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물질주의에 맞선 종교개혁자들의 ‘노동 윤리’

입력 : 2017.10.08 17:12

제4회 종로포럼
▲김재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4. 노동과 직업의 윤리

인류사회에서는 국가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정치적 직책과 정부에 관련된 일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노동이나 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은 멸시하고 천대했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출현한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도, 정치 권력자들의 통치철학, 사회구조적 이념들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매우 천하게 취급하였다. 동양의 모든 사회에서는 유교적 가치개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노동자들은 권력자들이나 국가적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에게 이용을 당할 뿐이었다.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장악한 자들과 학식과 학문을 가진 자들은 고상한 지위와 권위를 향위 했다. 생산자 계급을 경멸하던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도 만들어낸 계급사회의 당위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노동을 감당하도록 격려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직업의 윤리를 제공했다.

1) 노동은 천한 것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몸으로 땀을 흘리는 생계형 노동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도 수도원에서는 노동을 천박하고 비루한 행위로 간주했다. 성직자들은 신령하고 중요한 일에 수종 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만 최상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노동을 하는 자들은 천민으로 취급하였고, 귀족 정치인들은 손을 사용하거나 땀을 흘리는 일을 멀리하였다.

노동을 천하게 취급하고, 노동하는 세상의 직업들을 하찮하게 멸시하게 된 것은 심각한 로마 가톨릭적 이원론과 윤리적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두 다 고대 귀족적 계급사회의 유산이었다. 플라톤 철학자들은 이원론에 빠져 있었는데, 육체를 무시하고, 노동을 경시했다. 영혼과 이성의 활동을 높이평가하고 사람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구분했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이 저속한 것도 아니다
중세시대 수도원 제도 하에서는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를 위해서 묵상이나 기도를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부끄럽고 비천한 일이라고 취급하였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노동이 기도다"(laborare est orare)라는 구호를 내 걸었었고, 수도원 주변의 포도밭을 가꾸기도 했지만,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수도원 영내에서만 노동을 했고, 묵상이나 기도가 더 고귀한 일이라고 구별했다. 수도사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가꾸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노동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감당하던 노동의 대명사는 방 안에서 성경을 사본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출중한 어학 지식을 갖춘 수도사들의 노동으로 인해서, 지금 인류사회는 위대한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1521년, 루터는 「수도원 서약에 대한 반론」을 출판하였는데, 한번 서약한 것을 기본적으로 영구히 지켜야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Luther, Luther's Works, 44:251-400.
 수많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수도원을 벗어나는 양심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독일에 있었던 수도원들이 대부분 해체되어졌다. 루터가 이분법적인 로마 가톨릭의 구분을 비판하였고, 세속적이라고 평가절하했던 일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세상에서 하는 일보다 더 고상하고 높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제기했다.

노동은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비천한 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관념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성도들을 일류가 아니라 이등 백성이라는 식으로 모두 다 얕잡아 보게 하였다. 중세시대 수도원제도 하에서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일상 생활을 위해서 노동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해서 걱정해야한다고 보았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밭에서 땅을 가는 농부가 하는 일을 택한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노동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비천하다고 평가절하하지 않으신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자 휴 라티머(1485-1555)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목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신 분이었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모든 직업과 기술을 터득하는 복을 받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노동의 결과가 어떠했냐보다는 성도들의 노동이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이 저속한 것도 아니다. 사람의 노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만 있다면, 매우 소중한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자신들이 노동한 결과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올렸다 (창 4:2-4). 유대인들은 매년 소출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서 감사 제사를 올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동에 대해서 영예로운 평가를 내리셨다. 친히 노동의 결과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며, 교회 밖에서 하는 모든 생산적 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이웃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행위로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의 가치를 화폐로 계산하고 있다. 급료를 통해서 그 비중을 평가하는 것이다. 돈은 노동의 대가에 대한 수량적 계산이다. 자본주의를 떠 받들고 있는 이념은 결과를 근거로 하는 세속적 가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런 높은 급료를 받는 일에 대해서만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한 물질주의 노동관을 낳고 말았다.

2) 노동의 윤리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의 윤리를 새롭게 제시했다. 자기 집안을 정리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은 급료를 받는 일이 아니다. 이처럼 급료는 없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수고가 많이 있다. 사람의 행위 속에는 성취를 향해서 움직이게 하는 기본적인 동기가 숨어있는데,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려고 움직이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성도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창조적인 표현을 하게 되며, 공공의 선을 창출한다.

노동윤리에 대해서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혁신적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바울의 훈계를 경청할 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촉구했다. 제네바에는 수많은 이민자들, 여행자들이 원래 살던 주민들과 반반 정도 뒤섞여 있었다. 6천여 명이 살던 도시가 두 배로 불어나게 되었고, 우선 급선무는 거주할 주택을 증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프랑스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귀족들도 많았다. 그들은 노동이라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이런 귀족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라고 절박하게 촉구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에서 나온 결론이다.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노동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었다. 맥그라쓰 교수는 트랜퀼리(Vittorio Tranquilli, 1944-1998)가 쓴 「노동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칼빈까지」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가 칼빈의 제네바에서 완전히 바꿔졌다고 평가했다. 노동의 가치를 왜곡한 마르크스 공산주의자들은 소유주가 생산에 기여하는 것이 없고, 노동자들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에서 노동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단순히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행복을 더해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노동에 대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개신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욱 더 풍요롭게 되어진 것은 부산물이다.

노동윤리의 핵심은 스스로 성공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쳤던 노동 윤리의 순수한 지침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하 종교개혁자들이 얼마나 은혜의 신학을 강조했던가를 생각해 보라. 노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전도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역시 헛되고 모순된 세상에서 노동의 기쁨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전 2:24)는 것이다. 역시 전도자의 가르침에서도 자기 성취를 즐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해 아래서 살도록 허락하신 한계를 인정하고 깨우칠 때에만 진정한 기쁨이 주어진다. 기독교 노동윤리의 핵심은 사업의 성공을 자기성취라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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