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에르케고어 | 박병덕 역 | 비전북 | 272쪽 | 18,000원

쇠렌 키에르케고어(Kierkegaard, 1813-1855)는 덴마크의 철학자 및 기독교 사상가다. 그는 1813년 5월 5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Copenhagen)에서 일곱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1830년에 코펜하겐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아버지의 소원에 따라 신학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는 신학보다는 철학, 문학, 역사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그는 1848년 부활절에 그의 성격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종교적(신비적) 체험을 했다. 이 체험 후에 쓴 종교적 작품이 바로 《죽음에 이르는 병(1849년)》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아버지 미카엘 페데르센 키에르케고르(Michael Pedersen Kierkegaard)로부터 '우울'이란 유산을 물려받았다. 거기는 성격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이 함께 포함된다.

키에르케고어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 중의 하나는 소녀 레기네 올센(Regine Olsen)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키에르케고어의 나이 24세였고, 올센은 불과 14세의 소녀였다. 두 사람의 사랑은 3년 동안 지속하였으나, 약혼 후 1년 만에 키에르케고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를 파기함으로써 비극으로 끝났다.

키에르케고어는 그의 모든 작품을 그녀에게 바쳤고, 죽기 전 모든 유산을 그녀에게 주라는 유서를 남겼다.
그는 당시 덴마크 국가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제도화된 교회의 '거세된 기독교'는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라고 믿었다.

그의 사색을 일관하는 근본 문제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기독교의 본질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절대적 차이에 두고서, 신앙이란 이성으로는 다다르지 못하는 역설(패러독스·Paradox)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변증법적 신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저작생활을 하면서 평생을 독신으로 보면서 1855년 11월 4일 마흔넷의 나이로 프레데릭 병원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1849년에 발표한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은 그의 대표 저작이며, 부제는 '교회의 깨달음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인 심리학적 탐구'이다. 이 책의 내용은 제1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와 제2부 '절망은 죄이다'로 구성되어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이 저서에 대해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중요한 저서를 1848년 3월에서 5월까지 단 두 달 만에 저술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저술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천재성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가 장기간에 걸쳐 이 책의 주제에 관해 사색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는 '절망이 가진 본성과 의미'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저술하기 10년 전부터 그를 사로잡아 왔던 문제였다. 그는 "현대는 절망의 시대이다"고 쓰고 있다. 키에르케고어는 '코펜하겐의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절망에 빠져 종교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가진 사상가였다.

키에르케고어는 인간이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종합이요,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이라고 말한다. '자유와 필연의 종합'인 인간의 과제는 자기가 되는 데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직 신(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자기가 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된다는 것은 유한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무한적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실로 하나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 형태는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 것, 즉 자신을 제거하려는데 있다. 그는 이것을 '연약함'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형태는 절망적으로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데 있다. 그는 이런 형태를 반항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반항의 형태는 연약함의 형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연약함의 형태로 환원될 수 있다.

절망은 결국 사람의 연약함에서 기인한다. 연약함에 매여 있는 것이 바로 절망이다. 얽매임이 강할수록 절망도 깊어진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죄는 강화된 연약함 혹은 강화된 반항이며, 죄는 절망의 강화이다.

그러나 절망이 강화될수록, 즉 죄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구원의 가능성도 커진다. 왜냐하면 절망이 강화될수록 결단의 중요성에 대한 자기의 이해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불행은 그리스도로 인해 넘어져, 계속해서 넘어진 상태로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6)"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갖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걸려 넘어짐이다.

가장 낮은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의 문제 전체를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두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는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나는 믿지 않지만,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겠다." 이것이 걸려 넘어짐의 형태라는 것을 대다수의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중립적이라는 것이 걸려 넘어짐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의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가 현존했다는 것은 모든 실존과 관련된 결단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선포되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의견도 가지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걸려 넘어짐이 된다.

두 번째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부정적이지만, 수동적인 형태를 띤다.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해결하지 못하고 달리 바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고 믿을 수도 없다.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그대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이 실제로 모든 물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물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교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넘어진 사람은 그림자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 그는 항상 이런 결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의 삶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걸려 넘어짐의 마지막 형태는 적극적이다. 이 형태는 그리스도교를 비진리라고, 거짓이라고 선언한다. 이런 걸려 넘어짐은 그리스도교가 역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죄와 죄의 용서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게 된다. 키에르케고어에 의하면 이런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이고, 그리스도를 악마가 꾸며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따라서 이 형태의 걸려 넘어짐은 죄가 최고도로 강화된다.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믿음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믿음의 표현으로서 예배를 받는 자와 드리는 자 사이에 무한한 질적 심연이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키에르케고어의 저작 중 그 의도와 서술이 가장 알기 쉬운 책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으며, 대표작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심리를 깊이 통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관찰은 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감명을 주는 부분이다.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불행, 죄보다 훨씬 더 큰 불행은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져서 계속해서 걸려 넘어진 상태로 있는 것이다. 문제는 단순하다. 《성경》은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들은 교활한 협잡꾼 패거리이다. 우리는 말씀을 깨닫는 순간, 즉시 그에 따라 행동할 의무를 갖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는 척한다." -쇠렌 키에르케고어

◈더 읽어볼 책

쇠얀 키에르케고어 지음, 임춘갑 옮김, 《이것이냐 저것이냐》, 다산글방, 2008.

월터 라우리 지음, 임춘갑 옮김, 《키에르케고어 평전》, 다산글방, 2007.

김종두 지음,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애드 ,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