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태 칼럼] 니고데모처럼… ‘영적 커밍아웃’을

입력 : 2017.09.18 12:38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담임).
몇 년 사이 한국 사회에서도 성 자유화 물결이 봇물처럼 일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커밍아웃(coming out) 현상이다. 커밍아웃은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와 같은 성소수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자신의 사상이나 지향성 등을 밝히는 행위로 사용되기도 한다.

최근 유명인 가운데 커밍아웃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이 사회문화와 정신세계에 미치는 여파는 결코 작지 않다. 이제는 국회에서조차 성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법제화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고 있다. 소수의 인권 보호라는 명분 때문에 다수의 문화가 위협받고 있고, 다수의 정신세계가 멍이 들 수 있는 상황이다.

성경적이고, 인륜적으로도 용납되어서는 안 될 법이다. 물론, 성소수자를 경멸하자는 것도, 비난하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법제화되었을 때 다가올 사회 현상을 예측해 보라는 게다. 동성애자들의 경향성을 받아들인 유럽이 흘러가는 세태가 어떤가? 이것은 인권 문제나 자유 문제가 아니다.

만약 내 아들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면서 남자를 소개한다면, 내 딸이 '결혼할 사람을 데려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 건가? 동성애자들이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든 모습으로 축제를 벌이는 퀴어축제도 삼가야 할 일인데, 이제 법제화까지 하자는 움직임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에는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 득세하고, 악한 일을 도모하는 이들이 큰 소리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김정은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불법을 해놓고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당당하니, 걱정스러운 세상이다.

실수나 나쁜 일은 '드러내놓고' 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어두운 곳에서 하라는 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그런 일들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설령 연약함이나 실수로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지라도, 그것을 자랑삼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숨어서 남들 몰래 선한 일을 한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드러나는 게 좋은데. 사람들 입에 널리 회자되는 게 유익할 수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에게 좋은 거울로 사용되어야 하는데. 그런데 구태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고 한다. 분명히 주님이 칭찬하시리라.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데, 드러내지 않는 또 다른 사람들도 있다. 어느 날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가 찾아온 것은 '낮'이 아니다. '밤'이다(요 3:2).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급 인사이다. 최고 의결기관인 예루살렘 공의회 회원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공경하고 율법을 지키려 애쓴 사람이다. 물론 경제적 넉넉함도 갖고 있던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잃을 게 많았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로마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그렇게 환영할 만한 게 아니고, 유대 사회로 볼 때도 그렇게 환영할 일이 아니다. 아니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손해를 보고, 잃을 게 많다. 자칫 출교를 당할 수도 있고, 순교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요 12:42-43)."

아마 요한복음 19장에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해서 장례를 치루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나 니고데모가 바로 이런 사람 아닐까? 그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괜히 예수 믿는다고 공개했다가, 어떤 불이익이 돌아올지 모른다. 자신에게 돌아올 손해와 위험이 두려웠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사실을 숨기려 애썼다. 가진 것을 잃기 싫다는 게다.

인간은 두려움이 많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빼앗김에 대한 두려움 등등. 모세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옛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자기 동족 히브리인들이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또 다시 버림과 거절을 당하는 건 아닐지, 강력한 대제국 애굽의 바로가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동족을 이끌고 무사히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을지, 두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굴복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마른 지팡이를 통해서 위대한 기적을 일으켰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도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래서 영적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숨기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하게 믿음생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경험할수록 도저히 숨어서 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영적 커밍아웃'을 했다. 예루살렘 공회가 예수님을 이단자 취급해서 죽이려 할 때도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건 잘못이다'고 공개적으로 논박을 했다(요 7:51).

사실 이렇게 했을 때 어떤 일이 닥칠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판국이다.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요한복음 19장에 가면,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로마의 총독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다.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유황과 몰약을 발라 바위 무덤에 장사지냈다. 100리트라 쯤 되는 '몰약과 침향'은 왕의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양의 향료이다. 물론 이건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믿음과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애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소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믿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믿음에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자신 있게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믿음'으로 성장했다.

그렇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자는 커밍아웃할 수 있는 때까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해가야 한다. 멈춰 서 있어서는 안 된다. 변화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변해가야 한다.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니고데모는 1세기 어느 날 순교했다고 한다. 우리 역시 예수님 때문에 출교와 순교마저 각오하고 주님을 향한 공개적인 믿음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남들이 볼까봐 성경책을 숨기고 다니는 믿음? 남들이 볼까봐 식당에서 식기도도 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직장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자신의 행동거지가 불편해지니까 그리스도인임을 자처하지 못하는 신앙인?

이제는 영적인 커밍아웃을 할 때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김병태 목사(성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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