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정
▲영화 초반부에 이정출이 검거하려다 자결한 의열단원. 이정출의 절친한 친우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이정출은 이렇게 자신에 의해 희생된 친우들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다.
추석 명절을 맞아 영화 <밀정>이 TV에서 방영된 가운데, 1년 전 개봉 당시 본지 칼럼니스트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신원)의 두 차례 칼럼이 재조명되고 있다. 다음은 그 2편.

영화 <밀정(2016)>은 친일 경찰 이정출(실존인물 황옥)이 의열단장 정채산(실존인물 김원봉)과 의열단원 김우진(실존인물 김시현)의 반간계(反間計)를 통해 항일투사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세밀한 심리묘사를 통해 개연성 있게 그려내려 노력한다.

자신이 팔아넘기고, 검거하고, 혹은 죽는 데로 몰아가기까지 한 과거의 친우들과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독하게 떨쳐내지 못한 이정출의 마음은, 마치 두 개의 태풍 속에 휘말려 전복되기 직전의 상황에 놓인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

그래도 이정출은 돌아갈 곳이 있었다. 국가, 민족, 동포라는 가치는 비록 변절자라 하더라도 회심할 수 있는 기회, 과거의 죄과를 현재의 공적으로 덮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물론 거기에는 이용가치라는 계산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작중 정채산의 대사는 이를 반영한다. "지금 우리한테는 시간도 사람도 없소." 만일 이정출이 의열단의 폭탄거사에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십중팔구 반간계의 대상이 아니라 척살의 대상으로 지목됐을 것이다. 늘 절박한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이유로 불가피하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의열단의 폭력투쟁에서는, 필요할 때 변절자조차도 포용하고 이용하는 일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떠하였던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신앙의 정신 위에 선 한국교회는 향간(鄕間)과 내간(內間)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친일부역 목회자들의 회개와 포용 문제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취하여야 하였던가?

◈변절자의 회심: "꼭 다시 보세"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이정출의 회심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정출로부터 경성으로 반입한 폭탄을 건네받은 의열단원이, 조선총독부 폭탄거사를 위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묻는다. "저 혹시 (의열)단장님께 전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이정출의 대답은 간단하다. "꼭 다시 보세." 이 말은 의열단장이 아닌 거사를 위해 떠나는 의열단원에게 건네는 말이다.

영화에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정출은 그 의열단원이 곧 거사에 목숨을 걸 것을 알고 있거나 최소한 짐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죽는 길을 가는 줄 알면서도 다시 보자는 말을 함으로써 이정출은 자신이 그들의 동지이며, 거사의 성공을 염원하는 동시에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밀정
▲영화 마지막, 의열단원에게 폭탄을 건네는 이정출(왼쪽). 드보르작이 작곡한 슬라브 무곡의 선율이 인상깊다.
이 마지막 장면의 배경음악은 이 대사의 비장미를 극대화한다. 배경음악은 드보르작(Antonin Dvorak, 1841-1904)의 1886년 출판작인 작품 72번 슬라브 무곡 제2집(Danse Slave No. 2, Op. 72)이다.

드보르작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체코 민족이 오스트리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염원하며 민족주의 음악활동을 주도하였다. 체코 민족의 독립을 위한 염원과 역사적 애환을 담은 선율이, 거사에 나서는 의열단원의 운명과 이정출이 느끼는 안쓰러움과 맞물려 거부할 수 없는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마지막 대사와 슬라브 무곡의 조합을 통하여 이정출은 한민족에 의해 과거의 매국행위를 용서받는 '돌아온 탕자'로 거듭나게 된다.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한국교회도 내부에 일제의 간자 역할을 수행하는 변절자들을 다수 끌어안고 있었고, 이로 인해 신사참배를 정식으로 가결하는 우(愚)를 범하였다. 오직 동아기독대(현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 즉 침례교단)만이 목회자 전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1942년 교단 전체 폐쇄라는 비운을 맞이했고, 나머지 교단들은 모두 신사참배 요구에 굴복하였으니 거의 한국교회 전체가 신사참배 압력에 굴복하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해방 후 신사참배 목회자들과 친일부역 목회자들에 대한 역사청산, 혹은 신앙갱신 운동이 수행돼야 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역사는 우리의 염원대로 흘러가지 않으며, 이는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 뒷처리 과정에서 다시 한번 확인된다.

◈교회의 변절자: "왜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교회의 모든 행사는 당연하게도 성경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수행돼야 한다. 성경의 측면에서 봤을 때, 친일 신사참배 지도자들에게 어떤 처분을 내려야 했을까? 필자는 신사참배 문제를 접할 때마다 고린도전서 5장의 사례를 떠올린다. 여기에는 심각한 윤리적 죄를 저지른 교인의 출교 문제가 언급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쳐야(고전 5:2)" 하거늘 왜 그리하지 않았느냐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질타한다.

그렇다 해서 바울이 죄지은 자를 마치 원수 대하듯 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 또한 "그 일 행한 자"의 영혼에 대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즉 바울은 여전히 그 영혼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나, 교회 전체를 위해서라면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밝힌다. 이는 마치 전염병이 돌기 전에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키는 조치와 같다. 공동체 전체를 살리기 위해 과감하게 암적 존재를 도려내는 것이 바울의 결정이었다.

심각한 육체적 죄악에 대한 바울의 대응이 이처럼 단호하였던 바, 이방 신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영적 간음에 대해서도 태도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숙고해 본다면, 신사참배에 찬동한 우상숭배자의 영혼이야 하나님께서 판단하고 심판하시겠지만, 그들을 교회 안에 용납함으로써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고전 5:6)"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이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교회사적으로는 어떠하였는가? 사도 바울이 우려한 일을 막기 위해 교회가 최선을 다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에 교훈을 줄 만한 적절한 사례는, 고대 로마제국 당시 초기 기독교 교회사에 등장한다.

밀정
▲네로의 기독교 박해장면을 그린 그림.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잔혹하고 변태적으로 죽이기 위한 방법을 여러 개 고안하였는데, 로마의 기독교인 여성들은 다수가 그림에서처럼 달리는 소에 묶여 콜로세움 바닥에 몸이 갈려져 죽었다. 이 형벌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악녀 디르케(Dirce)의 심판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말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먼저 네로의 박해(Neronian persecution)를 떠올린다. 네로의 박해가 워낙 비열하고 잔혹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인상을 주어서 그렇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늘 조직적이고 거국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네로가 기독교 박해를 개시할 당시에도 갈리아(Gallia, 오늘날의 프랑스)나 히스파니아(Hispania, 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 지역 지방관들은 네로의 집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이 많았으므로, 네로의 박해도 주로 수도 로마 지역을 중심으로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네로의 박해 이후로는 로마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든 기독교인으로 붙잡히는 경우 순교를 당하는 것이 일반적이긴 했지만, 로마제국의 개별 지방정부들은 때로 기독교인들에 대해 방관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폼페이(Pompeii) 지역 베수비우스(Vesuvio) 화산의 대폭발을 보고한 문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 61-113)가 비두니아와 본도(Bithynia-Pontus, 현 터키 북부의 흑해 해안지역) 지역의 특별지방관을 역임할 당시 트라야누스(Trajan)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자. 로마 지방정부가 기독교인들을 사냥하듯 추적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고발에 의하여 검거했고, 고발 후에도 즉결처형이 아니라 예수를 저주하고 부인할 기회를 세 번 준 뒤 배교하면 풀어줬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로마 정부가 추적했던 인물들은 주로 교회 지도자들이었으며, 일반 신자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3세기 중반까지는 대략적으로 이런 분위기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조직적이고 거국적인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3세기 중반 데키우스의 박해(Decian persecution)에서 비로소 목격된다. 주후 248년, 지방군 사령관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데키우스(Decius, 201-251)가 황제로 추대되고, 이듬해인 249년 제30대 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한다.

당시 로마제국은 제정일치 국가는 아니었지만 권력자들이 그리스-로마 신들과 선대 황제들의 비호를 힘입어야만 권력을 공고하게 하고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로마의 황제 숭배 종교(Roman imperial cult)는 기존 그리스-로마 신화의 신들뿐 아니라 위대한 로마 황제들도 죽은 뒤 신의 반열에 오른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데키우스 황제는 수도 로마를 비롯한 제국 전역, 그 가운데서도 특히 로마제국 동부 소아시아(Asia Minor)와 팔레스타인(Palestine), 그리고 북아프리카 이집트(Egypt) 지역에서 신들에게 봉헌하는 대규모 희생제사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이런 거국적 희생제사의 목적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신들의 비호를 받아 자신의 집권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목적이 반영돼 있고, 둘째는 각 지역의 종교적 이념들을 로마화하여(Romanize) 제국 전역의 정치∙문화∙사회적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의도를 담아내고 있었다. 이는 애초에 기독교인들을 말살하겠다는 의도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방신, 그것도 "죽은 자"인 선대 황제들에게 봉헌되는 희생제사에 참여하고 "그 제물을 함께 먹는" 일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 간음으로 규정되어 철저하게 금지된 것이었다.

밀정
▲로마제국 곳곳에는 사진의 유적과 같이 죽은 황제들을 신으로 섬기는 신전들이 건립되어 있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황제숭배 제사에 참여하여 경배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자들에게 리벨루스(libellus)라는 제사참여 증명서를 발부했다. 이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투옥되고, 고문을 받고, 잔혹하게 공개처형을 당했다. 당시 카르타고(Carthage) 교회 감독은 저 유명한 키프리아누스(Cyprian, 200-258)였는데, 그는 당연하게도 황제 숭배 제사 참여를 금지시켰다. 이에 교인들의 반응은 다음의 네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로 박해를 두려워하여 제사에 참여하고 우상숭배한 자들, 둘째로 박해를 두려워하나 우상숭배에 직접 참여하는 것도 꺼려져 돈을 주고 리벨루스를 산 자들, 셋째로 박해를 두려워하여 외딴 지역으로 몸을 피한 자들, 넷째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다가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순교하기도 한 자들이다. 데키우스의 박해는 그가 251년 고트족(Goths)과의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하면서 끝났으나, 교회는 박해와 배교의 여파로 심각한 내홍을 겪게 된다.

박해에서 살아남은 키프리아누스 감독은 배교자들 중 많은 수가 회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오려 하자 큰 고민에 빠진다. 어디까지 배교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배교자들을 다시 교회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가 교회 내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교회의 권위와 권능을 크게 신뢰했던 키프리아누스는, 희생제사를 드린 배교자라 할지라도 교회가 가진 용서의 권한을 힘입어 교회에 다시 가입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들은 키프리아누스의 결정이 배교행위를 포용하는 것이라고 반발, 기존의 교회공동체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다.

키프리아누스가 교회론에 대해 깊은 통찰과 학식을 가진 신학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도 순교로서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런 그가 당시 한 교회 감독으로서 정권의 박해에 시달리는 교회를 건사하기 위해 겪어야 했을 고민 역시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결정이 교회의 신앙의 순수성을 심각하게 흐려놓은 사실이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회는 데키우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세를 보존하는 데는 성공하였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신앙의 질적 저하와 분열이라는 고질적 문제를 끌어안게 된다. 로마시대 기독교 박해사의 권위자인 생트 크루아(G. E. M. de Ste. Croix)는 데키우스 박해를 기점으로 기독교회가 그 이전에 비해 뚜렷한 세속화의 경향을 보인다고 진단한다.

밀정
▲1938년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장로회 총회 대표들의 평양신사 참배 장면.
◈누룩의 제거: "참배합시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 거요"

다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 문제로 돌아와 보자. 성경에 가르침에 따른다면,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친일 부역에 앞장선 밀정과 같은 지도자들을 교회 밖으로 출교했어야 했다. 문제는 193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들이 교회의 재산과 교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는 점이며, 이런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변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신사참배 가결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친일부역에 앞장섰던(국방헌금 모금, 일왕 및 제국군의 무운장구기도회, 헌금으로 전투기 및 기관총 등을 구매하여 총독부에 헌납, 예배 중 동방요배의 의무화 등) 몇몇 지도자들이 반민특위(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에 회부되기는 했지만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정인과 목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사참배 부역 목사들이 교회의 어른 노릇을 계속하니, '출옥성도'들이 고려신학대를 세워 분열해 나간 일이 오히려 당연히 여겨져야 할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기독교회사의 교훈을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과 세속화, 성장 제일주의의 누룩은 사실상 이 시기에 심겨진 것이라 보아도 될 것이다. 이미 이 때부터 세속의 안위 및 이익과 타협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DNA로 결정되어버린 것이다.

밀정
▲이정출과 의열단을 배신한 변절자들을 잔혹하게 처단하는 장면들.
사실 한국 사회 전반이 친일파 문제 청산에 실패한 마당에 도토리 키재기 같은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만, 그래도 영화 <밀정>은 민족의 입장에서 무엇이 역사적으로 옳았고 그른 것이었는지, 무엇이 더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일이었는지 밝혀주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그저 막연하게 감정적으로만 그 암울함을 전해들은 후세대들에게 <밀정>이나 <암살>과 같은 영화는 적어도 역사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교회 입장에서는 부러운 일이다.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든 민족의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는 장면을 보여주려 애쓴다. 이정출은 그나마 이용가치가 있기에 회심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외 변절자 밀정들은 모두 가차없이 "의열단의 이름으로" 즉결처형에 처해진다. 실제 역사에서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좌절되었던 폭탄거사도 영화에서는 결국 성공한 것으로 그려진다.

밀정
▲처단 직전 김우진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의열단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척살한다.”
이렇듯 역사적 사실을 잠시 변개해서라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정의인지를 알리려는 감독의 노력이 눈물겹다. 관객들은 이런 정의를 가상적으로나마 눈으로 목격함으로써 위로와 카타르시스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통해 한국교회의 역사적 치부를 돌이켜 보며, 필자는 2005년 개봉된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작품인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의 결말부에 나온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자 살라딘(Salah ad-Din Yusuf ibn Ayyub, 1138-1193)의 대군에 의해 함락 직전까지 간 예루살렘 왕국의 부서진 성벽 앞에서, 십자군 지휘관 발리안(Balian of Ibelin, 1143-1193)과 예루살렘교구 대주교(archbishop) 헤라클리우스(Heraclius, 1128-1190)의 짧은 대화가 뇌리에 깊게 남는다.

밀정 킹덤 오브 헤븐
▲영화 <킹덤 오브 헤븐>. 배교한 후 회개하면 된다는 대주교 헤라클리우스(맨 왼쪽)의 말에 한심함을 감추지 못하는 발리안(맨 오른쪽).
대주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발리안에게 다음과 같이 권한다. "이슬람으로 개종합시다. 나중에 회개하면 될거요(Convert to Islam. Repent later)." 이에 발리안은 진정으로 한심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반어적으로 대답한다. "종교에 대해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는군요. 주교님(You've taught me a lot about religion, Your Eminence)."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녕 바라는 것은 헤라클리우스와 같은 '박쥐'의 입장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적의 밀정을 처단한다"는 신앙의 정의구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