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의심(疑心)이란, 믿지 못하거나 확실히 알 수 없어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doubt, suspect, suspicion. question'이라고 합니다.

의심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심 때문에 발생된 불행의 역사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늘 붙어 다니며 괴롭히는 암적 요소가 바로 의심 이라는 것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고 의심하여 형제인 동생을 죽이는 비극을 낳았고, 사울은 다윗을 의심하여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비운의 왕으로서 전해 내려오는 사례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는 많은 사건들 중에는, 의심이란 병 때문에 고통과 수모를 당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바다로 뛰어내린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처음 믿었던 믿음을 계속 유지했어야 하는데, 두려움으로 주님 말씀을 의심하다 바다로 빠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못한 의심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질책을 당합니다.

하지만 방주를 만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토를 달거나 의심하지 않고 순종한 당대의 의인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르기까지 모범적으로 순종을 실천한 분으로 기억됩니다. 노아는 지금까지 우리 믿음의 권속들에게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좋은 본보기로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며,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고페르 나무로 만든 방주는 길이가 150m, 너비는 25m, 높이는 15m 이며, 방주의 무게는 약 14,000톤을 적재할 수 있는 당시로는 거대한 배입니다. 목재로 방주를 제작할 당시 아마도 노아의 식구만으로는 방주를 제작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에게 품삯을 지급하면서 배를 제작했으리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지역 주민들은 배를 만들면서 아마도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나무라기도 했을 것입니다. 품삯을 받기 우l해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많이 비웃으며 정신이상자라고까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는 모든 수모를 감내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수십 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만드는 과정에는 숱한 어려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좋은 연장이나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동수단도 그렇게 편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것이 손과 발, 몸으로 해야 하는 시절이라 고통이 많았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방주를 만들 당시 많은 동물들이 한 쌍씩 들어갔는데, 과연 거대한 공룡도 들어갔을까요? 바다에 있던 수많은 고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홍수에 몰사하지 않았을까요? 기록이 없으니, 필자도 '의심'이 발동해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애통하심과 아픔까지 오롯이 느끼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알면, 강건한 믿음과 흔들리지 않는 희망과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학문적인 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논리로는 허술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때문에 허구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난무한 실정이기도 합니다. 노아의 이야기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도, 묵묵히 순명했던 노아의 모범적 신앙에 집중하는 것이 옳을 듯 싶습니다.

따지지 않고 모든 것에 의탁하는 믿음이야말로, 생명의 길에 들어서는 비결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 한 구절에 얽매여 걸려 넘어지기보다, 계속해서 무조건 더 열심히 읽도록 하는 게 어떨까요?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날아갈 듯한 기쁨을 선물받는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노아처럼 의심치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순종하며 애쓰는 일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넉넉한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역사에는 의심하고 궁금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성경 전체를 알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마지막 그 날이 오면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그 분을 알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현재 4차원 시대에 풍족하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도 봉사 과정에서 걸핏하면 못하겠다. 누가 나의 봉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실망해서 그만두는 사례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의지대로, 나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심한 언어폭력과 갑질로 마음의 상처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는 교만과 의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한 사실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현 시대에 그 같은 일을 시켰다면, 의심과 불평으로 아마 그 일을 쉽게 포기했을 것입니다.

사건이 터지는 곳에는 항상 의심이라는 것 때문에 시작이 되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외면하고 자신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행되고 있는, 오늘 날 교회 안의 현실을 보노라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걸핏하면 남을 쉽게 판단하고 의심하는 병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신뢰가 무너지고 사랑도 식어가며,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기보다 그냥 수양하러 온 사람들 같기도 합니다. 가장 낮은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의심은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믿음의 적입니다. 서로 신뢰하는 문화로 믿음을 더 곤고히 해야 하겠습니다.

노아처럼 인내를 갖고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노아의 방주를 의심 없이 만드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의심은 나의 신앙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노아로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