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버스 틸리케 산상수훈
오스왈드 챔버스의 산상수훈

오스왈드 챔버스 | 스데반 황 역 | 토기장이 | 224쪽 | 11,000원

현실과 믿음 사이
헬무트 틸리케 | 윤종석 역 | 두란노 | 352쪽 | 15,000원

신약에서 가장 은혜로운 본문을 택하라면,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특히 5장 3-12절까지 이어지는 팔복은 설교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인기 있는 본문입니다. 이처럼 산상수훈은 성경의 그 어떤 본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상수훈에 대한 입장은 천차만별입니다. 가장 극단적 해석 차이는 산상수훈이 사람의 힘으로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이라는 점에서 사람과 상관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키라는 계명이 아니라 따라야 할 하나의 본이기에 참고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처럼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신약의 복음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지가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할 도덕적 차원에서 주셨다면 삶의 모델이 될 것이고, 구약의 율법처럼 주었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과 같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관점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 범주로 보면 무방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러한 난해한 관점보다는 목회적 차원에서 산상수훈을 접근하려 합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나치에 저항하면서도, 그들에게 동조한 교회를 버리지 않고 떠안으려는 공의와 관용이 어우러진 학자였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Oswald Chambers)는 신학을 한 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목사로서 전쟁의 포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의 대부분의 책들은 아내 비디의 속기로 적혀진 글을 다시 풀어낸 것들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My Utmost for His Highest)>이 널리 알려진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영혼의 깊은 고민을 탁월하게 해석해 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민할 것들을 두 책을 통해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1. 산상수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산상수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요? 간단히 보이는 질문이지만, 산상수훈을 읽어본 독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들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낼 수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문제, 헌신의 문제, 기도와 구제의 갖가지 문제들은 이 땅에서 과연 실천이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로 높은 수준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 오스왈드 챔버스는 조건적이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산상수훈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에게는 절망만 안겨준다. 이것을 바로 주께서 의도하신 바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절망에 이를 때에야 비로소 가난한 심령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손을 벌리기 때문이다(20-21쪽)."

거두절미하고 오스왈드 챔버스는 산상수훈의 목적을 구약의 율법적 기능과 동일하게 바라봅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은 인간이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또는 성령의 능력이 덧입혀지지 않은 자연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통적 율법 해석에 천착한 것이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동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근거는 '소유가 아닌 가난(21쪽)'이라는 점에서 다시 강조됩니다. 가난은 인간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철저히 인지하는 회심의 첫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보게 됩니다. 그로 인해 절망하게 되고,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에 비해 헬무트 틸리케는 모호하긴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인간이 위기와 난관에 부닥쳤을 때 답을 줄 수 있는 어떤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우리를 삶에 직면하게 해줄 진정한 도움에 대한 갈망이 충족되도록 돕는다(22쪽)."

틸리케는 산상수훈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해준 '선포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신의 눈으로부터 피하여 은신처로 자신을 숨기지만, 산상수훈의 선포자는 그들의 귀에 '파격적 발언'을 통해 감추어진 욕망을 드러내고 그들의 은신처가 잘못된 것임을 말합니다. 인간은 은신처에 숨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제시한(선포한) 말씀에 청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짐을 졌으며, 이제 정말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24쪽)'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틸리케는 여기서 '짐 없는 여행자'를 철학자 아누이의 표현에서 빌려오는데, '짐'은 인간이 져야 할 율법과 더불어 갖가지 어려운 삶의 짐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에 대한 크지 않은 관점의 차이를 보았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산상수훈 해석에 있어 율법의 기능을 그대로 가져왔고, 헬무트 틸리케는 율법의 기능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의 짐을 대신 지고 새로운 삶을 열어주는 선포자 그리스도에게 좀 더 접근하고 있습니다. 즉 구원자와 위로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무게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현대적 표현을 빌리자면 오스왈드 챔버스는 '창조적 파괴'를, 헬무트 틸리케는 '상처받은 위로자'의 관점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를 염두에 두고 산상수훈을 읽어 나간다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산상수훈이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

산상수훈의 가장 핵심이자 서두에 자리하고 있는 팔복을 살펴봅시다. 두 사람은 시작부터 다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군중들은 '경악'했을 것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저주로 여겨졌던 것을 복이라고 선포하셨기 때문(25쪽)'입니다.

예수의 선언 속에는 구약이 알려주는 부유함과 성공이 '복'이라는 개념이 전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종종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자들에게 자녀와 물질, 건강의 축복을 보장합니다. 시대 속에서 역치되기는는 했지만, 일반적인 구약 속에서 축복은 물질적 부유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가난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부유함을 가진 안일한 신앙인들에게 '영적 폭약(26쪽)'이며, 그것을 수용할지 안 할지의 문제를 넘어, '성령께서 제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27쪽)'으로 제시됩니다.

오스왈드는 '가난'함이 복임을 선포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세상과 전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순종의 문제로 끌고 갑니다. 예수의 선포된 말씀은 받는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모든 복들과 계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자연인과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를 판가름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한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재창조하시고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놓으실 때에만 가능하다(29쪽)."

자, 그럼 헬무트 틸리케는 팔복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경이롭게도 그는 '비참한 사람들 가운데 계시는 예수'를 주목합니다. 그들은 불행으로 고달픈 인생들입니다. 슬픔은 '사람을 당당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슬그머니 도망쳐 숨어 버리고 주눅 들게' 만듭니다(32쪽). 그곳에 환자들이 있습니다. 상처받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절뚝거리고, 말을 못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는 혼돈이 지배합니다. 예수는 신기하게도 그런 '비참한 사람'들 속에 있고, 그들을 끌어모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틸리케는 여겨서도 '경악(36쪽)'이란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번역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이란 단어를 골랐지만, 그 단어만큼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한 언어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경악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비참'을 '복'으로 정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 전복의 선언은 상상하지 못한 해석 때문일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 스스로 저주하며 벗어나려 했던 비참과 가난을 '복'으로 선언하고 그곳에 안주하도록 이끄는 예수에 대한 반감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 비참이 복이 될까? 틸리케는 '복을 주시는 그분에게서 우리 대신 입으신 상처의 흔적을 본다(39쪽).'고 표현합니다. 즉 사람들의 비참을 예수 그가 대신 졌고, 또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서 비참한 자들을 찾아오셨고, 그들을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십니다. 고난은 성숙하게 합니다.

그러나 종종 '완전히 무너질 수도(43쪽)' 있습니다. 오랜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라면 성숙이라는 단어보다는 좌절과 절망이 더 쉽다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구하기보다, 원망하고 부인하기가 더 쉽다는 것을 절실해 깨닫게 됩니다.

틸리케는 여기서 저주받은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자신이 전부이심을 배울 수 있게 한다(44쪽)'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땅의 삶은 전부가 아닙니다. 이곳에 악이 있고, 그릇된 가치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참된 복은 가난을 통해 산상수훈의 선포자인 예수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복이 있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천국 문을 활짝 열고 당신에게 손을 내미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이 우리 가운데 계셔서 '너희는 복이 있나니'라고 선포하실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성취하시기 때문이다(45쪽)."

3.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말하는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라는 점입니다. 결론을 내기기 전에, 먼저 두 분의 이야기를 천천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오스왈드 챔버스는 산상수훈의 목적이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룩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연적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아직'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듣고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주님의 교훈의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45쪽)'이라고 못 박습니다. 예수의 교훈은 지금까지 들었던 서기관들의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산상수훈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오스왈드 챔버스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침공해 들어오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전혀 낯선 세계를 듣고 체험합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느끼고 듣고 체험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멋모르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절벽 앞에서 눈을 뜬 봉사와 같이 '절규(46쪽)'합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해 전해 오는 전혀 낯설고 새로운 세계에 놀라고 경악하고, 그곳에 들어가고자 하나 자신들이 연약과 무능을 깨닫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항상 들어왔던 말씀 속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듣습니다. 곧 그들의 본질적 성향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닿을 수 없는 자신 안의 저 깊은 마음속 동기(56쪽)'를 언급합니다. 그 동안 행해왔던 선함조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성향'이며 '죄의 근본'(62쪽)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본질 자체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개혁이나 좀 더 나은 도덕적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옛사람은 파괴되어야 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덧입혀져야 합니다. 초반에 오스왈드 챔버스를 '창조적 파괴'자라고 표현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새로운 가치를 지니는 것이고, 영혼이 거듭나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직 죄의 육신에 사로잡힌 삶을 위해 훈련과 연단이 필요합니다. 팔복 이후를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로 풀어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거듭난 이후를 가정한 교훈입니다.

거듭난 이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인 것(107쪽)'이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전통적 회심론과 인간론을 죄와 영혼의 문제로 끌고 와 재해석합니다. 기도는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는 것(118쪽)'이며, 구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나타낼 수 있는 성령께서 주신 기회(116쪽)'이고, '믿음이란 주님의 성품을 아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상식으로 주님의 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어도 그분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136쪽)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스왈드 챔버스에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악과 싸우는 전투적 이미지가 강합니다. 훈련을 통해 성화돼야 하고, 모든 삶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성령께 순종하는 삶(141쪽)'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가해자의 나라였지만 또 다른 억압과 차별을 받아야 했던 헬무트 틸리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틸리케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팔복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문제'를 언급합니다. 그는 인간을 '행복의 욕구보다 더 강한 충동'은 없는 존재로 정의합니다(47쪽). 행복에 대한 갈망은 '깊고' '은밀한' 것입니다(48쪽).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유행을 따르고, 권력을 탐합니다. 예수는 이러한 갈망에 쇄기를 박습니다. 인자가 머리 둘 곳 없듯, 자신을 따라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영원한 도성'도 없고, '박해'를 받을 것이며, '나그네'임을 확인할 것이라고 말합니다(50쪽).

그런데 바로 그러한 삶,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51쪽)'인데, 그곳에 '충만한 복'이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고난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가장 심오한 실재(54쪽)'라고 표현합니다. 즉 고난과 비참은 그리스도인들이 벗을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며, 이 땅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은 전투하는 존재입니다. 나그네는 지나치는 존재이지만, 군인은 적과 싸워 이겨야 하는 사명을 가진 존재입니다.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존재, 꿀이 아닌 소금으로 살아가려는 존재입니다. '소금은 우리 인간의 환부와 아픈 데를 쏘고 찌릅'니다. 이것이 '고통 없는 치유'를 기대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방식입니다(73쪽).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 능력으로 일하심을 안다. 두 세력이 충돌하며 극렬한 전쟁을 벌이는 이 땅의 한복판에서 나는 하늘의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안전 속으로 옮겨졌다.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권능이 침투해 들어와 하나님 나라의 깃발을 펄럭이고 있다(62쪽)."

틸리케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존재입니다. 야곱에 벧엘에서 보았던 하늘과 연결된 사닥다리처럼,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미래의 천국을 이미 이곳에 실현 시키며 살아갑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상황 속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기어이 신앙을 공표(76쪽)'할 때,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 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핍박은 '소금과 빛이 살아 역사하려면 자신의 보존하려 해서는 안'되며, '자신을 내주고 희생(80쪽)'한 결과입니다. 죄는 이기적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적입니다. 세상이라는 이기적 물줄기를 거슬러 자기희생이라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둠 속에 빛과 같습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사막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결론을 내려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오스왈드 챔버스는 개인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다룹니다. 개인의 거듭남, 개인의 성화, 개인의 거룩을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하지만 헬무트 틸리케는 관계론적으로 바라봅니다. 동일하게 산상수훈을 통해 절망과 경악을 언급하지만, 인간에 대한 관점은 조금 다릅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인간의 본질 자체가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에 대한 이해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혼자서 만들어질 수 없고,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되, 이 땅에서 악과 전투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치러야 할 전투는 어떤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틸리케는 결론 부분에서 전투적 삶을 '좁은 길'을 걷는 것과 연관시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대비하시며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신다는 뜻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감히 이전과 똑같은 길을 답습하지 않는다. 욕심나는 시시한 쾌락, 약간의 사랑과 영화관, 좋은 음식과 일의 친척을 쫓아다니지 않는다(299쪽)."

4. 나가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산상수훈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가진 두 사람의 설교를 살펴보았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산상수훈이 인간에게 절망을 안겨주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헬무트 틸리케 역시 인간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절망과 경악을 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이 땅에 임했음을 알려주며, 열린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을 당부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가 개인의 거룩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헬무트 틸리케는 실존적 측면에서 삶을 강조합니다. 챔버스는 고난과 역경의 문제를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소명의 자리로 해석하는 반면, 틸리케는 '죽기까지 싸워야 할(330쪽)' 삶의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챔버스든 틸리케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을 통해 하늘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표지이자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얻은 천국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헬무트 틸리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간략하게 살펴본 산상수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죽도록 남을 미워하지 않는다. 생명의 왕을 섬기는 사람은 더 이상 사망의 종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기쁨을 본 사람 그리하여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며 기뻐하는 사람은 더 이상 세상의 전쟁도 무섭지 않다(351쪽)."

아멘! 아멘!입니다.

정현욱 목사(서평가,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