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소설 <1Q84>에서 기독교를 옹호했다?

이대웅 기자 입력 : 2017.08.27 17:08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진리 재발견하기’ 나선 오지훈 작가

희생되는 진리 오지훈
▲오지훈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고,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대화할 때 어떤 접점을 찾아 공감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다면 나름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고 책 서문에서 밝혔다. ⓒ이대웅 기자
기독 출판계에 '대형 신인'이 등장했다. 스스로를 '덕후'라고 부르는 오지훈 작가(38)는 자신의 첫 저서 <희생되는 진리>를 통해 철학과 문학 등 인문학을 통해 기독교와 십자가 복음을 변증해 나간다. 오 작가는 성경의 권위, 신앙 또는 신학에 기대지 않고 기독교를 변증하려 했다. "서로 반대되는 입장과 대화하려면 소통 가능한 언어와 논리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으로, 저자의 말에 따르면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 진리 재발견하기'를 추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1923-2015)의 '모방욕망과 희생양 매커니즘'을 소개하고,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와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을 지라르의 이론으로 분석한다. 오 작가는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과 집단폭력이 악하다고 꾸짖는 유일한 텍스트가 성경이고, 그 절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했다"며 "이런 논의를 통해 지라르는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변증하는 것은 무엇보다 희생양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기독교의 '사랑'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에 앞서 대표적 무신론자 버트런드 러셀의 논리주의적 인식론을 따져보고, 그의 입장을 반박했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과 수학자 괴델의 증명을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종의 '실천' 편으로,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면서 동성애 문제를 논하고, 복음주의와 진보의 접점을 탐색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하루키. 오 작가는 "하루키가 기독교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소설에서 그리스도와 기독교는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라며 "게다가 <1Q84>에서는 일본 사회에 결여된 무언가를 치유할 수 있는 계기를 기독교의 사랑에서 발견하려는 듯 한데, 이를 지라르의 논의와 함께 다뤘다"고 했다.

저자는 공기업을 퇴사하고 북미 대륙을 여행한 후 1년간 도서관에 틀어박혀 읽고 싶은 책만 읽었다. 평소 '덕후'였던 하루키와 우연히 알게 된 르네 지라르의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책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은 오 작가와의 인터뷰.

-작가님 안의 어떤 질문이 공기업 대신 독서의 세계로 이끌었나요.

"그 질문이 제게는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뭐라고 한 마디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원래 인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경제학과였지만 이런저런 인문학 수업을 많이 찾아 들었습니다. 세미나나 콜로키움에도 자주 참석하면서, 푸코나 데리다 같은 현대철학자들에 대해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들의 시각이 참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복음주의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학문들을 배우면서 균열이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들의 말도 맞지만 어떻게 신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제 신앙과 제가 관심이 있는 인문학이 어떻게 의식의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주위에 없었습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을 갖고 이야기하거나, '대적기도'나 '영적 전쟁' 같은 말들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들이 허수아비를 상대로 싸우는 것 같고, 허망하고 공허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은 교회생활대로, 인문학은 인문학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니는 회사의 부서와 업무가 바뀌면서 야근과 격무가 잦아졌고, 맡은 업무에도 많은 회의가 들었습니다. 특별한 일 없는 안정적 '평생직장'이긴 했으나, 그곳에서의 제 미래는 사실 뻔했습니다. 공기업 특성상 답답한 부분이 있었고,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퇴사 후 특별한 대책이 있던 건 아니지만, 그냥 책을 맘껏 읽고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물론 이런 인문학 책을 쓰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웃음). '김동영'이라는 동갑내기 작가가 방송작가 일을 그만두고 중고차로 8개월간 미국 횡단여행을 하고 책을 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책 제목이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였습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저 역시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그래서 일단 미국과 캐나다에 6개월 체류했고, 체류기간 중간에 저도 중고차를 구입해서 45일간 미국 LA에서 뉴욕까지 횡단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책을 쓸 생각까지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스스로를 '덕후'라고 표현하셨는데, 이 정도 분량의 글을 쓰셨으니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책의 두께로 구분할 순 없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덕후'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전문가라면 하루키 책도 원서로 읽고 일본 문화와 비교도 하면서 좀 더 학문적으로 비평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저는 하루키의 팬으로서 그의 작품들을 반복해서 읽었을 뿐입니다. 그러다 하루키와 르네 지라르의 연결지점이 떠올라 책을 썼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덕후'는 무언가를 열광적으로 좋아하고 파고드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책은 논문과 같은 엄밀하고 학문적인 글이라기보다는 팬으로서 읽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자유롭게 풀어낸 글입니다."

희생되는 진리 오지훈
▲오 작가는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싶다는 차원에서 무신론자들의 책과 기독교를 비판하는 책을 많이 읽다가 르네 지라르의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 책도 으레 기독교 비판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새롭게 접근을 해서 정통 기독교 복음의 대속이론이나 십자가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있는 작업을 하고 있더라”며 “저는 그게 참신했고, 지라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서 그 분의 책을 다 읽어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대웅 기자
-이 책을 통해 하시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요.

"제목 그대로 '희생되는 진리'입니다. 1-2부에서 이론을 다뤘고, 3부에서 한국 상황에서 실제적인 내용을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적 무신론'은 워낙 많은 비판이 있기 때문에, 신의 존재 문제 자체로 논하는 것은 진부하지 않을까 해서 인식론과 철학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대표적 무신론자인 버트렌드 러셀이 어떤 근거와 전제에서 사유했고, 그런 생각들이 비트겐슈타인과 괴델로부터 어떻게 비판받는지를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유신론자였다는 것입니다. 둘은 언어철학과 수리논리학으로 다르게 접근했지만, 공통적으로 러셀의 논리주의에 대해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면 놓치는 게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지라르의 관점으로 니체와 하루키, 영화 <곡성> 등을 평하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 역시 우리가 단순히 '진보'와 '정의'라고 알고 있는 것 이면에 뭔가 중요한 것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동성애 찬성과 반대를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선처럼 인식하는데,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찬반 양쪽 모두 복잡한 것을 너무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런 부분에 있어 걸핏 하면 '영적 전쟁'으로 몰고 갑니다. 저는 설교에서 가장 거슬리는 말이 이것입니다. '진리는 단순하다'. 책에도 썼지만, 결론적으로는 단순할 수 있습니다. 상대성이론도 공식만 보면 얼마나 단순한가요?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도출하는 사유가 얼마나 큰 복잡성을 뚫고 나온 것인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런데 교회는 그런 복잡성을 간과하고 '진리는 단순하다'고 설명하려고 합니다.

동성애에 관해서도 양쪽 다 그런 복잡성을 무시합니다. 그러니 저쪽은 '사랑해야지 왜 혐오하느냐'고 하고, 이쪽은 '동성애는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양쪽 모두 너무 단순하게 접근합니다. 현대인들이 성경 텍스트를 읽을 때 불편한 부분들이 있을 수 있는데, 진보 성향은 너무 많이 나가고 보수 성향은 너무 문자에 얽매입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 양쪽에 충돌하면서 균형을 잡고 싶었습니다.

'진리'가 가진 입체적인 모습을 평면화시키면서 잃어버리는 부분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핏 보면 1-3부가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이 내용입니다."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책에서 언급하신 해법이 다소 이상주의적으로 들렸습니다.

"해법을 제시하려던 건 아닙니다. 쉽지 않은 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긴 어렵습니다. 저는 일부 열심 있는 신자 분들이 동성애와 이슬람, 종북을 연결시키면서 SNS를 통해 공포심을 유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이는 오히려 스스로의 입장을 불리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다만 저는 동성애를 법의 문제가 아닌 도덕의 문제로 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도덕과 기독교 입장에서 봤을 때, 동성애를 옳다고 말하는 것도 좀 아니지 않나 합니다. 퀴어신학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나아갔다고 봅니다. 기성교회들이 동성애를 긍정하지 않는다고 '혐오'로 몰아가는데, 이것도 좀 아니라고 봅니다.

도덕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민사회에서 어떻게 입법을 하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 내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말하는 것조차 잘못됐다고 한다면, 저는 교회 입장을 옹호할 것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잘못됐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희생되는 진리 오지훈
▲책 <희생되는 진리(오지훈 | 홍성사 | 444쪽 | 15,000원)>.
저는 레즈비언 출신으로 현재 목회자의 사모로 사역하면서 <뜻밖의 회심>이라는 책을 쓴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입장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오늘날 성도들을 돌보고 환대하는 태도를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도 따뜻한 사랑이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자신이 레즈비언으로서의 성적 지향을 포기한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교만이 드러나는 계기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로 회심한 그녀에게 '성적지향을 굳이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목회자들이 많았음에도,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과 권리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겸손의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거룩하고자 하는 동기와 레즈비언으로 계속 있으려는 동기 사이에 괴리를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해법을 제시하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포용할 수 있을까 정도를 생각해 봤습니다."

-게토화된 '교회 언어'를 지적하신 부분에서 공감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언어의 순기능은 없을까요.

"물론 장점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체감을 향상시켜 주고, 소통의 속도를 빠르게 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없어 보입니다. 논문을 쓸 때 학자들은 어려운 개념 언어로 논의하면서 대화 분량을 줄이고 빠르게 의사소통을 하는데, 교회에서도 그런 용어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전적 의미로 '상대를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이 좋다'고 할 때는 '신앙심이 좋다'는 차원입니다. 우리끼리는 이게 좋지만, 너무 여기에만 익숙해지면 다른 곳에 가서 말이 안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만의 언어'라는 인식 또는 자각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교회는 결국 선교하는 곳이고, 선교를 하려면 타자를 공동체 내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타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를 쓴다면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요즘 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만 듣고 곧바로 예수를 믿기로 결단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목사님들도 기존 성도들을 대상으로 설교를 준비하기 때문에, 안 믿던 분들을 믿도록 하는 내용이나 언어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새신자들을 관리하는 부서를 따로 만듭니다. 좋은 현상이지만, 이렇게 전담 부서를 만듦으로써 교회 공동체 전체는 '그건 그 부서의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 다른 성도들은 '새신자'의 존재 자체에 무관심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가 타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교회 언어만의 순기능도 있지만, 이는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같은 곳에서나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불특정 다수가 참석하는 공예배에서는 그런 언어들을 지양하고 타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의 진리를 신학 언어가 아닌 일반 학문 언어로 설명해 주셔서 신선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반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일상언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문제의식을 일상언어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분들이 소설가, 문학가들입니다. 요즘 말로 그 분들을 '리스펙트'합니다(웃음). 저는 그렇게 내러티브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소설가나 예술가들이 철학자들보다 생각이 앞서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문제들을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하면, 철학자들은 그런 문제의식을 좀더 엄밀한 개념을 사용해 언어화하는 것이지요.

신학 언어로만 이야기하면 신앙인들에게만 어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일반 학문 차원으로 넓히면,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깁니다. 일상언어로는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는 독자들이 노력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저도 쉽게 쓰려고 노력했지만, 혹시 어려우시다면 스스로 소화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 하나 알아가는 것이지요. 개념을 설명할 때는 다소 어려울 수 있지만, 굳이 쉽게 설명하는 시도가 오히려 개념의 참 의미를 왜곡하거나 오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지 '덕후'로서, 소설가처럼 관심있는 분야를 공부합니다. 소설가들은 쓰고 싶은 내용에 대해 취재하고 여러 책들을 살펴봅니다. 저도 그렇게 했습니다. 학자들은 학계의 여건상 그렇게 하지 못하는 편이지요. 소설가들은 굉장히 자유롭게 접근합니다. 저는 소설로 만들지도 못했고, 학자들처럼 이론화시킬 수 있는 체계적 훈련도 받지 않았기에, 담담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식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 면에서 봐도 이 책은 일상언어로 된 것이지요."

르네 지라르
▲지난 2005년 독일에서 개최된 국제 지라르 학회에서 강의하는 지라르 박사. ⓒ정일권 제공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신다면. 혹시 이 이론의 단점이나 약점은 없는지요.

"어떤 이론도 모든 현상을 설명해낼 순 없습니다.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하고 열어주는 것뿐이지요. 성경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진리들을, 어찌 하나의 이론으로 다 포괄할 수 있겠습니까?

아주 간단히 말하면, 지라르의 이론에서 핵심이 되는 개념은 '모방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입니다. 지라르는 개별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욕망을 다른 사람의 욕망을 따라서 욕망한다는 '모방욕망'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출발하는데, 이러한 개별 인간들이 모인 집단은 기본적으로 전체주의적 본성을 갖습니다. '희생양 이론'의 두 축은 모방욕망을 가진 개인들, 그리고 이들이 모여서 생기는 전체주의적 심리입니다.

저는 오히려 희생양 이론이 갖는 강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사회와 정치, 국가는 나름대로 민주화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사회를 구성하는 '작은 사회'들, 교회부터 학교, 회사 등 어떤 조직이라도 내부로 들어가 보면 여전히 '희생양 이론'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문열 님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엄석대라는 소위 '일진두목'이 있고, 전학 온 주인공은 엄석대에 저항했다가 왕따를 당합니다. 후반부에 교사가 바뀌면서 엄석대가 얼마나 독재를 했고 잘못됐는지 밝히고 나니, 침묵하던 모든 친구들이 비난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전학 직후부터 엄석대를 비난했던 주인공은 오히려 침묵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주인공인 화자가 말합니다. '나는 원래 쉬운 개종자를 믿지 않는다'고요. 물론 저는 이 소설의 문제의식에 다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이 작품 자체는 지라르가 말한 문제의식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회는 민주화됐지만, 여전히 작은 집단에서는 왕따와 이지메, 따돌림이 굉장히 심각합니다. 작은 집단에서 '희생양 이론'이 강점을 보일 수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느낀 것인데,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집단은 주류이지만, 그들이 흩어져서 직장이나 학교로 가면 다시 '소수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차원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사무실 안에서 왕따 당하는 사람을 보호해줄 용기가 있는가?' 지라르는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이영진 기호와 해석 영화 곡성
▲외지인(왼쪽)과 무명.
-지라르의 이론을 토대로 영화 <곡성>을 해석하셨는데요.

"지라르가 신화 텍스트를 검증할 때 사용하는 몇 가지 지표를 가지고 <곡성>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거기 나오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실은 무고한 희생양이고, '무명(천우희)'은 과거에 죽었던 희생양이라는 해석이 가능했습니다.

무명과 '일광(황정민)'이 겉으로는 적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외지인 살해를 부채질한다는 데서 그들이 희생양 메커니즘을 가동시키는 장본인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괴담이 도는 '곡성'이란 마을이 어쩌면 잘못된 루머에 휘둘리는 한국교회의 일그러진 모습일 수도 있다고 봤어요.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덕후'로서 그 작품 속 기독교의 흔적을 짚어내셨습니다.

"하루키가 특별한 점은 해외에서 오래 체류했고,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는 거의 이방인 취급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히트작 상당수도 해외 체류 시절 나왔습니다. 그래서 '일본'이라는 조국과 사회를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루키의 소설은 인간의 보편적 내면과 무의식을 잘 짚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작가나 평론가들은 하루키를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자국의 문단에서는 약간 '왕따' 비슷합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에서 소수자로서 이지메를 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 일본의 기독교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가장 심한 박해를 받았지요. 그런데 하루키는 미국과 유럽에서 나그네로 살았고, 일본 문단에서는 약간 이단자처럼 취급되기 때문에 그는 늘 변방의 소수자이자 경계인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편입니다.

이건 저의 가설입니다만, 그런 하루키에게 일본 사회의 기독교인은 아마 남다르게 여겨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저는 책에서 아오야마 가쿠인 대학의 신학부 폐지에 대해 하루키가 심각한 우려와 안타까움을 표했던 칼럼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1Q84 하루키
▲하루키의 <1Q84>.
실제로, 하루키의 소설에는 '양'이나 '일각수'가 자주 등장하는데, 평론가들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알레고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Q84>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하루키의 의식이 좀더 두드러지게 표출됐습니다.

<1Q84>의 2개의 달은 사실 1995년의 두 개의 사건, 고베 지진과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테러를 상징하는데요. 그 2개의 달이 떠 있는 세계의 지배자가 바로 '리틀피플'입니다.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와 대비되는 표현이죠. '리틀피플', 말 그대로 작은 사람들, 사유하지 않는 군중을 은유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리틀피플의 세계에 대항모멘트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소설의 두 주인공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입니다.

하루키는 두 사람의 사랑을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군중의 따돌림과 박해에 직면하여 희생양을 보호하는 용기로서의 사랑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리고 아오마메를 향유옥합을 깨뜨린 여인으로, 덴고를 그리스도로 비유하는 듯한 에피소드를 집어넣기도 합니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 전체주의의 문제가 드러나며, 지라르의 이론이 소환되고, 기독교적 사랑의 윤리가 새롭게 조명됩니다. 물론 이것이 저의 독단적인 주장일 수도 있지만, 책을 보시면 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현대 작가의 작품들에 관심이 많으신 것인지요. 고대나 근대 철학은 전제로 깔려 있는건가요.

"근대나 고대 철학은 잘 알지 못하기도 하고, 동시대 작가들의 문제의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고대와 근대의 철학자들 대부분이 기본적으로는 유신론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저작을 읽을 때는 아무래도 긴장감이 좀 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 작가나 철학자들의 문제의식이 근대나 고대 학자나 작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과거에 중요했던 질문은 오늘도 유효하게 중요한 질문으로 계승되고 있지요. 다만 오늘날 드러나는 문제들이 다를 뿐이지요. 현대인들이 고민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려면, 동시대 작가나 학자의 문제의식을 좀더 들여다봐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요즘 힘들어하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많은데, 당부하고픈 말씀이나 추천하고픈 책이 있으시다면.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제가 뭐라고 충고하거나 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냥 저의 경우만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일단 인생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꿈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떤 계기로든 그 길을 걷게 되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때가 왔을 때 '행동하는 용기'가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 용기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꿈 자체를 너무 내려놓진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꿈만 꾸면서 현실을 망각해서도 안 되겠지요. '퇴사하면 창업하겠어'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는 당장 계획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운 좋게 책을 써 내긴 했지만 오히려 더 불안하고, 뚜렷한 계획도 잡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안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법은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는 진짜 신앙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 말하자면, 하루키의 소설을 많이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신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되겠지' 하며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혼을 당한 남자, 가족이 없거나, 연인을 잃거나, 실직하거나, 부모를 떠난 아이 등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그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보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책하는 게 아니라, 현재 할 수 있는 일을 담담하게 해 나갑니다. 하루키 작품들이 그런 의미에서 제겐 '힐링'이 됐습니다.

신앙서적들은 많이 보실테니, 일반서적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부부의 <옥중서신(2권)>을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각각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쓴 편지들입니다. 보시면 알겠지만, 내용이 신앙으로 가득합니다. 부부가 정의로운 역사의식을 공유하면서, 또한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떻게 서로를 격려하며 기도하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특히 결혼을 앞둔 분이라면 모범적인 부부상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검열을 피해 작은 글씨로 못으로 눌러 쓰면서 주고받은 서신들입니다. 한편, 사형언도를 받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성경과 신학서적들을 읽으며 어떻게 불안과 공포를 신앙으로 이겨냈는지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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