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나라, 민족, 종교에 따라 죄 인식이 각기 다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극악한 죄가 어떤 나라에서는 합법적이고, 어떤 나라에서는 합법적인 행위가 어떤 나라에서는 극악이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아프리카 식인종의 식인(食人) 이나 이슬람의 일부다처는 그들 문화에서는 합법이지만 기독교 국가에서는 가장 혐오할 만한 죄가 됩니다.

또 절도죄는 대개 모든 나라에서 사소한 죄로 취급되나, 15-16세기 유럽에서는 극형으로 다스렸습니다. 절도범에게 사형이 언도됐습니다. 물론 이들의 경우는 공동체의 존속과 질서 유지를 위해 한시적으로 불가피하게 차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16-17세기 유럽 청교도 국가들에서 사회적으로 큰 폐해를 가져왔던 주술 문제 때문에 마녀에게 사형이 집행된 것이 같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국가나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종교 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불신에 대한 기독교의 정죄입니다. 어떤 윤리적인 문제도 야기하지 않고 공동체에 어떤 해악을 끼치지 않음에도 지옥의 정죄를 받는 불신죄는 세상 일반의 윤리관과 너무 괴리가 있어 보이며, 이 때문에 별난 종교 윤리로 치부되고 기독교 자체가 도외시 당해 왔습니다. 계몽주의 기독교는 이런 소외를 두려워한 나머지 진작 이 죄관을 포기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 없이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 죄관(罪觀)은 하나님이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지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을 깨우쳐 주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8-9)." 성령이 오시면 불신에 대한 죄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불신을 그렇게 극악으로 정죄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기왕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불신의 죄는 작위의 죄(sin of commission) 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의(義)를 거부하는 완악함의 죄입니다. 성경이 믿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향해 목이 곧고(롬 11:7; 행 28:27) 성령을 거스리는 자라고 비난한 것은(행 7:51), 불신을 극악으로 간주한 신랄한 책망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는 말씀은, 기독교의 죄와 심판관(觀)을 잘 대변해 줍니다. 여기서 죄와 심판의 개념은, 선량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악을 행하여 비로소 죄인이 되고 심판이 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죄로 인해 생득적으로 죄인됨과 심판이 이미 임하여 있는 인간이, 믿음의 의(義)로 심판을 중지 시키지 않아, 기왕의 심판 아래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안 믿으면 지옥간다'는 말도, 어느 순간 '불신'이라는 죄를 지어 갑자기 지옥에 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죄로 이미 죄인 됨과 지옥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이, 불신으로 심판에서 못 벗어나 사후 지옥으로 넘겨진다는 뜻입니다. 사실 심판은, 이미 받은 심판아래 계속 머무는  '유기(遺棄)'의 개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독교의 심판은 어느 순간 특정한 악행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생득적으로 죄인에게 임해 있으며, 믿음으로 그 심판을 중지시키느냐, 아니면 불신으로 기왕에 임한 심판을 계속 이어지게 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점에서 기독교의 죄와 심판은 원죄 개념이 그 중심에 자리하며, 원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죄와 심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의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돼야 합니다. 믿음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어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전가받은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임한 심판을 그치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기준은, 그 사람의 죄가 어떤 죄이고, 그 죄가 얼마나 많고 적느냐보다, 죄값이 지불됐느냐 안 됐느냐에 의거합니다.

아무리 흉악한 악인이라도 그리스도의 의로 죄값을 지불하면, 그에게 향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그칩니다. 믿는 자가 사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믿음으로 전가받은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께 속전으로 지불됐기에 금생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쳐져 사후에까지 어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불신이 가장 큰 악이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운 의(義)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어떤 종교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거나, 자기가 이루기를 바라는 어떤 것을 투영한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언약의 피와 성령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신은 다만 불신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성령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히 10:29)'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율법적인 죄와는 비교 불가한 극악으로 말합니다(히 10:29).

계명을 준수하지 않는 율법적인 죄가 부분적(partial) 과정의(processual) 죄라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은 전체적이고(whole) 결정적인(definitive) 죄입니다. 부분적이고 과정적인 '율법적 죄'는 비상구가 있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거부하는 '불신의 죄'는 비상구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윤리적인 죄를 범한 세리, 창기, 창녀들에게는 사죄의 숨통을 열어주셨지만(요 8:11), 그의 의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독사(마귀)의 자식들이라며 결정적인 단죄를 해야했던(마 12:34)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율법주의자들이나 19세기 계몽주의자들, 그리고 오늘날 칭의유보자들의 죄인식이 행위 윤리에 방점을 둔다면, 복음주의자들의 죄 인식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불신에 방점을 둡니다. 이런 죄 인식의 차이는 '믿음의 의(義)'에 대한 가치인식의 차이에서 오며, 이 가치인식의 차이는 이미 언급했듯이, 성령의 조명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요 16:7). 불신의 죄가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죄라는 인식은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불신이 극악임은, 그것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행 16:31)는 창세 전의 구원 경륜(엡 1:4-6)을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천국 입성의 자격으로 제시한 것도 '믿음의 의(義)'였으며,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율법적 의(義)보다 나은 의(義)입니다(마 5:20). 그리고 이 믿음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의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믿음의 의를 부정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호불호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에 대한 호불호로 연결됩니다. 믿음을 의지하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모퉁이돌 처럼 보배롭게 여긴 것은(마 21:42) 그리스도가 믿음의 의(義)를 정당화 해주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제일주의와 더불어(갈 6:14; 빌 3:3) 믿음의 의(義)만이 완전한 하나님의 의(롬 3:22) 라고 강조한 것도, 둘이 서로를 고양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그리스도를 내친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믿음의 의가 부정됩니다(롬 9:32). 그들은 그리스도가 버려질 때 믿음의 의도 부정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의 의(義)는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분기점이고, 그들이 평생 추구하고 헌신해야 할 지고의 가치였기에, 율법적 의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 의에 매몰된 그들에게, 인간의 의를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 받아들이라는 요구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의를 세워야 영생을 얻는다는 신념에 매몰된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믿음의 의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처럼 여기는 자신들의 의(義)를 각하시키고 믿음의 의(義)를 고양시키는 그리스도를 살려 둘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의'와 '율법적 의'는 서로 병립할 수 없는 상반된 위치를 점하기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폐기하도록 취사선택을 강요받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선택하는 순간 믿음의 의와 그리스도는 폐기처분돼야 하고, 믿음의 의를 선택하는 순간 자기 의는 부정돼야 합니다. '이를 중히 여기면 저를 경히 여겨야(마 6:24)' 하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에 반해, 자기 의(義)가 전무한 창기, 세리, 죄인들에게는 취사선택할 다른 의(義)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믿음의 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만이 자신들의 유일한 의(義)였기에, 취사선택의 고민도, 양자 간에 잘못된 선택을 할 위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 서기관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마 21:31) '믿음의 의'라는 좁은 외길만이 그들 앞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