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필립 얀시, 폴 브랜드 | 생명의말씀사 | 286쪽 | 15,000원

교회: 기능적 존재

최근 한국의 신학서적들을 보면 그 주제와 방향이 매우 다양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경건서적들이 다양성을 이루기에는 거리가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서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먼저 주제 면에서 과거 경건서적들의 종교행위 중심적 신앙생활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엿보인다. 즉, 성경 본문을 언급하지 않는 점, 종교적 귀결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결론들이 열려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둘째로 형식 면에서는 완전히 기존 경건서적의 패턴을 극복했다. 성경 본문을 주제로 하거나 해석,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의학적 에세이 방식을 취하면서 성도의 본질과 교회의 본질들을 독자가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신비

본서는 폴 브랜드와 필립 얀시의 공저로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필립 얀시는 등장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도대체 왜 필립 얀시가 공저자로 소개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상상에 맡기는 듯하다.

그 이유는 본서 전체의 이야기는 한센병 의사 폴 브랜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고, 3인칭이 아니라 1인칭으로 글을 써 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신비는 본서를 통해 우리의 인체가 얼마나 신비로운가를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세포, 뼈, 피부 등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일들을 수행해 내고, 그 몸의 주인이 되는 자각과 인지가 한 번도 알아주지도 알아줄 수도 없지만, 이름도 빛도 없이 충실히 자신의 일들을 수행해 냄으로써 그 몸의 생명이 유지될 뿐 아니라 불편함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우리 1분 1초의 삶이 바로 이들의 보이지도 알 수도 없는 신비로운 헌신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유기체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Piaget)는 그의 저서(어린이 지식의 근원)에서 현재까지 가장 탁월한 유기체론이라고 부르는 발달 이론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분야를 발달 인식론(genetic epistemology)이라 부르고, 그의 심리학은 논리학이나 수사학, 생물학의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있다.

피아제가 여러 영역의 연구를 인식론에 의해 다룰 수 있다고 보게 된 것은, 수학이나 논리학이 개념의 추상성을 가장 많이 얻어진 지식 체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학과 논리학의 추상적 그 근원을 감각 운동 형태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감각 운동 형태의 행동은 추상적 논리적 사고와 같이 인식론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유기체는 선천적인 방사 능력을 갖고 태어날 뿐 아니라, 점차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이러한 능력 중 하나가 조절(accommodation) 능력이며, 이 능력은 환경의 현실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변경시키는 능력을 가리킨다.

즉 하나의 기능 동화(assimilation)는 환경적 자극을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조정하는 경향을 말한다. 피아제에게 있어 이 두 기능에 의한 적응 과정은 결국 특정한 환경이나 선천(先天)적인 동화, 조절 능력이 상호 작용한다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교회를 유기체라 표현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교회는 현재 현실과는 동떨어진 독립체가 되어 버렸다. 또한 자기를 조절하는 능력이 아니라 자기를 합리화하는 능력이 더 발달되어 있다. 더욱이 교회를 유기체라고 부르면서 마치 자신이 다니는 개교회에 한해서만 유기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지칭할 때, 개교회를 두고 지칭한 적이 없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개교회가 아니라 보편교회를 지칭하고 있으며, 나아가 현대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우주창조를 하나님의 성전창조로까지 보고 있다. 즉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교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부분의 한국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의 유기체 개념이 과연 성경적 개념인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본서의 저자들은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까지 접근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말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절대 교회라는 단어, 성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몸의 기능들을 설명해 가면서 우리 인간(성도)들이 모인 조직(유기체)이 어떤 유기적 기능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저자들은 유기체를 개교회가 아닌 보편적(우주적)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능(행위)

본서는 '기능'을 말하고 있다(그동안 그리스도교는 존재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아마도 결정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의 영향이 클 것이다). 현재 나는 '존재'와 '기능'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현실은 존재의 신학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론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물론 헤겔의 변증적 합의에 100%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마치 길이를 재는 단위와 방식이 무게를 재는 단위와 방식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처럼, 존재와 기능 중 어느 하나가 상대를 흡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고, 굳이 어느 하나가 흡수 통합하려고 할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현재 그리스도교는 '기능(행위)'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며(기능적 신관이 본래 히브리 신관이었다), 본서가 기능을 통해 존재를 말하고 있는 점에서 현재 한국교회가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의 실천(행위)을 통해 경험하고 깨달은 이야기들은 더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제자삼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