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9장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2)

'자기'는 분석심리학에서 인격의 중심이 된다고 했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어 그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인격의 중심이란 인격의 핵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가 인격과 정신의 구조에서 겉과 속 부분에 해당하는 측면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가 과일로 말하면 씨와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는 인격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는 자기의 문제가 이해하기에 또는 인식하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에 해당하는 이유이다.

1. 자기의 일반적인 특징

분석심리학은 인간을 보는 입장이 있다. 분석심리학의 인간관은 앞에서 밝힌 대로 정신의 전체성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융이 정신의 전체성을 중요시한다는 시각이다.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나뉠 수 없는 자기(自己)의 전체적 존재이다. 정신의 전체성, 즉 자기란 모든 생물학적, 정신적 일어남의 고유한 원동력(spiritus rector)으로 나타난 전존재(全存在)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에 대한 이해는 인간존재의 이해이면서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이러한 자기의 일반적인 특징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자아와 동일하지 않은 자기

자기는 자아(自我, Ego)와는 다르다. 자기는 우선 자아와는 구별된다는 말이다. 자아가 의식의 주체라면, 자기는 무의식의 주체요, 전 인격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아는 의식과 관련되어 행동하는 '일상의 나'라면, '자기'는 무의식과 관련되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본래적 나'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아가 '경험적 나'라면 '자기'는 '선험적 나'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정신의 차원에서 주객관계로 본다면 '자아'가 객체라면, '자기'는 주체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자아가 인격의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인격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자아와 이렇게 다른 점은 아마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구분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한다. 그러니까 자아는 의식에서, 자기는 무의식에서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물론 구조적인 차이지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의식의 중심에 자리하는 '자기'의 존재란 의식초월적(bewusstseinstranszendent)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자기의 존재는 의식으로는 파악이 곤란하다. 그렇다고 자기의 존재에 대한 실체의 파악이 의식적 또는 직접적으로는 어렵기는 하지만, 다른 가능한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존재를 의식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그 실체의 작용을 통하여 그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존재는 우리 내부에서 스스로 작용하고 있는 어떤 것(etwas in uns selber Wirkendes)으로서 체험될 수 있다. 융은 현실(Wirklichkeit)이라는 말이 작용하다(wirken)에서 나온 것임을 주목한다. 우리들 내부에서 스스로 '작용'하고 있는 어떤 것이야 말로 진정한 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작용하고 있는 것'에서 표현되고 있는 그 작용이란 다름이 아닌 원형(原型, Archetypus)의 작용이다.

모든 원형은 중심원형인 자기원형(自己原型, Selbstarchetypus)과 관계하고, 다시 그 중심원형에로 돌아가려 한다. 그것은 자기원형 혹은 '자기'가 갖는 특성 때문이다. 이런 원형의 작용은 원형의 초월기능적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의식적 자아의 분별성을 지양하여 정신의 전체성인 '자기'를 이루는 기능이고 세계와의 관계에서는 주객합일(主客合一), 주객통합(主客統合)의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체험 속에 드러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 곧 '진정한 나'인 것이다.

2) 정신의 핵심으로서 자기

'자기'란 인간 정신의 핵심이다. 융은 자기 안에서 분석심리학의 본질적인 대상을 인식하였다. 그는 더 나아가서 모든 심리학에 대한 노력의 목표와 개인 인격에 대한 과정의 최고봉을 본다. 그러기에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하는 중심이며 범위가 된다. '자아'가 의식의 중심인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는 정신의 총체성(Totalittaet)의 중심인 것이다. 자기와 자아(自我, das Ich, Ego)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이런 자기(自己)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자기'는 본래적 '나'란 특성을 갖고 있다. 본래적인 '나'란 의식을 초월해 있고, 체험이 불가능한 특별한 특성이기에 이는 원형과 관련되어 파악되는 개념이다.

자기의 이런 특성은 필연적으로 무의식의 심층인 '자기 원형'을 관계시킨다. 그러나 자아와 자기의 관계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상호관계 및 영향의 정도는 조절을 필요로 한다. 자아의 자기에의 영향도가 높으면 자기팽창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아가 자기의 동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융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자아가 자기에 의해 동화된다면, 정신의 심각한 혼란이 일어난다. 전체성의 상(像)은 무의식에서는 경화시킨다. 그러기에 그 상(像)은 한편으로는 무의식의 고태적 본성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무의식에서 포괄되어 있는 한에서는, 이를 특징적으로 하는 정신으로 관계된 시공간연속성에서 존재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자기의 본래적인 모습을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남이 자신을 평가해 주는 것에 우쭐해 하거나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가 기대 이상인 경우로 평가되면, 한 없이 기분이 좋지만, 기대 이하로 평가를 받으면 몹시 불쾌해 한다. 놀랍게도 사람은 이런 자기를 끝내 바로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체(Ganzheit)로서 살 것을 스스로 요구받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신으로서 살지 않고 어느 한 면만을 내세우고 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자신의 다른 면이 삶의 일부로 마저 참여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 시각에서는 자아가 의식에만 집착하면 무의식은 대상기능을 발휘하고 의식에 포함되어 전체가 되려고 한다. 그것은 무의식이 의식에 갖는 특성이기도 한데, 이는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전체가 되게끔 하려는 원동력으로 우리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을 가리는 자신의 탈(Maske, Persona)이 있다. 사회와 이웃, 다른 사람의 투사와 기대에 의하여 만들어진 탈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자신을 둘러 싼 여러 여건들이 진정한 '자기'를 은폐시키지만, '자기'는 자아의식에 집착하여 좁고 경화된 '역할' 속에만 매달려 기계적인 인생을 보내지 않도록 촉구한다. 그로 하여금 주어진 전생명력을 불태우도록 무의식의 힘을 통해서 의식에 작용한다.

그 힘은 자아의식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자체의 목적에 의하여 의식에 작용한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 아닌 그 자신의 전체가 되도록 자극한다. 이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자기가 정신의 핵심으로서 작용하는 자기원형(Archetypus des Selbst)의 기능이다.

3) 집단무의식의 내용으로서 자기

자기는 집단무의식의 내용이다. '자기'는 집단무의식의 '알맹이'라는 말이다. 융에게 있어서 개인무의식의 대표로서는 콤플렉스이다. 그 반면에 집단무의식의 대표로서는 '자기'일 수 있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구별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존재를 사람들의 실수, 잊어버림, 공상, 노이로제나 각종 정신장애의 증상, 그리고 꿈에서 찾았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한 개인의 억압된 정신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겪은 개인생활에서의 체험내용 가운데 무슨 이유에서든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때로 현실세계의 도덕관이나 가치관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이와 같은 무의식의 내용이 개인의 특수한 생활체험과 관련되어 개인적 특성을 나타낸다. 융은 이를 개인무의식(個人無意識, das persoenliche Unbewusste)이라 부른다.

무의식에는 개인적 특성과는 관계없는 보편적인 특성이 있다. 사람이면 누구에게서나 발견되는 보편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은 태어난 이후의 경험내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태어날 때 이미 가지고 나오는 무의식의 층이며 일찍이 의식된 일이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개인보다는 인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융은 이를 집단무의식(das kollektive Unbewusste), 초개인무의식(das ueberpersoenliche Unbewusste) 혹은 비개인무의식(非個人無意識, das unpersoenliche Unbewusste)이라 하였다. 집단무의식의 그 내용, 즉 알맹이가 바로 '자기'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가 무의식의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한 것의 중심에 자리한다. 이것은 마치 사과의 부분을 절단하면, 씨가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것처럼 정신을 그와 같이 절단하면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도 같다. 이는 자기가 집단무의식의 중심이 되는 이유이다. 이와 관련한 융의 언급은 그 반증이 될 것이다. "중앙으로 차차 다가감으로써 '비어 있는' 중앙의 영향 때문에 자아의 값이 떨어집니다.

'비어 있는' 중앙은 결코 원형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원형의 존재를 가리키는 근거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식으로 표현해서 원형이란 도(道)의 '이름'일 뿐, 도 그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회 신부들이 도를 '신'이라 번역하였듯이, 우리는 이 중안의 '비어 있음'(虛)을 신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비어 있다고 해서 결손이라든가 부재(不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최고의 강도를 지닌 인식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이다. 융이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자기'라고 불렀다고 해서 인식할 수 없는 것의 작용이 총체적인 이름을 얻은 것 이외의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을 알 수 없는 큰 부분이 자기 속에 들어 있지만, 그 경계와 넓이를 말할 수 없으므로 알려진 정신과정으로 충족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므로 자기란 한계개념이라는 의미일 뿐이라는 점에서다.

2. 자기의 특수적인 특징

자기의 특징은 일반적인 특징과 특수적인 특징으로 구분해야 한다. 자기의 일반적인 특징은 자기의 존재론적인 차원이라면, 자기의 특수한 측면은 기능적인 차원에서 구분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의 일반적인 차원과 특수한 차원의 구분은 자기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는 자기의 특수적인 특징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하여 기술할 수 있다.

1) 의식과 무의식의 전부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의 전부이다. 자기란 의식과 무의식을 망라한 전부를 말한다.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은 하나를 이루어 전체가 되고자 하는 측면이 있다. 정신에서 그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 전체성을 이루는 원동력이 '자기'이다. 전술한 대로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여 중심에 위치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정신의학자들이 환자를 개인적인 환자로서만 아니라, 전체의 인간으로 보기를 주장한다. 물론 그 전체성(全體性, wholeness, Ganzheit)의 개념은 인간관에 따라 학자마다, 학파마다 다르다. 다만 분석심리학의 인격 또는 정신구조에서 인간의 의식뿐 아니라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 무의식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전체성에 기초한다.

정신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가 보완하고 보충하는 특성을 가졌다. 이런 것이 구조적으로는 무의식이 속에 있고, 의식을 그것을 둘러싸는 위치에 있다. 그러면 이것의 가장 가운데에 해당하는 것이 자기다. 가장 가운데에 자리하는 자기는 이제 인격의 전체성을 전체성은 한 인격이 전체를 지향한다. 하나로 통합되려는 특성은 형태적으로는 언제나 하나를 이루지만, 그 내면에는 서로 다른 특성 때문에 일치를 이루기가 쉽지 않은 특성을 갖고 있다. 이런 일치의 문제가 거의 가까우면 통합된 인격이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장해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기가 의식과 무의식의 전체를 합한 그 중심에 있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인격의 전체성은 분열을 지양하는 특성이 있다. 의식이 일방적으로 의식만을 고집하면 자기 자신(Selbst)으로부터 소외된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무의식에 대한 의식적 관계도 상실된다. 그것은 두 개의 정신세계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에 무의식은 이러한 단절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은 정신에서 단절된 상태를 이으려고 애쓴다. '자기'는 두 연합의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다. 흔히 사람들이 정신적 위기에 있을 때 자기의 원형상이 출현하는 것이 그 실례이다.

이런 경우에 자기 자신으로부터 심한 소외와 단절 -그것이 "병(病)"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이는 정신기능에 장애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융은 이런 정신의 상태를 두고 다른 측면을 본다. 이것은 이러한 정신의 상태를 새로운 기회로 보는 것인데, "병(病)" 또는 "장애(disorder)"는 정신의 분열을 극복하는 귀중한 기회라는 것이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자기와의 일치가 실현된다는 점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때 병은 사라진다는 점에서다. 다만 정신에서 자기와의 일치, 정신적인 해리의 극복은 고통을 수반하는 창조과정인 셈이지만, 그것은 편안한 것이 아닌 쓰라린 고통임에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2) 자기의 양면적인 측면

자기에도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 모든 원형에는 밝고 어두운 양면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신은 그 특성상 이런 양면적인 특성, 즉 대극으로 이루어진다. 실제로 모든 정신현상은 서로 반대되는 대극의 긴장과 갈등과 통합의 과정에서 진행된다. 의식과 무의식, 남성성과 여성성,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정신과 신체, 높고 낮음, 우월기능과 열등기능, 내향과 외향, 합리와 비합리, 강함과 부드러움, 어른과 아이-무수히 많은 대극성 속에서 우리는 삶을 경험한다.

이런 대극성은 정신의 원초적인 조건이다. 이 가운데서 '자기'는 전체정신으로서 밝고 어두운 면을 그 안에 포괄하는 특성을 갖는다. 자기가 대극의 융합, 대극합일의 사징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54년 빅터 화이트(Victor White)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융은 자기의 상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상을 언급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자기는 단일성입니다. 그러나 둘, 즉 대극으로 이루어진 단일성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전체성이 아닐 것입니다."

자기(自己)는 음양이 합하여 도(道)를 이룬다는 동양사상의 도(道)개념에 일치된다. 전체성이란 밝은 면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림자가 함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원형의 그림자도 그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얼핏 보기에는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대극을 한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갈등과 긴장은 강해지지만 대극의 존재와 대극의 갈등을 삶 본연의 요청으로 받아들이고 대극을 철저하게 체험해 나감으로써 정신의 전체성, 즉 자기에 도달한다. 그 결과는 그 타협이거나 하나가 다른 것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대극을 뛰어넘는 하나의 경지, 융이 초월기능이라고 부른 것에 의한 새로운 의식성의 탄생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자기의 어두운 측면이 궁금해진다. '자기'는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와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이런 '자기'의 부정적인 측면은 매우 위험성을 내포한다. '자기'가 정신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식(意識)적 자아에 커다란 위험성을 초래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자기'의 이런 힘은 주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지배'하는 과대망상, 또는 망상적인 환상들을 산출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대개 흥분의 절정에 도달하여 자아도취, 자아팽창 그리고 자아착각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유머 감각의 상실과 대인접촉의 상실이 발생하는 것이 그 징후이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자기'가 이런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자기'의 어두운 측면은 더 심각한 특성을 촉발할 요인이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격의 발전에 작용할 수 있는 힘인 동시에 인격의 파괴를 가능케 하는 요소일 수 있다. 이는 더 나아가 생명의 발전을 가능케 하며 창조적인 인격에 기여하는 동시에 생명력의 무기력과 육체의 죽음까지도 가능케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앞장에 이어서 인격의 중심으로서 자기에 대하여 기술했다. 자기는 분석심리학에서 인격의 중심이 된다고 했는데,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털어 그 중심이 되기 때문이었다. 인격의 중심이란 인격의 핵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자기가 인격과 정신의 구조에서 겉부분과 속부분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특성을 갖는다는 점에서였다.

이것은 자기가 과일로 말하면 씨와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기에 자기는 인격에서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하고, 그것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는 자기의 문제가 이해하기에 또는 인식하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에 해당하는 이유라는 점에서 자기를 일반적인 특징과 특수적인 특징으로 구분하여 다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