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40장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3)

자기는 인격과 정신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기는 인격의 가장 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인격의 균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무게중심을 생각하게 만든다. 물체가 작은 알갱이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하나의 물체 내에 존재하는 모든 알갱이들은 각각 지구의 중력을 받으며, 그 중력들의 합이 물체의 무게이다. 이것은 물체의 무게가 대단히 많은 나란한 힘들을 합친 것이며, 그 합력의 작용점을 물체의 무게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격이나 정신에서 차지하는 자기의 존재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1. 자기 및 자기상(像)의 발견

우리는 앞에서 '자기'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자기는 인격을 통일시키고 전체성을 지향한다. 의식과 무의식에 중심 역할을 한다. 즉 모든 원형과 의식의 표현 형태를 조화시켜 전체를 이루는 원동력이다. 자기는 자아와 조화를 이루고 세계와의 조화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자아와 세계의 조화는 중추적 역할을 감당한다. 자아가 갈등에 시달리는 것, 만족스런 느낌 등은 모두 자기 역할의 결과이기에 자기의 발견은 내적 및 외적 인격을 조화시켜 정신적 성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인격의 성숙은 자기의 발견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기'를 발견하는 몇 가지 방법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자기의 상징

'자기'는 '자기상(像)'의 상징을 통하여 드러낸다. 무의식은 정신의 가장 심오한 핵심인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상징'을 통해서이다. 융은 자기(Selbst)는 상징(Symbol)을 통하여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원형의 상(像)이다. 여성의 꿈에서는 자기상은 보통 초인적인 여성상(像), 즉 무녀(巫女), 마녀(魔女), 대지(大地)의 어머니, 자연이나 사랑의 여신(女神)으로 나타난다. 반면 남성의 꿈에서는 남성적인 완성자에로의 인도자, 수호자, 노현자(老賢者), 자연의 정령(精靈) 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자기상'은 동일한 성(性)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니마와 아니무스에는 대립적이다. 다만 자기상은 보다 성화된 사람, 초월자의 상으로 인격화된다.

자기상(像)에 적합한 예로 오스트리아의 검은 공주(黑公主)의 민담이 있다. 마법에 걸린 흑공주를 밤에 지키는 경비를 서야 되는 병사들이 있었다. 그것은 왕의 명령이어서 어길 수가 없었다. 병사들은 그 경비하기를 다 꺼린다. 그 이유는 흑공주가 매일 밤에 일어나서 경비병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한 병사가 경비를 설 차례였다. 그는 겁낸 나머지 숲 속으로 도주하고 만다. 거기서 그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나이 많은 연주가를 만난다. 그 노인연주가는 그에게 교회 안에 숨을 곳을 일러주고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흑공주가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신비한 도움으로 그 병사는 실제로 공주를 마법에서 풀고 그녀와 결혼하게 되는 행운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민담은 노(老)기타연주가, 그 노인의 도움으로 그 병사는 파괴를 면하고 오히려 좋은 현실을 접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심리학적으로 보면, 노(老)기타연주가는 '자기'(das Selbst)를 상징하는 인격화이다. 그 노인이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 병사의 자기(das Selbst)의 전형적인 인격상(像)이다. 자아는 결국 '자기'의 도움으로 파괴를 면하였다. 그것은 아니마의 매우 위험한 측면을 극복 및 구제한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남성들의 꿈에서는 '자기'는 흔히 초월자나 '노현자'의 형태로 인격화된다. 여성들의 꿈에서는 '자기'는 현명하고 막강한 여신(女神), 초월적인 특성을 가진 대모(代母)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인격화 된다. 조상의 누구나 오래 전에 이미 죽은 모친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기'가 반드시 노현자나 초월자의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적인 형태도 있다. 이른바 '자기'의 역설적인 인격화이다. 이는 젊음과 늙음을 동시에 표현하여 시간의 특성을 뛰어넘을 때이다. 어느 화가(畵家)는 야성적인 말을 타고 가던 한 젊은이가 꽃이 있는 길을 지나는 꿈을 꾸었다. 그 젊은이가 타고 있는 말은 대단히 야성적이고 에너지의 상징이라 할 만큼 힘이 센 말이었다. 그리고 짙은 은회색의 털을 가진 멋진 명마 같았다. 그 젊은이는 꽃이 있는 곳에 이르자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렸다. 말이 꽃을 해치지 않도록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그는 말을 조심스럽게 끌고 걸어간 것이었다.

이 꿈을 분석하면 젊은이는 화가인 '자기' 인격화의 상(像)이다. 그 젊은이는 새로운 생명과 창조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인격화이다. 화가에게 모든 것이 생명과 의욕으로 가득 찬 정신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준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인격상은 나이를 초월하여 나타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가질 수 있다.

2) 자기의 인격화된 상

'자기'의 인격화된 상(像)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로 생애의 전환기나 사상의 전환시점에 등장하는 수가 있다. 그러니까 '자기'는 꿈꾸는 사람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시기에 꾸는 특별한 꿈이다. 이 시기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와 인생의 모든 방법이 변하는 그런 전환점이다. 대체로 물을 건너는 행위로 상징화 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40대 후반의 중년 여성의 꿈을 들 수 있다. 그 여인은 어느 강에 이르러 강을 건너야만 되었다. 그러나 그 강은 다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널찍한 나무판자로만 가로 놓여 있었다. 그녀가 건너려고 하자 마침 학교가 끝난 짖궂은 고등학생들이 뛰어 올라 그녀는 하마터면 물에 떨어질 뻔하였다. 그 때 반대편에 있던 한 소녀가 작은 손을 뻗쳐 도와주는 꿈이었다.

이 꿈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기독교인이었으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편이 아니어서, 그런 자신에 대해 갈등하는 형편이었다. 그녀는 물이 고여 잘 흐르지 않는 강을 건너야 할 형편인데, 해결되지 않은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 생의 흐름이 정체되어 있는 것을 나타낸다. 강을 건너는 것은 흔히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꿈을 꾼 그녀가 학생과 관계되는 것은 자신의 학생시절의 인격화이다. 그녀가 가진 생각, 동경이 그 시절에 충족되었던 시기이다, 따라서 강을 건너는 그녀의 행동은 작지만 초자연적인 힘이 그녀를 도운 소녀로 인격화 되었다. 그 소녀는 '자기'의 인격화된 상(像)으로 나타난 것이다.

3) 우주적인 인간상으로서 자기

자기는 우주적 인간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우주적 편만의 뜻을 가진 것으로 전 우주를 포괄하고 있는 상징적 인간이다, 마치 신화와 종교적 교훈에서 우주적 인간은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것과 같다. 우주적 인간상은 전 세계의 기본원리로서 기술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닌다. 이 상이 나타날 때는 갈등이 창조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많은 신화의 증거에 의하면 우주적 인간이란 모든 생명의 창조와 시작일 뿐 아니라 최종 목표이기도 한다.   

인간이 외적으로는 배고픔, 권력, 성(性), 생존, 종족보존 등과 같은 목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따르는 여러 욕구들을 초월하여 참된 인간상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이 우주적인 인간상은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우주적 인간상은 '자기'와 일치되는 점이 있다. '자기'란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것, 즉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이유로 자기는 정신적 현실에서는 오직 상징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생동적인 신비를 드러내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무의식은 이 신비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엄청난 우주적인 규모의 강력한 인간상을 선택한다. 이른바 우주적 인간상(像)이 그것이다.

4) 자기와 동물의 상

'자기상'은 동물로 상징된다. '자기'의 동물로의 상징은 신앙의 입장에서는 잘못하면 미신적인 요소라는 통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신앙의 차원보다 신화나 민담의 차원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짐승은 우리의 정신의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신화나 민담에서 동물이 사람보다 먼저 위험을 안다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동물은 때로 자연계에서는 영적인 특성을 보이는 면이 상당히 있다. 무엇보다도 짐승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특성을 그것이다. 만약 동물이 이런 신비한 특성을 가진 것이 옳다면, 내적, 외적 연결성을 갖는 정신적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런 특성이 바로 '자기'의 특성인 것이다.

인간을 감싸는 주변의 자연환경, 그리고 우주전체에 대한 '자기'의 관계는 우리 정신에서는 '핵원자'(核原子)인 것이다. 이 핵원자는 내적, 외적 관계를 연결 짓는 속성을 지녔는데, '신비'라고만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특성은 자연에도 있다. 초식동물들이 1년 중에 풀이 가장 많은 시기에 새끼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동물학자인 아돌프 포르트만(Adolf Portmann)은 각 동물의 내적인 내향성과 관련된 '정신화'(精神化)를 설명하였다.

그에 따르면 각 동물의 내적 특성(Innerlichkeit)은 주변의 자연세계를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을 '정신화'(verseelen), 즉 영혼화시킨다. 이것은 인간이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생활 속에서의 조화성과도 기묘하게 일치를 이룬다. 인간의 무의식은 주변의 것들, 사회집단, 사회일반, 이것을 넘어선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 그리고 전(全)우주와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상'의 동물의 상징을 한 여인의 적극적인 명상을 예로 들 수 있다. 그 여인은 적극적 명상의 보고서에서 자신의 체험을 보고하였다. 여인은 명상에서 사슴으로 상징화된 '자기상'을 만난다. 그 사슴(자기상)은 자아(여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아이며 당시의 어머니입니다. 남들은 나를 '맺어주는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나는 사람, 동물, 심지어 돌일지라도 내가 그 속에 들어가면 서로 연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의 운명, 또는 객관적인 자아입니다. 내가 나타나면 인생의 부질없는 모험에서 당신을 구제합니다. 나의 안에서 타는 불꽃은 전체 자연 속에서 타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잃는다면 그는 이기적이며 외롭고 방향을 잃으며 약해집니다." '자기'는 이처럼 동물로, 더 나아가서는 무생물로도 상징화 될 수 있다. 특별히 돌은 그 중요한 예이다. 이는 더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하는 대목이므로 따로 기술되어야 할 문제이다.   
    
2. '자기'의 개성화와 만다라

융은 정신적인 발전의 목표를 자기(自己, Selbst)에다 두었다. 그가 1918년에서 1920년 사이에 깨달은 결과였다. 이 발전은 하나의 원리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직선적인 발전이 아니라 자기의 순환적 발전(Circum-ambulation)이 그것이다. 이는 직선적보다 순환적이라는 것은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단계보다 조화의 성격이 짙다. 더욱이 일방적인 발전은 초기에 있을 뿐이며, 그 이후에는 언제나 중앙에 대한 제시로 일관한다.

이러한 융의 이론은 정신이 조화를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외부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생활하기 쉽다. 그런가하면 자기와 관계된 내부의 의도, 즉 생명의 흐름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상징을 도외시할 수 없다. 이러한 암시와 신호 등이 꿈과 외부적인 사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혼의 조절축이라 할 '자기'의 접촉을 의미한다.

1) 의식의 일방성과 과도한 자아의식의 강화

현대인이 생의 공허감과 권태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기'와의 조절, 조화의 문제와 관련되는 문제이다. 그 근거는 다음의 두 가지에 두고 있다. 첫째는 정신적인 균형을 잃게 하는 일방성이 그것이다. 인간의 단일한 본능적 요구나 정동적인 상(像, image)은 일방적인 방향을 지향한다. 그 결과는 영혼의 조절축과의 균형, 내적 균형을 잃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여러 요인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과도한 공상은 주된 요인의 하나이다. 인간의 과도한 공상은 콤플렉스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를 맴돌다가 결국은 콤플렉스를 자극시킨다. 이로 인해 의식이 집중되고 계속되는 방해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일은 동물에게도 일어난다. 성적(性的)으로 흥분한 동물은 배고픔과 신변의 안전성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것이 그 예이다. 그와 같은 일방성이 바로 영혼의 균형상실을 초래하게 만드는 것이다. 원시인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영혼의 상실'이라 했다. 두 번째는 정신의 균형상실은 자아의식의 과도한 강화에 있다. 자아의식의 강화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인이 문명된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반면 그것은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오는 충동과 신호를 수용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한다. 현대인이 꿈이 무의식의 중심, 즉 자기를 향한 의식의 태도를 개선하는 노력임을 수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중앙을 향하게 만드는 만다라

융은 자기상의 발전과 관련하여 만다라(mandala)를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것을 수없이 그렸다. 그 후 만다라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자기'의 중심과 균형을 발견하였다고 술회한다. "내가 만다라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걸어간 길, 그 모든 발자취,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다시금 하나의 점, 즉 중앙(Mitte)에 귀착함을 보았다. 만다라가 중심(das Zentrum)이라는 것이 더욱더 분명해졌다. 그것은 모든 길의 표현이다. 그것은 중앙으로 향하는 길, 즉 개성화(Individuation)에의 길이다."

'만다라'는 불교, 특히 밀교계의 불교에서 승려들의 수도의도구로 쓰이던 그림이다. 그것은 원과 사각(四角)의 구성을 기본으로 그 중앙에 최고의 원리를 상징하는 상(像)이 도식되어 있다. 만다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원륜(圓輪) 또는 마법의 원(魔法의 圓)이라고 한다. 융은 만다라에 관해서 알기 이전에 자기상에 관한 신화적 표현에서 네 각(角)을 강조되는 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많은 그림 가운데 위대한 사람은 이 넷으로 구분된 원의 중심에 그려지는 질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본질을 알 수 없으나 인간 정신의 핵원자로서의 상징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임상에서 피분석자들의 꿈에 곧잘 4로 구분되는 형상이나 인물의 배치. 또는 원의 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의 균형과 관계된 모든 해리된 정신을 통합하는 마음속의 기능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융은 역사적으로도 서양이나, 고대에 '그리스도'의 4복음서(書)가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원(圓)과 사위(四位, Quaternitaet)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 중요성은 전일(全一)의 경지로서 역할이다. 원 또는 구(球)가 인간의 영혼, 인간 마음의 전체, 또는 핵심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동양학자들의 도움도 한몫했다. 융이 만다라의 특이성을 발견하고 그 보편성을 확신하지 못했던 때 침머(H. Zimmer), 빌헬름(R. Wilhelm) 등과 교제하게 되었다. 그들의 동양사상 소개로 그것이 보편적인 자기원형상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곧 이를 발표하게 되었다. 

만다라로 모든 정신의 기능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융이 정신의 발전을 추구한 시도일 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술한 '자기'에 관한 상징성에 대하여 모두 기술한 것도 아니다. 누구나 이를 다 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상징성이 대단히 다양하고 그 해석에 난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모든 이론이 모두 정신의 특성을 설명하거나 해결해 줄 수도 없다. 그것은 일정한 한계를 갖는 성격이 아니어서 치료자의 끊임없는 체험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갖는 특이한 성격인 동시에 그 인식의 문제를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에 대하여 기술했다. 자기는 분석심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했다. 자기란 존재의 근본으로서 자기의 전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는 일반적으로 상대방이나 타자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보통의 단어나 용어가 아니라 인격의 중심이자 핵심이 된다고 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깨달을 때, 다시 말하면 "나는 누구인가?"를 진정으로 깨닫는 문제는 바로 자기를 인식하고 발견하는 문제가 된다. 이런 자기는 단순히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정체성의 문제를 더 넘어서는데, 이는 진정으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한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인격의 중심이 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아를 정신의 중심이라고 알고 있는 것에 비해, 자기는 매우 생소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우리가 정신에서 더 깊은 주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자기에 대하여 우리는 겉사람과 속사람이라고 구분할 때 속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특성을 가졌다. 자신의 내면에 자리하는 자신의 모습이 바로 자기라는 점에서다. 이런 자기에 대하여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갖고 연구해 나갈 때 자신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