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해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의 논문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와 성경의 권위'를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지상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합니다.

제4회 종로포럼
▲김재성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3) 스콜라주의를 논박한 97개 논제

중세시대의 대학에서는 세 가지 학문분야가 집중적으로 가르쳐졌다. 인문학, 법학, 신학이었는데, 졸업생은 전문직업인으로 국왕, 제후, 영주들의 지위를 계승하거나, 국가에서 중요한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대학교육이 확산되면서, 유럽 대부분의 도시에는 라틴어로 수업을 진행했고, 거의 공통적으로 헬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대해서 연구하고 해석하는 훈련을 받았다. 지식의 이해와 활용을 위해서 집중하던 교육방식에서 핵심은 토론과 논쟁이었다. 서로 토론을 하면서 논쟁을 하게 되면, 핵심 쟁점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논리적 사고를 하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중세 말기에 대학에서는 신학 교수들이 논제들을 내놓고 토론회를 개최했다. 먼저 토론 주제를 지도하는 교수가 제시해 놓은 후에, 학생은 그 논지를 규칙에 따라서 옹호하는 쪽을 택해야 했다. 물론 교수들이 학생들과 서로 다른 견해들을 발표하였다.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반대토론에 나섰다. 모든 토론과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했다. 토론은 상당히 엄격한 지적인 훈련과정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의 교육 방식은 고전의 이해와 비판적인 토론의 과정을 거치도록 한 후, 현실 사회 전체에 적용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박사학위를 수여하기 전에는 중요한 주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박사학위를 취득할 후보생이 교수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지금은 수 백 페이지의 연구논문을 먼저 제출하여야만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박사학위 후보자에게 면접고사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는 논문을 제출하는 의무는 없었고, 교수들 앞에서 논제에 대해서 토론하고 답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루터는 1512년 10월 18일 오후에 3시간이 넘는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고,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박사 모자, 열어서 볼 수 있는 성경,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개의 둥근 원으로 장식된 박사 인장을 받았다.

1515년 경에 루터는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을 강의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펠라기우스의 문제점들을 소상히 파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죄와 은혜에 대한 교부들의 저술들 중에서 어거스틴이 강조한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논증을 감동적으로 읽었다. 루터는 점차 당시 수도원이나 성당내부에서 성직자들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엉터리 신앙생활에 대해서 염증을 느꼈다. 십자가에 관련된 유물들에 대해서는 경배하면서도, 그들이 직접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점차 성경을 강해하면서 신학적 비판정신을 갖추게 된 루터는 1517년 9월 4일,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토론"을 위해서 97개 조항을 토론 주제로 내걸었다. 프란츠 귄터(Franz Günter)의 박사학위를 위해서 루터가 제시한 것이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들과 학생들과의 토론에서 루터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중세 스콜라주의(피터 롬바르드, 둔스 스코투스, 가브리엘 비엘 등)와 그 기초에 해당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능력이 많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피터 롬바르드가 주장하던 인간의 공로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성취하려는 공로주의에 단호히 반대하였다.

루터가 주장하는 것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것이요, 완전히 무너뜨리는 입장이다.

"스콜라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논제들"

1. 어거스틴이 이단에 맞서서 주장한 것이 과장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거스틴이 거의 모든 곳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보편적 지식에 배치된다.
2. 이것은 펠라기안주의자들과 모든 이단들이 승리하도록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진실로 그들에게 승리를 허용하는 일이다.
3. 이것은 신학의 모든 박사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희롱하는 것과 같다.
4. 그러므로 인간은 나쁜 나무와 같다는 것이 진실이고, 의지는 갖고 있지만 악을 행할 뿐이다. [마 7:17-18]
5. 사람의 본성은 두 가지 서로 대립적인 것들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자유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이다. 사실, 그 본성이라는 것은 자유하지 않으며, 굴레에 얽매어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지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6. 본성에 의해서, 의지가 바른 인식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다. 이런 주장은 스코투스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7. 사실상, 하나님의 은총이 없다면, 의지는 왜곡되고 악한 행동을 창출해낸다.  
8. 하지만 의지는 본성에 의해서 사악하며, 다시 말하지만 마니교에서 가르치듯이, 본질적으로 사악하다.
9. 의지는 천부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악하고 타락해 있다.
10. 의지가 선이라고 선포된 것을 향해서 노력하여 나가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어떤 사람도 인정하여야만 한다.  
11. 규정되어진 것은 무엇이든지 의지가 따라가려 하거나 의지를 갖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12. 의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의지의 능력 안에 그처럼 큰 능력이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어거스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13. 범죄하는 인간이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까지도 그러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이것은 스코투스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14. 의지는 잘못된 일을 수행하고, 규칙을 교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15. 진실로, 의지는 오직 잘못된 일을 수행할 뿐이며, 규칙을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은 특별히 주목할 부분이다.
16. 그래서 오히려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려야만 할 것이다: 오류를 범하는 인간이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을 지라도,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7.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공경하기를 원치 않는다. 실제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를 원하며,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를 바라지 않는다.
18. 본성상 모든 만물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은 허구적인 개념이며, 참으로 망상이다. 이것은 상식적인 가르침에 위배된다.
19. 용감한 시민이 자기 자신보다 그의 조국을 더 사랑한다는 스코투스의 논리를 우리가 적용할 수는 없다.
20. 우정관계의 행동이 시행되는 것은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선행 은총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21. 본성에 따라서 하는 행동은 하나님에게 저항하여 욕망에 빠지는 행위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22. 하나님께 저항하여 욕망에 따라가는 모든 행동은 사악하고, 영혼의 간음이다.
23. 욕망에 따르는 행동은 희망의 덕목에 의해서 바르게 정비되어진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24. 왜냐하면 소망이란 자애를 향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에게 속한 것만을 열망 하고 추구한다.  
25. 소망은 공로를 세움으로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공로들을 파괴하는 고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다.
26. 우정관계의 행위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가장 완벽한 수단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획득하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로 돌이키거나 접근하기 위해서 가장 완벽한 수단도 아니다.
27. 그러나 그것은 이미 완성된 회심의 행위인데, 본성에 의하거나 때때로 은총을 따르는 것이다.  
28. 성경 말씀에 언급된 바,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이키리라 (스가랴 1:3). "하   나님께 가까이 하라 그러면 그가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약 4:8),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라" (마 7:7), "너희가 나를 찾으면 만나리라" (렘 29:13), 본성에 의해서든지, 은혜에 의해서든지, 똑같이 이것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말한 것과 차이가 없다.
29. 은혜를 향하여, 단 하나의 방향이 은혜를 위한 최고이자 오류가 없는 준비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예정이다.
30. 하지만 사람의 쪽에서는 은총에 앞서서 하는 일이란 전혀 없고, 단지 불편하게 생각하고, 저항하여 반항하는 것뿐이다.
31. 예정된 자들은 개인적으로만 정죄를 당할 수 있고, 집단적으로는 아니다고 말하는 것은 게으른 자들의 논증이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자들에 대한 반론이다.
32. 더욱이,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서 성취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정은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뜻하심의 결과로서 본성에 의해서 필연적인 것이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 한 사람씩을 선택한다는 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33.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거짓이니, 사람이 행하는 모든 것은 은총에 방해가 되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권위들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34. 간추려 말하면, 본성에 의하여 인간은 교훈을 바르게 교정하거나, 선한 의지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35. 정복할 수 없는 무지가 완전하게 한 사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스콜라주의자들) 면제해 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36.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선한 행동에 대한 무지는 항상 본성에 대해서 극복할 수 없다.  
37. 더욱이, 본성은 내적으로나 필연적으로나 모든 행동에서 자만심을 높이고 긍지를 갖게 하는데, 외적으로나 표면적으로는 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38. 도덕적 덕목이란 없다. 그것이 자만심이든지 슬픔이든지, 죄가 없었던 적은 없다.
39.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들의 주인들이 아니라, 종들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이다.
40. 우리는 우리들의 올바른 행동에 의해서 의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로운 행동에 의해서 의로운 존재라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이다.
41. 실질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윤리는 은총의 가장 사악한 대적이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42. 행복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가 가톨릭 교리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것은 도덕 교리에 대한 반론이다.
43. 그 어떤 사람도 아리스토텔레스 없이는 신학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에 대한 반론이다.
44.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을 맺지 않는 사람이라야만 신학자가 될 수 있다.
45. 논리학자가 아닌 사람은 신학자가 아니며, 괴물 같은 이단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괴물적이요 이단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견에 대한 반론이다.
46. 사람이 믿음의 논리에 무익하게 관습적으로 따라가는데, 그 대체물을 한계와 측량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은 채 받아들인다. 이것은 새로운 변증가들에 대한 반론이다.
47. 신학적인 용어들에 적용할 때에는, 그 어떤 삼단논법적인 형태라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이것은 추기경에 대한 반론이다.
48. 삼단논법적인 형식들과는 배치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진리로 따라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새로운 변증가들과 그 추기경에 대한  반론이다.
49. 합리적인 논증의 삼단논법적이 형식이 하나님에게 관련된 주제들을 위해서 중요시 된다면, 삼위일체 교리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논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50. 간략하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것은 신학에 대해서 마치 빛이 어둠으로 덮이는 것과 같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51. 라틴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확한 의미를 완전히 파악했는가는 매우 의심스럽다.
52. 포피리 [4세기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와 그의 저서들이 신학자들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도록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교회를 위해서 더 좋았을 것이다.
53.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익한 개념들을 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의심이 촉발되어진다.
54. 한 행동이 공로적인 것이 되는가는, 은혜의 임재가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의 임재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55.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무능력한 방식으로 임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생동적이고, 능동적이며, 역동적인 영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통해서 발생하는 일들은 친밀한 행동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56.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주시지 않으신 채 사람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참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옥캄에 대한 반론이다.
57. 율법이 지배하고 있는 바, 계명에 순종하는 행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실행되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발언이다. 이것은 추기경과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58. 이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갖고 있는 것"이란 실제로 율법을 넘어서서 새로운 요구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59.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라 나올 수 있는 것이다.
60.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란 율법 자체보다도 더 증오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61.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율법이 요구되어질 수 있고 성취되어진다는 것에 따르지 않는 말이다. 이것은 가브리엘에게 대한 반론이다.
62. 그리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범한다. 비록 그가 살인하지도 않고, 간음하지도 않으며, 분노하지 않더라도.
63.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영적으로 성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범하는 것이다.
64. 사람이 화를 내게 되거나 쾌락적 욕구에 빠지게 될 때에, 영적으로 그 사람은 살인하지 않으며, 악을 행하지 않고, 격노하지도 않는다.
65.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있는 사람은 실로 화를 내거나 쾌락적 욕구를 갖지 않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은혜 안에 있어도 율법을 완벽하게 준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66. 그것은 실제적으로 외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악한 행동을 하는 위선자들의 의로움이다.
67. 사람이 쾌락을 범하지 않고 분노에 가득차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68. 따라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
69. 사실상, 율법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본성에 의해서 파괴당하고 만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70. 선한 율법이 본성적 의지에 대해서는 나쁘다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71. 율법과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대적들이다.
72. 율법이 원하는 것은 의지가 원하지 않는다. 두려움에서 하거나 혹은 사랑에서 하거나, 그것을 행하려 한다고 속이는 것이다.
73. 율법은, 의지의 엄한 주인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낳으신 분"[사 9:6] 그 아들에 의해서 하지 않고서는 결코 정복되어지지 않는다.
74. 율법은 많은 죄를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를 초조하게 만들고, 혐오감을 주기 때문이다 [롬 7:13].
75.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많은 의로움을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에게 율법을 즐겁게 지켜나가도록 작동하기 때문이다.
76.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하는 율법의 모든 행동은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콜라주의에 대한 반론이다.
77. 의지는 항상 주님의 율법을 지키기 싫어하며, 두 손으로 하는 일들이 그쪽으로 향해서 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싫어한다.
78.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율법을 향해서 이끌려진 의지는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자 이성으로 움직인다.
79. 계명들은 모두 다 율법의 행위들을 시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80. 하나님의 은혜로 선행을 하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도다.
81. 고해성사에 관한 팔사스의 장은 5장, 10항은 은혜의 영역 밖에서 하는 행위가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거짓으로 왜곡된 이해를 하지 않는다면.
82. 신앙적인 예식들은 선한 율법과 개념들이 아니며,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지도 않는다(많은 교사들에 대한 반론이다).
83. 그러나 심지어 십계명 그 자체와 그 밖의 모든 것들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규정되어져 있고 가르쳐지고 있지만, 선한 율법이 아니다.
84. 선한 율법과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널리 확산되어졌다.
85. 만일 가능하다면, 사람의 의지는 전적으로 율법이 없는 것을 좋아할 것이고 완전하게 자유롭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86. 사람의 의지는 율법이 부과하는 것을 싫어하다. 하지만, 의지가 율법의 부과를 바란다면, 그것도 역시 자아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87.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의지는 그것에 대적하는 것이요 선하지 않는 것이다.
88.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모든 사람의 자연적 의지는 간악하고 나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89. 중보로서 은혜는 율법과 의지를 화해시키는데 필수적이다.
90. 하나님의 은혜는 의지를 지도하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요,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서도 실수를 범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브리엘 대한 반론이다.
91. 그 은혜는 선한 행위가 더욱 자주 그리고 쉽게 시행되어질 수 있게 하려고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는 사랑의 행위를 시행하기란 불가능하다.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92. 만일 사람이 본성으로 친밀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피상적이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가브리엘 대한 반론이다.
93. 한 행동이 열매인 동시에 열매를 사용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어서 토론에서 밝혀내기에 난해한 종류의 죄악이 있다. 옥캄, 추기경, 가브리엘에 대한 반론이다.
94. 하나님의 사랑이 피조물의 강렬한 사랑과 함께 지속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역시 진실 하다는 것을 신봉하는 것이다.
95.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만을 아는 것이다.
96. 우리는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의지를 만들어야만 한다. (추기경에 대한 반론이다)
97.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제시된 선언들 가운데서, 우리가 말하려 하였거나 믿는 것은, 가톨릭교회와 교회의 교사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을 우리들이 말하려 하는 것은 아니다. 1517년."

루터가 주장하는 성경적이며, 새로운 신학사상이 97개 항목에 걸친 논제들을 통해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그 당시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일반적인 교리들에 대해서 완전히 반대한다고 선언하였다.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강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쳐준 요한네스 폰 스타우핏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도 드러난다.

스콜라주의를 반박하는 97개 논제들의 핵심을 압축해 보면, 루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루터가 이해한 신학의 핵심은 펠라기우스와 중세 스콜라주의와는 정면으로 대립된다. 루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sola gratia)!을 내세우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근거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할 뿐이다고 강변했다.

사람이 행하는 착한 행위나 공로나 고생이나 헌금이나 그 어떤 것도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만 구원이 주어진다. 루터뿐만이 아니라 칼빈이나 다른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중세 시대를 향해서 부르짖은 성경적 가르침이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에 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선적이라고 (prima gratia)하는 데에는 동의하면서도, 그 후에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가 뒤따라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라틴어 단어를 분별하게 되면,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 스콜라주의자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