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서 배운 하나의 기도 “주님, 제발 도와주세요!”

입력 : 2017.10.05 11:33

지하교인 자녀가 강인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기까지(上)

북한 철조망
한에서 가족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 사투를 벌이다 중국으로 탈출, 가족 전원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나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감옥에서 가혹한 고문과 인간 이하의 학대를 당하다 기도 응답으로 가족과 함께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박해 받는 교회와 성도를 돕는 오픈도어선교회가 최근 밝힌 한 탈북 여성의 간증이다. 감옥에서 자신과 가족이 그리스도인임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남편은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자녀들은 지금도 3개 국가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이 탈북 여성은 자신의 이야기가 많은 이에게 희망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신실한 북한 지하교인이었던 어머니의 대를 이어 지금은 누구보다 강인한 신앙을 갖게 된 이 여성의 간증을 오픈도어선교회의 자료를 제공받아 소개한다.

내가 23살에 결혼을 했을 때, 어머니는 마침내 말문을 열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임신할 수 없는 여자였는데, 위험을 감수한 끊임없는 기도로 나를 가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내 몸은 약해져 갔지만, 내 영혼은 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의 어머니와 나의 기도에 응답했는지를 기억할 때 나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나의 기도와 열망은 여러분들이 나의 지나온 이 이야기를 통해서 희망의 강물을 마음껏 들이키는 것뿐입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겨우 몇 살 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내 귀에는 아직도 사이렌 소리와 비행기의 굉음이 생생하고, 내 눈에는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섬광이 생생합니다. 또한 그때 내가 업혀 있었던 아버지의 등을 여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룻밤을 더 피신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저와 아버지, 어머니를 전쟁 중에서 살아남게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우리 마을에는 교회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폭격에도 폭파되지 않았지만, 전쟁이 끝난 직후 건물의 일부가 무너져 학교로 개조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다녔던 학교였습니다. 당시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뭔가 비통해 있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고 매일 거실에서 여러 번 기도했습니다. 이때마다 아버지와 저는 이웃들을 경계하기 위해 보초를 서야만 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우리는 기침 소리를 내었고 어머니는 기도를 멈추곤 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웠던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려움이다"라고 말씀하고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해야만 한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어머니는 하나를 빠뜨렸는데, 어떻게 기도하는 것인지는 설명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머니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기도는 "하나님! 하나님! 주님! 주님! 도와주세요!"라는 외마디뿐이었습니다. 그다음 말은 너무 빨라서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로 아버지는 어머니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했는데, 그때는 눈이 내리는 날에도 어머니는 밖에 나가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기도는 저희 어머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머리를 감고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기도하곤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장 깊은 경외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만 한다"고 말씀했는데, 어머니가 말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의 딸아이는 할머니에게 그렇게 하나님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왜 그를 직접 찾아가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대답은 "언젠가는 내가 찾아갈 거야" 였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때문에 나는 다른 북한 사람들처럼 주체사상에 심취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특히 어머니는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말씀해 주었는데,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제 강점기(1910-1945)에 결혼했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이전 한 번의 결혼 이력이 있었지만 아이를 갖지 못했고, 어머니 또한 출산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어머니에게 예수님께 기도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해 주었고, 이 말을 믿고 어머니는 8년 동안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후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완전한 복음을 제게 설명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20대 초반 제가 결혼했을 때,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제가 믿음의 선물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한 것처럼, 정말 저의 인생도 어려움투성이였습니다. 6명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중 2명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남편은 공장에서 노동일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나라 경제가 어려워져 더 이상 일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제가 가족을 돌보아야 했는데, 안 해본 일이 없이 공장일, 암시장 일 등 모든 종류의 일을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한 번은 암시장 일로 불법으로 기차를 타게 되었는데, 기차가 멈출 때 몰래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기차에 끼어 심하게 다치기도 했습니다. 계속된 무거운 노동과 부상, 삶의 고난은 저의 척추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등을 곧게 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무거운 냉동고기를 산으로 옮겨 암거래 시장에 파는 일 등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손과 손가락 발톱, 손톱은 망가져만 갔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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