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도 지울 수 없는, 영혼 깊이 새겨진 신앙

입력 : 2017.10.01 18:28

[박욱주의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下)>

살인자의 기억법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주인공 김병수(설경구 분)와 딸 은희(설현 분)의 행복을 위협하는 것은 알츠하이머병 그 자체라기보다, 이 병으로 인해 왜곡되어 되살아나는 김병수의 어두운 과거 기억이다.
◈기억의 내용: 신앙의 기억은 왜 특별한가?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자아내는 우울한 분위기의 원천은 무엇일까? 엄밀히 말해 알츠하이머병 그 자체는 아니다. 병 때문에 주인공 김병수(설경구 분)가 사랑하는 딸과 보내는 소소하고 행복한 일상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부녀 간의 가족애를 더 확고하게 해주는 요소이지, 슬픔과 우울함을 자아내는 주원인은 아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극도로 차갑고 우울한 감정을 전달하는 주역은,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왜곡된 상태로 엿보이는 김병수 본인의 기억의 편린들이다. 그의 기억 내용은 어린 시절 겪었던 가정폭력, 그로부터 유발된 수많은 살인의 충동과 실행, 그리고 아내의 불륜과 배신 등으로 채워져 있다.

이 부정적 기억들이 알츠하이머병을 통해 심하게 왜곡되고 뒤엉키면서, 김병수의 삶은 한없이 망가져 간다. 여기에 차갑고 암울한 분위기의 공간적 배경까지 더해지면서 영화가 연출하는 우울함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이로써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심적 상태, 그 중에서도 자괴감 및 절망감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이 병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잘 알지 못하는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고통을 일부나마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과연 모든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심령이 이처럼 절망의 나락에 빠지게 되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극한 비관과 절망의 심정은, 신앙으로부터 유래되는 구원과 천국에 대한 소망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살인자의 기억법>이 보여주는 것 같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거기서 영혼 구원의 단서를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할 듯하다.

살인자의 기억법
▲김병수의 알츠하이머병이 발병하는 계기가 된 교통사고. 그가 마지막 살인을 자행한 직후의 일이다. 이처럼 발병 이전 김병수의 삶에는 살인과 증오라는 어둡고 악한 기억이 가득하다.
사람의 기억에 대한 기독교의 고전적인 신학적 성찰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최근의 면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구원의 소망을 갖고 신앙생활에 전념한 이들에게는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투쟁 과정이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묘사된 것과 사뭇 다른 방향으로 진행됨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억의 감퇴와 상실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믿음과 소망을 가능한 한 최대로 유지한 채 투병에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발병 이전의 삶이 담아내고 있는 기억 내용들 때문이다. 말씀의 지식,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교회활동과 헌신, 천국에의 소망 등으로 기억의 공간을 채운 이들의 실제 투병 모습은, 신앙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환자들의 투병 모습과 확연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이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구원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수긍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기억과 영혼: 기억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보관되는가?

고래로부터 서구에서는 그리스 신화와 플라톤(Plato, 427-347 BC)의 영향으로 '기억(μνήμη, mneme)'을 대단히 중시했다. 특히 플라톤 철학은 영혼이 진리의 지식을 얻게 되는 궁극적 방편이 기억이라고 가르쳤다.

플라톤이 이처럼 기억을 중시한 데는 그의 환생 이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플라톤은 사람의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를 왕복하면서 환생을 경험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육체를 덧입기 전 이데아의 세계에 있을 때 알고 있던 지적(영적) 세계의 지식, 즉 존재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플라톤의 철학(φιλοσοφία, philosophia)에 대한 정의는 여기에서 나온다. 철학은 영혼이 육체를 덧입기 전에 알고 있다가 육체를 덧입으면서 망각하게 된 진리의 지식을 되살리는 것, 즉 '기억해 내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정의했다. 물론 이를 기억해 내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금욕적인 생활, 존재의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변증법적 물음, 그리고 덕의 실천 등이 요구된다.

플라톤의 기억에 대한 개념 정의는 무려 7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초기 기독교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단, 어거스틴의 기억에 대한 개념정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의 말씀의 진리를 보다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한 의도로 수행된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기억 개념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살인자의 기억법
▲어거스틴은 자기 영혼을 진리의 기억으로 충만케 하는 데 일평생을 바친 신학자다.
어거스틴은 <고백록(Confessionum)> 제10권에서 기억의 종류를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는 물질세계에서 취득한 감각적 경험에 대한 기억. 이는 곧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일상적 삶의 기억이다. 둘째는 감각적이지 않은, 개념 자체에 대한 기억. 이것은 주로 언어학, 수학, 미학 등에서 가르치는 학문의 원리들을 의미한다. 이 학문의 원리들은 일상적 경험들보다 조화롭고, 안정적이고, 불변하며, 고등한 기억으로 분류된다. 셋째는 사람의 영혼이 타락 전에 아담 안에서 갖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의 기억이다. 두말 할 것 없이 세 번째 기억이 영혼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기억의 층위를 재차 두 단계로 구분한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 둘째는 학문적·일상적 기억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기억은 특성상 서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나님에 대한 기억은 한 번 기억나면 절대 잊혀지지 않는 지고한 진리의 기억이다. 대신 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한 속죄, 그리고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영감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반면, 학문적, 일상적 기억은 수시로 망각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돼 있다. 대신, 속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감을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영혼 속에 적재해 둘 수 있다.

어거스틴은 모든 기억이 몸이 아닌 영혼에 보관돼 있다고 믿었다. 몸은 일상적 기억을 받아들이는 관문일 뿐, 그 자체가 기억을 보관해 두는 장소는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어거스틴의 기억에 대한 논의를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기독교 신학 역사상 최초의, 고도로 체계화된 기억 이론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 이후 정통 기독교 신학이 내놓는 기억에 대한 모든 논의는 어거스틴의 기억 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어거스틴의 기억에 대한 논의가 갖는 주된 의의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기억이란 망각될 수 있는 기억과 망각될 수 없는 기억이 있으며,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수여된 진리의 기억은 망각될 수 없는 기억에 속한다는 믿음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의는, 기억이란 몸이 아닌 영혼에 보관된다는 믿음을 정립했다는 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도 어거스틴의 견해에 바탕을 두고 기억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아퀴나스의 기억에 대한 논의는 육체의 죽음 이후를 주로 논의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 변증의 도구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채택했기 때문에, 몸의 죽음 이후 영혼에 기억이 존속할 가능성 여부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완전하게 무화(無化)된다고 보았고, 이런 주장은 기독교의 영혼에 대한 가르침에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
▲아퀴나스도 어거스틴과 마찬가지로 영혼에 영원히 보존되는 기억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고심했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 제89문제 5절과 6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있을 당시 획득한 지식들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에 남아있는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아퀴나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지식에는 육체의 죽음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있고, 육체가 죽어도 영혼 속에 영원히 보존되는 것도 있다.

이런 결론은 어거스틴의 견해를 재확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 아퀴나스는 영혼 안에 영원히 남는 지식 중 어떤 것은,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출한 지식이라고 믿었다. 즉 아퀴나스는 영혼에 영원히 남는 기억의 범위를 어거스틴보다 더 넓게 확장한 것이다.

◈기억과 영감: 하나님의 영감으로 영혼에 기억된 진리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기억에 대한 이론은 여러 소소한 변형을 거치면서 종교개혁가들과 근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 그러나 정통 보수 신학계 입장은 기본적으로 영혼에 영원히 남는 기억과 망각될 기억,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후기근본주의 복음주의 신학(postfundamentalist evangelical theology)의 기틀을 놓은 3인의 신학자 중 하나로 인정받는 버나드 램(Bernard Ramm, 1916-1992)의 논의를 보면 이 점이 명확해 진다. 여기서 언급한 3인의 신학자는 칼 헨리(Carl F. H. Henry, 1913-2003), 에드워드 카넬(Edward J. Carnell, 1919-1967), 버나드 램을 지칭한다.

램의 성경관은 기존의 근본주의 성경관이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한 결과물이다. 램은 성경이 가진 지적 정보로서의 가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영감으로서의 가치 모두를 균형잡힌 시선으로 변증하려 했다. 그는 완전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방어하는 데 급급한 근본주의 성경관을 '성경주의(biblicism)'라고 비판하며, 성경 이해에 있어 영감과 지성을 함께 중시하는 성경해석을 촉구했다.

살인자의 기억법
▲후기근본주의 복음주의 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신학자 버나드 램과 그의 대표저서.
이를 위해서는 영감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정립돼야 했다. 근본주의 신학에서 영감이란, 성경 기자들의 글이 사람의 저작이 아닌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이라는 믿음을 고수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그러나 램은 근본주의자들의 영감 개념이 오로지 성경의 신빙성을 지지하는 데 집중된 나머지, 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독자들에게 영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에 램은 영감이 성경이라는 문학적 기록 자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램의 관점에서 영감이란 성경이라는 문학적 기록 안에 담긴 진리가 지성의 도움을 받아 우리 영혼 안에 들어오게 하는 통로로 규정된다. 이는 오늘날 성경을 읽고 진리의 지식을 획득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이해와 체험이 가능한 영감 개념이다.

램의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수여된 지식, 그래서 영원히 영혼에 보존돼 구원을 이룰 지식은 성경에 깊게 감화됨으로써 실제 변화를 겪은 생각, 그리고 현실의 삶에서 실천을 통해 체화된 경험들로 구성돼야 한다. 그리고 이런 진리의 지식이 얼마나 영혼에 온전히 각인되었는가에 따라, 즉 기억되었는가에 따라 그 영혼이 누릴 생명과 복의 분량이 결정될 것이다.

램의 성경관과 영감관은 근본주의 혹은 자유주의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복음주의 신학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과 투쟁 중인 기독교인의 영혼 구원 가능성에 대한 판별 기준은 이 모범적 성경관과 영감관을 통해 어느 정도 명확해 진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환자가 발병 이전까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진실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 기준으로 채택될 수 있다. 그리고 발병 후라도 영혼에 기억된 영원한 진리의 지식을 일정 수준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로 수용될 수 있다.

◈기억과 신앙: 알츠하이머병 발병 전과 후의 신앙

이런 기준들은 순전히 이론적인 신학적 담론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 알츠하이머병 환자들에 대한 현대적 기법의 관찰과 연구는 이런 기준들이 현상적 차원에서도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알츠하이머병과 신앙의 보존에 관한 연구가 국내에서는 그리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나마 수행된 연구들도 거의 대부분 목회상담 및 보건복지 측면에 편중된 내용만 전달하고 있다. 이 분야에 있어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연구 동향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국내에 비해서는 훨씬 다채로운 방향으로 진행된 연구들이 존재한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끄는 연구로는 수잔 설리반(Susan C. Sullivan)과 르네 비어드(Renée L. Beard)가 공동 진행한 '신앙과 망각의 증세(Faith and Forgetfulness)'가 있다. 설리반과 비어드는 더 홀리 크로스 대학(College of the Holy Cross) 사회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대학은 예수교 재단이 운영하는 가톨릭 계열 중상위 리버럴 아츠 칼리지(liberal arts college)이지만, 해당 연구는 가톨릭과 개신교 구분 없이 기독교 신앙을 가진 환자들을 골고루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살인자의 기억법
▲뇌의 기능이 죽어가면서 겪게 되는 환자 본인과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 절망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기억이 존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존재한다.
연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기독교 신앙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온 환자들과 그들을 직접 돌보고 있는 가족들을 대상(총 75명)으로 한 관찰 및 실제 인터뷰 결과다. 이들 가운데는 투병 기간이 약 6개월 정도인 초기 환자들부터 9년을 넘어가는 중증 환자도 포함돼 있다.

여기서 설리반과 비어드가 제시하는 바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삼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투병 과정에서 현저하게 진취적이며 긍정적 자세를 보인다. 둘째, 가능할 때마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병행하고, 행동과 언사를 통해 최대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려 노력한다.

셋째, 예배와 교제 등 교회의 활동에 가능한 한 참여하려 하고, 이를 통해 소통이 단절되는 상황이나 외로움의 감정에 지배되는 일을 방지한다. 넷째,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기억력이 유지되고 호전될 수 있다고 믿으며, 실제로 이를 경험한 바 있다고 증언한다.

이런 연구 결과를 통해, 설리반과 비어드는 알츠하이머병 환자들도 신앙을 유지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이런 가능성은 발병 전 신앙생활이 진실하고 절실할수록, 그리고 발병 후 신앙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의지와 노력의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 높아진다고 두 연구자는 결론을 내린다.

살인자의 기억법
▲설리반과 비어드의 연구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환자라도 기도, 예배, 성도의 교제와 같이 신앙을 고백하고 보존하는 영적 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연구는 신학적 담론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기법에 따라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를 병행해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이 연구 결과는 어거스틴으로부터 시작해 아퀴나스를 경유하여 종교개혁자들과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까지 이르는 영혼의 기억에 대한 이론 및 믿음에 현상적으로도 부합한다.

신앙과 지성과 영감을 통해 영혼에 깊게 각인된 지식, 즉 하나님을 진정 알고 체험한 진리의 지식은 질병으로 인한 기억력 감퇴에도 불구하고 소실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연구를 통해 실제로 입증된 것이다.

설리반과 비어드의 연구는 사회학 연구인 관계로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논하지 못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신학은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논의할 의무가 있다. 만일 어떤 알츠하이머병 환자가 수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죽기 전까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고 표현하기 위해 분투한다면, 복음주의 신학 입장에서는 이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기억의 내용: 발병 이후의 삶은 기억의 내용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 묘사된 연쇄살인범(혹은 스스로를 연쇄살인범으로 믿는) 김병수의 모습은, 영혼에 영원히 남길 진리의 기억, 다시 말해 신앙의 기억을 확보하지 못한 채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들의 심정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기독교인에게든 비기독교인에게든 무서운 재앙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순전한 믿음과 헌신을 위해 투쟁해 온 기독교인에게는 이 병이 영혼 구원의 상실이라는 절대적 불행을 초래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가르침은 알츠하이머병이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극복해야 할 대응 가능한 난관이라는 믿음을 지지한다.

전편에서 지적했듯, <살인자의 기억법>은 영화와 소설 원작 모두에서 기억 전체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결말을 제시한다.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이 결말에 동의할 수 없다. 일상의 지식과 기억은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육체의 죽음에 의해 망각되고 무화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식은 단지 육체의 머리, 즉 뇌에만 머물다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까지 침투해 영원토록 보존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이 알츠하이머병에 대처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바로 병마조차 무화시킬 수 없는 진리의 지식, 믿음과 생명의 기억들로 영혼을 가득하게 채우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에 동반되는 불안, 절망, 그리고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기억의 내용이 신앙과 무관한 것들로만 가득할 때 최고조에 이른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선보이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암울한 모습은, 우리들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자기 신앙의 진정성을 잠시나마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자의 기억법>에 표현되고 있는 알츠하이머병 환자 김병수의 고독과 절망은 기독교인들이 이 무섭고 비극적인 질병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반성하게 하는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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