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구분하였는데,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원래적인 의미의 무의식은 집단무의식이다.

집단무의식은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인간의 근원적인 유형인 모든 원형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원형은 정신의 뿌리라는 본능에 견줄 수 있는 것으로서 동물의 본능적 기능과도 비길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원형(原型, Archetypus)은 본능의 정신적 측면이지만, 뿌리 깊이 들어가면 정신적인 것과 생물학적인 것의 대극을 넘어서는 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그 여러 원형들은 집단적 무의식을 포괄하는 자기 자신(Selbst), 즉 자기원형으로 대표된다는 점에서다.

그에 비하면 자아(Ego)는 의식의 중심으로서 의식의 영역 외에는 볼 수 없지만, 자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모든 흩어져버린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러한 집단무의식은 정신의 뿌리이며, 인류가 조상 대대로 이어져 공유해 온 경험의 총화이기 때문이다. 이 무의식은 의식에 활동을 불어넣을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창조적 가능성을 지닌다. 그 생명의 원천과 창조적 가능성은 정신의 전체성을 유지하게 만드는 자기원형의 목적적 의미로 나타난다.

2) 노이로제의 긍정적인 측면

융은 노이로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측면을 제시한다. 노이로제란 융에 의하면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그리고 의식의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을 때 생기는 정신의 고통이다. 의식의 자아가 무의식의 자기와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인격의 해리를 일으킬 위험은 커진다. 그 결과 노이로제와 그에 따른 고통이 생기지만, 융은 노이로제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격으로서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했다. 노이로제의 고통은 바로 떨어져 나간 자기 자신을 되찾고 인격의 해리를 지양하여 전체성을 이루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원형의 목적의미(目的意味, Zwecksinn)이다.

융은 노이로제를 "그 의미를 아직 자각하지 못한 마음의 고통"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노이로제는 분석되어야 할 미래지향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이로제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상처에 대한 결과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인 의미 즉 심리 및 정신의 전체성을 지시하는 신호이다. 이런 점에서 융은 노이로제를 자신의 인격의 변화, 성숙,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았다.

노이로제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환자의 무의식의 상태가 밝혀져야 한다. 무의식에 감추어진 정신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소외된 자기를 찾아 실현시키는 문제가 분석의 관건이기에 분석자는 환자의 소외된 것을 찾아 실현되어야 할 것과 소홀하게 된 원인을 발견해 내야 한다. 이것은 노이로제에서 중요한 목적적 의미와도 부합되는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노이로제의 이해에 있어서 목적성이 중요시되는 것은 환자의 가족환경이나 성장배경과도 관계가 있다. 이런 시각에서 융은 환자의 개인생활사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는 아동의 심리장애에 있어서 모자관계의 중요성과 부모의 영향을 지적하면서 아이를 고치려면 부모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융은 개인의 생활사나 과거의 심리적인 상처(Trauma)가 노이로제를 설명하는 전체가 된다는 데는 반대한다. 노이로제의 원인은 분석의 마지막 시기에 비로소 분명해지는 경우가 있고, 그 원인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융은 많은 노이로제가 상처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지만, 모든 노이로제가 결정적으로 어린 시절의 상처에 의해 생겼다는 주장에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분석자들의 과거 지향적이고 인과론적인 사고에 의한 것으로, 이들은 항상 원인 때문에 왜(Warum)라고만 묻고, 이와 똑같이 '무슨 목적으로(Wozu)'라는 본질적 물음에는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다. 이것은 환자에게 흔히 손해를 끼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환자들이 이런 인과론적 물음 때문에 때로는 여러 해 동안 생각해 낼 수 없는 어린 시절의 체험들을 탐색하도록 강요받고, 그에게 당장 중요한 점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소홀하기 때문이다.

반면 융은 이런 심리적 상처(Trauma)의 내용은 이미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만한 태도에서 생겨난 2차적인 현상인 경우가 많다고 하였다. "보통 노이로제는 성격이 병적일 만큼 한쪽으로 치우치게 발전된 것인데, 그 시초를 알기는 거의 어렵지만 어린 시절의 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노이로제의 시작이 실제로 어느 때 부터인가를 분명하게 말하려 든다면, 결국 우리는 제멋대로 판단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노이로제의 원인보다도 어린시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덮어놓고 발병의 원인을 어린시기로 끌고 가는 것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정시기에 노이로제의 원인을 귀착시키는 것은 어렵고 또한 노이로제가 언제 시작되었는가를 찾는 작업이 과연 노이로제의 분석에 실제로 어떤 도움을 주는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융이 분석에 있어서 미래적 관점에 그 중요성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의식의 일방성으로서 노이로제

노이로제는 의식의 일방성(Einseitigkeit)과 관련된다. 노이로제는 자아의식이 외부사회에 전적으로 치우칠 때 일어난다는 점에서다. 이것은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와 동일시할 때 자신의 내적 인격을 소홀히 한 결과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의식과 무의식의 대상 작용에 대한 혼란이지만, 융은 정신현상을 이해함에는 그것의 의미를 동시에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융이 살던 당시에는 인과론적 관찰방식이 압도적이었다. 이에 융은 자연히 의미차원의 목적론적 관찰방식을 강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융은 특히 인생의 후반기에 있는 노이로제 환자는 일차적으로 그 증상의 의미를 자각할 때 치유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만약 갱년기 우울증 환자라면, 흔히 강박적이고 철저한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환자들은 대개 사회생활을 착실히 하고, 사회의 도덕규범을 철저히 지키던 사람이다. 그들은 가족을 위해서 또는 사업이나 사회를 위해서 아내로서 또는 가장으로서 완벽한 봉사를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와 가족과 직장의 기대와 사회적 평가에 철저하게 자신을 일치시켜 오느라고 자기 자신의 개성(Individualitaet)을 살리지 못했다. 그 결과로 그들은 정신적 균형을 잃게 된 것이다.

반면 우울증상이란 의식에서 이용할 만한 심리적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이다. 에너지는 무의식에 정체되고 지금까지 돌보지 않은 내면, 즉 무의식세계가 큰 세력을 가지고 의식을 압박하기에 이른 상태이다. 이때 환자가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 자살관념 같은 것은 자아의식이 한계에 달했음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의식적 자아가 집착해온 사회적 평가, 객관적 기준, 사회규범의 한계를 느끼는 데서 오는 절망이기 때문이다.

이 때의 우울증상은 환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밖으로 향한 그의 시선을 안으로 돌리도록 강요한다. 이것이 그 우울증상이 갖는 목적적인 의미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외적세계에의 적응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내면세계를 소홀히 하여 자신이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그 결과로 나타난 증상이기에 이제 그 우울증은 자신의 내면 세계에로 관심을 갖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들의 우울증은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함으로써 전체성을 이루려는 목적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이러한 의미가 처음부터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은 증상의 포로가 되어 증상의 불쾌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노이로제는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이 가능해진다. 먼저, 노이로제의 증상은 의식의 태도에 변화와 보충을 요구하는 인격성장을 위한 경계신호이다. 그 다음 노이로제는 본능이라는 뿌리로부터 이탈된 상태에서 느끼는 고통이다. 그러므로 노이로제는 본능의 모체로부터 분리된 자아의식을 되찾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이는 집단적 가치관, 시대정신과의 동일시로 인한 자기상실이 원인이자 결과인 셈이다.

이 때문에 분석심리학에서는 세계관을 중요시하는데, 이는 노이로제 원인 뿐 아니라 분석의 결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융은 정신에 있어서 종교의 역할도 중요하게 본다. 종교는 이러한 노이로제, 즉 병적인 인격해리의 위기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여 왔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의 원천인 신화의 세계, 즉 의식의 뿌리인 무의식의 토대, 즉 집단무의식과 연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종교를 소아 강박신경증으로 평가한 것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노이로제에서 분석의 과제는 환자로 하여금 노이로제의 원인을 자각시켜 의식화 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의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화하는 것이지만, 노이로제의 성격에 따라 분석의 중점은 달라진다. 분석심리학에서 인생의 전반기의 인격발달과제는 외부세계, 즉 사회의 적응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때의 노이로제는 주로 사회적응의 실패와 관계하기에 이때의 분석치료는 사회적응의 문제를 주로 다룬다. 이런 것은 노이로제의 증상의 이해에 있어서도 목적의미보다는 주로 원인을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반기의 인격발달 과제는 외부가 아니라 자기의 내부와의 조화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존재의미의 발견, 삶의 의미 발견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다. 이제껏 사회에 적응하느라 자기의 존재를 생각할 겨를이 없던 사람이 인생의 후반기인 중년기에 이르면 갑자기 자기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일어난다. 그래서 융은 중년기를 제2의 사춘기라고 부른다. 이때는 존재의 의미가 곧 삶의 의미가 되거나, 삶의 의미가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에 따라 개인의 삶의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분석심리학의 치료관의 특징에 대하여 기술했다. 분석심리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같은 시기에 태동되었다고 했다. 정신치료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도 완성의 궤도에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칼 융의 분석심리학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이 초창기에 서서히 기초를 다지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 있었기에 치료초기의 상황을 이해해야 했다. 어느 정도의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신경증론은 치료론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 당시의 신경증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의 신경증과는 다른 정신병을 통칭하는 정도의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