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교리는 방종을 부추기지 않습니다

입력 : 2017.09.14 18:23

[이경섭 칼럼] 성도들의 방종 원인이 이신칭의?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여기저기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대해 많은 말들이 오갑니다. 근자에 한국교회의 타락에 대해 말하면서, 그 책임을 믿음(은혜)만을 강조하는 이신칭의 교리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이에 착안하여, 이신칭의가 방종의 주범이 아니라는 점을 성경을 들어 변호하고자 합니다.

만일 비판자들의 말대로 은혜의 강조가 방종의 주범이라고 한다면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요 5:24, 3:36, 7:38-40)'고 하신 예수님이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갈 2:16)'고 외친 바울 모두 방종의 원인 제공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울이 방종의 원인자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면, 은혜의 강조가 방종의 주범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다 은혜를 남용하여 방종한 것이 아니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됐다는 사실에서 비판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오히려 남용과는 정반대로 그것을 거부하고 그것을 말한 예수와 사도들을 핍박했습니다. 이는 '예수 믿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면 예수를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강조가 죄를 부추기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 말씀으로 명명백백히 확증해 줍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5:20- 6:1,2).'

바울만이 아닙니다.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를 칭송한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  '죄인에게 베푸신 지극한 은혜(Amazing Grace)'를 노래한 노예장사(a slaver)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 등은,  넘치는 은혜가 결코 그들을 방종에 넘겨주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은혜가 사람들을 죄에서 자유케 한다고까지 말씀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은혜의 강조가 일부인들로 하여금 은혜를 남용하게 한 것은, 칭의유보자들의 주장대로 은혜 강조의 탓이라기보다는, 보다 근원적인 원인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유다서는, 옛적부터 심판받기로 미리 정해진 자들이 그리스도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의로 중생한 택자들은 결코 은혜를 방종거리가 만들지 않습니다.

또 하나 은혜의 복음은 그것이 지닌 영적 속성상,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본성적으로 복음의 은혜를 좋아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거룩한 것과 진주를 던지면 그것을 밟고, 던져 준 사람에게 덤벼들어 물어뜯는 개, 돼지(마 7:6)의 속성을 통해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은혜의 복음처럼 사람들로부터 극단적인 호불호(好不好)의 반응을 이끌어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은혜의 복음이 너무 좋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무관심 혹은 지독한 증오로 반응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양분된 반응이 바로 그러했으며(요 3:19-20), 이는 사도 요한의 말대로, 그가 빛에 속했느냐 어둠에 숙했느냐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갈려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회중들은 두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행 2:37) 3천 명씩 회개의 결실을 맺었고(행 2:14-41),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똑같이 마음의 찔림을 받았으나(행 7:54), 증오심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행 7:59). 이 모든 사실들은, '은혜의 강조가 남용과 방종을 불러왔다'는 칭의유보자들의 막무가내식 주장이 근거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은혜의 강조가 방종을 낳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일도 소홀히 않으셨습니다. 방종을 경계시키는 대표적인 구절이 아마,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갈 5:13)'일 것입니다. 여기서 '자유(freedom)'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 율법의 종 됨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이신칭의로 율법에서 자유한 자들은, 육신의 속성인 방종에로의 경향성(inclining)을 따르지 말 것을 주문한 것입니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거나 혹은 구원 탈락을 예방하려는 금욕의 장려도 아니고, 수양 종교의 자기 절제 요청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방종의 예방을 위해 몇 가지 방편을 주셨는데, 첫 번째가 사랑의 강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노니(고후 5:14)'는 그리스도인을 방종에서 건지는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부모 사랑을 듬뿍 받은 자식은 결코 잘못되지 않는다'는 격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결코 방종하여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241장의 가사처럼, 혹 일시적으로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 사랑의 강권을 받아 곧 다시 돌이킵니다.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하나님은 성도들을 각성시키고 북돋기 위해 항상 그들 안에 있는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합니다. 그들을 향해 던지는 권면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라(유 21, 요 15:9)'입니다. 이 사랑의 강권이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건사하는 제 일 원리입니다.

사랑의 강권은 방종을 막아줄 뿐더러, 성도들의 믿음을 북돋고 열심을 발분시키는 만능키(a panacea)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로 하여금 자신의 생애를 오직 예수 신앙에 천착케 하고(갈 2:20), 복음에 헌신하도록(행 20:20) 한 것이, 자기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강권이었습니다(갈 2:2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형제 사랑의 계명을 주실 때도, 그 자신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의지하여 호소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원리 역시, 자신이 성부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기독교는 사랑의 강권 없이 순전히 율법에만 고무된 행위란 없습니다.

재림 신앙을 각성시키는 방편도 사랑입니다. 신부된 교회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사모함으로 주의 재림을 고대합니다(마 25:1; 벧후 3:12). 어린 양의 혼인잔치인 그리스도의 재림 날은 신부된 성도들에게 신랑을 맞는 설레임의 날입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설레임이 성도들을 깨어있게 합니다.

젖먹이를 둔 엄마는 잠을 잘 때도 숙면에 빠지지 않듯, 그리스도를 오매불망하는 성도는 방종의 잠에 취해있지 않습니다. 신랑의 인기척이 들리면 벗은 발로 나가 맞으려고,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있기에(아 5:2), 결코 그리스도를 도둑처럼 맞이하지 않습니다.

은혜의 남용과 방종을 예방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충만은 성도를 방종에서 건져주는 강력한 통로입니다. 바울은 '주취(酒醉)의 방탕'과 '성령충만'을 대비시키면서, '성령충만'을 방탕을 예방하는 대책으로 제시했습니다(엡 5:18). 성령 충만의 능력이 속사람을 강권케 하여(엡 3:16) 방탕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줍니다. 성경은 참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원천을 성령이라고(빌 3:3) 말합니다. 초대교회는 일상의 인사가 '성령충만하십니까?'일 정도로 성령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오직 칭의받은 자에게만 부어지기에, 칭의가 종말까지 유보된 자들에게는 성령의 부어짐과 능력이 원천적으로 결핍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칭의유보자들에게서 성령 충만이니, 성령의 능력(롬 15:18, 고전 2:4), 성령으로 말미암은 풍성한 삶(요 7:38) 같은 언급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대화나 논점이 온통 구원의 인과(因果) 법칙과, 종말의 칭의를 위해 '차카게 살자'는 삭막한 율법적 고무뿐인 것은, 칭의 유보에 따르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들이 칭의론자들을 향해 날선 비판과 독설을 쏟아내는 강퍅함도, 성령 없는 영혼의 삭막함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영광의 추구가 방종을 예방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하나님 영광은 의(義)로 거듭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고, 지고의 즐거움이며(롬 5:1, 소요리문답 제1문), 모든 행위(doing)의 강력한 동인입니다(고전 10:31).

이러한 하나님 영광에의 열망은 때론 자기 안위를 초월하고, 자기 생을 불사르기까지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는 것은 지극히 망령된 일로 여겨지며,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115:1)'가 그들의 기도제목이 됩니다.

그들은 방종 역시 하나님 영광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방종이 갖다 줄 자신의 이해득실보다는-예컨대 방종하므로 벌을 받는다거나 하는-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아더 핑크(A. W. Pink)가 참 중생자들은 죄를 피하는 목적이 심판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영광의 침탈 때문으로 보고, 청교도들이 참 회심자와 거짓 회심자의 판별 기준을 하나님 영광에 둔 것도 이러한 견해와 맞닿아 있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이신칭의 교리를 고수하려 애쓰는 것도, 공격자들의 주장처럼 값싼 구원 혹은 쉬운 구원에 홀릭(holic)돼서도 아니고, 오직 믿음(은혜)으로 되는 칭의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말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벧전 1;3-6).'

이처럼 이신칭의의 은혜를 베푸는 목적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죄인들에게 베푸신 이신칭의의 은혜가 방종을 낳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면, 은혜를 베푸신 목적에 배치됩니다. 당신의 영광을 지고의 목적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 자기 영광의 손상을 갖다 주는 은혜 시혜를 하실 리 만무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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