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반도, 그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묻다

김진영 기자 입력 : 2017.10.01 18:31

[특집 인터뷰] 전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

한반도가 그 어느 때보다 위기다. 미사일을 실험 발사하던 북한은 급기야 여섯 번째 핵실험을 했다. 그에 맞서 미국은 제재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이 때 과연 우리나라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여기에 대한 답을 모색하기 위해 한 역사가를 만났다. 언제나 역사는 현재와 미래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영훈 박사(66)는 경제사학자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교에서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올해 2월 퇴임했다. 지금은 경제사학자들이 모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다. 역사 연구에 있어 '사료'(史料)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그는 실증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 성과를 쌓았다. 지금까지 약 150편의 논문을 썼다. 한국 근대사 연구의 권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후기사회경제사」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대한민국 이야기」 「대한민국 역사」 「한국 경제사 Ⅰ·Ⅱ」 등이 그의 주요 저서다.

이영훈 교수
▲전 서울대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 그는 “종교개혁 이후 비로소 하나님과 일대 일로 대응하면서 그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개인이라는 의식이 생겨났다”며 “이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돌파였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대한민국과 자유, 그리고 기독교

-교수님의 저서 여러 곳에서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규정하는 단어로 '개인'과 '자유'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개념은 서유럽의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셨죠.

"네 그렇습니다. 개인의 근본적인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이나 자유와 같은 말은 그 이전 조선후기 사회에는 없던 개념이었습니다. 당시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던 시대에선 그런 범주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이란 무엇입니까?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 형과 동생, 친구와 친구..., 즉 그것은 개인이 아닌 상호관계 개념이었습니다. 이렇게 상하의 위계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윤리에서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 독립적인 존재인 개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개인이나 자유라는 말조차 없었죠.

19세기 말 조선은 그런 사회였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알지 못한 채 극단적인 절망 속에서 그 이전 500년 동안 지속되어 오던 성리학의 기초가 거의 해체된 상황이었어요. 여기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은 절망에 빠진 인간들을 소생시키고 단합시켰던 하나의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개인의 자유 개념은 대체 어디에 그 뿌리는 두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그 이전 중세 유럽에선 그와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종교개혁 이후 비로소 하나님과 일대 일로 대응하면서 그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는 개인이라는 의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적 돌파였습니다. 이 때부터 유럽의 근세 문명이 세계사를 리드하기 시작합니다. 그 전까지 유럽은 그저 세계사의 한 변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중국 등 동양이 더 두각을 나타냈었죠. 하지만 동양에서는 종교개혁과 같은 일대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아직도 자유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병원이나 학교 등 단순히 눈에 보이는 근대적 기관들을 만들었다는 것보다, 그런 근대적 정신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더 중요했다는 말씀이시군요.

"사실 일제시대 일본은 우리나라에 학교와 병원, 통신, 교통과 같은 근대적인 시스템과 제도를 심어놓았습니다. 기독교 선교사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죠.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대한민국이 성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와 같은 형식적인 제도와 기구들을 바탕으로 하나의 근대 국가로서 대한민국을 세웠던 것은, 다름 아닌 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이들의 정치철학과 이념, 바로 개인의 근본적인 자유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가? 일본에서 온 게 아닙니다. 당시 일본은 천황제의 전체주의 국가였습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바탕이 된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해방 후 미국을 통해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소수의 우리 선각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일제의 탄압 아래서도 살아남았던 기독교인들이 그 중심이었습니다. 이들이 미국의 힘을 빌려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런 이들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미국이 그런 정신을 일방적으로 이 땅에 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우리나라 건국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 오랜 독립운동,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故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그 중 한 명이죠?

"이승만 대통령은 정치가 이전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대통령 재직 시절에도 매일 밤 침대에서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서로 성경을 읽어주는 걸 빼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기독교 정치 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혼자 조용히 있는 시간의 절반을 기도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제가 하고 있고 또 하려는 일이 당신의 뜻에 맞습니까?'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그는 매사에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정치적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었죠. 그랬던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건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습니다. 약 5년 7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는데, 처음 6개월 동안은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무기징역을 받을지, 아니면 사형에 처해질지 알 수 없었던 거죠.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러던 중 어느날 간수가 덜컥 감옥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고 합니다. 순간 '아, 이제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는 군요. 그래서 가슴에 품고 있던 유서를 옆에 있던 다른 죄수에게 전해주려던 그 때, 간수가 끌고 나간 건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그가 유서를 전달하려 했던 바로 그 죄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가슴을 쓸어내렸겠지요. 그가 자세한 기록을 남기진 않았지만, 아마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이런 체험이 그로 하여금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거듭나게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았고, 독립운동을 했으며, 그 마지막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서 정치를 펼쳤죠.  

기독교가 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가는, 그가 한성감옥에 있을 때 제국신문에 기고한 글에도 잘 나타납니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내려오셔서 천백대의 무궁히 끼치신 모든 은혜 중에 우리의 가장 감격하게 여기는 바는 모든 세상 사람의 결박을 풀어 놓으신 것인 바 첫째, 율법의 결박에서 풀어 주심이니... 둘째, 모든 예식의 결박에서 풀어 놓으심이니... 셋째, 모든 죄악에서 풀어 놓으심이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런 이치를 아는 자는 우리 예수교인 뿐이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을 회복해 달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울 것이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무엇도 아닌, 자유가 그의 독립운동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왜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집요하게 독립운동을 했던가? 그것은 말과 행동, 심지어 생각까지 빼앗았던 일본에게서 자유를 다시 되찾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정치가가 당대에 그 말고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이 기독교 신앙이었습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난 다음부터죠.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던 날 그는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요, 둘째는 애국선열의 희생적인 독립운동 덕분이요, 셋째는 미국을 위시한 우방의 도움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 당시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에게 순서에도 없던 기도를 부탁합니다. 이렇게 대한민국 역사가 출발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고 자랑스러워하는 기독교인이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영훈 교수
▲이영훈 박사는 “미국 입장에서 끝내 한국을 버릴 수 없는 정신적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라며 “그러므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놓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역사적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각성을 해야 한다”고 했다. ⓒ김진영 기자
기독교가 망각한 역사

-그럼 박사님은, 건국 이후 한국교회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개인의 근본적인 자유라는 정치철학을 과연 우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해 왔는가 하면, 그 평가는 상당히 인색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도 대학 강의실에서 젊은이들에게 '여러분은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면 '예, 저는 자유인입니다.'라고 확신을 갖고 손을 드는 학생이 절반밖에 되지 않더군요. 이렇듯 한국의 청년들은 자유인이라는 강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단은 교과서에 문제가 있습니다. 초·중·고 12년 동안 자유에 대해 말하는 교과서의 한 장이나 절도 없습니다.

지난 100년 간 한국도 형식적·가시적으로는 그런대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정신적 변화는 그것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성립한 이후 7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개인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적 이해가 부족한 형편입니다. 그저 기득권이나 재산권 수준의 논의에 그칠 뿐이죠.

기독교인이라고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자유에 기반을 둔 정신적 토대가 약한 듯 보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가 매우 주체적이었던 까닭입니다. 강한 결단을 통한 실천이 전제될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는데 어찌 그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자의식을 만든 것은 자유를 지켜야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밖에 없는 공산주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 좌우 합작을 통해서라도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승만 대통령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미국은 통일정부를 세운 뒤 한반도를 떠나려 했습니다. 자신들의 국제적 책임을 거기까지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럼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더불어 평등하게 살자는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했을 것입니다. 그 때의 정치적 상황은 실제로 그럴 수 있었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만 당원이 똘똘 뭉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유일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했었으니까요.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역사 또한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을 비롯해 자유를 지키려 한 이들은 한 편으로는 미국을 붙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켜 결사적으로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좌우 합작을 거부하면서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지켜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이후 오늘날까지 기독교가 제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방 후 당대의 혼란 속에서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한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그 중심에 기독교 정신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면, 공산주의 아래서 하루빨리 북한 동포들을 구해내는 것이야 말로, 이렇게 자유를 누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책무이자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임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일깨우고 교육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에 앞장서지 못한 채 때때로 기복신앙에 몰두하는 등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고결한 정신이었던 자유,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켜 개인의 자유가 범람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역사적 과업을 기독교는 망각하지 않았는지,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전쟁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관. ⓒPixabay.com
그러나 여전히 희망이 돼야 할 기독교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참전해 북한과 맞섰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희생해가면서까지 이토록 작은 나라를 지키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보십니까? 혹시 신앙적 동기가 있었을까요?

"일본에게서 대한민국을 분리시켜 독립하게 만든 미국 정치세력들의 행동, 그 이면에는 대한민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종교적 책임감도 있었습니다. 미국이 조선과 체결한 우호조약을 스스로 폐기하고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는 걸 묵인했던 것, 그것이 매우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었고 무엇보다 미국을 건국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결정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종의 종교적 양심의 발로였죠. 이것이 북한이 남침했을 때 마침내 표출된 것입니다.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그 당시로서는 예상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남침은 그런 계산 속에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의 공산화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미국이 과연 그 대륙의 한 쪽 끝에 달린 한반도 남반부에서 일어난 전쟁에 개입하겠느냐는 것이었죠.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참전을 결정한 것은, 기독교인인 그에게 종교적 양심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미국이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 대한민국을 차지하겠다는 전쟁을 그대로 두고만 볼 것인가?' 결국 북한의 남침은 미국의 종교적 양심을 두들기고 그것에 도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죠. 빌리 그래함 목사 등 미국의 기독교인들도 미국의 참전 결정에 일정 부분 역할을 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후 트루먼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매우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해관계가 그 정도로 깊지 않은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에 약 3만 명의 미국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있었냐는 것이죠. 그래서 미국인들은 이후 40~50년 가까이 한국전쟁을 떠올리기 싫어했습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전쟁을 두고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 했겠습니까? 미국에 한국전쟁 기념공원이 생긴 것도 불과 20년 남짓입니다.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나라에 미국이 과연 어느 정도나 개입해야 하는가를 두고 미국에선 아직도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러면서도 미국 입장에서 끝내 한국을 버릴 수 없는 정신적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놓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역사적 책무가 무엇인지에 대한 각성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위기적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뭉쳐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세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를 어떻게 세웠습니까? 역사의 격변기에서 소수의 선각자들이 의지적으로 관철해 낸 자유노선의 결과가 아닙니까? 한국 역사의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난 게 결코 아닙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만이라도 건국의 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한편 북한을 향해서는 종교의 자유를 외쳐야 합니다. 그곳에 사는 기독교인들이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지 않고, 우리처럼 마음껏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기도와 실천의 끈을 놓지 않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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