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렬 인터뷰
▲김충렬 교수. ⓒ크리스천투데이 DB
제36장 내적인 인격으로서 아니무스(1)

앞 장에서 아니마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아니마는 인격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여성적 특성이었다. 아니마는 남자 안에 있는 원래의 여성적인 특성으로서 존재하는 정신의 원형이었다. 그 원형은 다시 근본적으로 여성에서 정신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남성적인 특성을 갖는다. 여성에는 어느 정도 남성적인 특성이 정신에는 반드시 있고 본래 있는 특성으로 내재된 것이다. 이런 남성적인 특성이 여성에서 내부적으로는 정신의 특성을 이루면서도 외적으로는 인격으로 표출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아니무스는 남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건이다.

1. 아니무스의 이해

남성에게서 아니마를 말한다면 여성에게서는 아니무스를 말해야 한다. 남성에게서는 외적인 태도로 드러나는 논리와 객체성이 우세하거나 적어도 이상(理想)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여성에서는 감정이 우세하다. 그러나 인격의 깊은 내면에서는 그 반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남성은 안으로 느끼고 여성은 숙고하는 형태이다. 여성에게서도 남성다운 특성은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자아의 내적인 인격에 남성적인 특성으로서의 아니무스가 있다. 아니무스는 남성적인 특성으로서 정신의 바탕으로 이루는 인격의 원형인 것이다.

1) 아니무스의 정의

아니무스(Animus)란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인 특성이다. 이 아니무스는 여성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요소이다. 여성에게 남자 같은 여자(Mannweib)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런 남성적인 특성이 여성에게서 억압되면 무의식 속에서 이것에 따른 요구가 축적된다. 그런 점에서 '아니마'가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이며, 남성의 정신 안에 존재하는 여성적인 특성과는 대립적인 것이다.

여성의 정신에 존재하는 남성적인 특성, 즉 여성에서 무의식이 남성으로 인격화 된 것을 아니무스라 부른다. 라틴어인 아니무스(animus)는 독일어 가이스트(Geist)이며 주로 사고와 연계된 정신의 특성이다. 아니무스는 아니마의 성적인 환상이나 기분의 형태와는 달리 곧잘 숨은 '거룩한' 확신의 형태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이 고집스런 남자 같은 목소리로 말하거나 잔인한 격정적인 정열로 타인을 지배하려 할 때, 여성의 마음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가 인식되는 순간이다. 이런 아니무스의 특성 때문에 남성이 쉽게 절망할 때 여성은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그를 위로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여성에게 있는 남성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때로 어떤 여자를 보고 "저 여자는 꼭 남자 같다"는 말을 하거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바로 그녀에게서 아니무스가 잘 발달된 것을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의식의 남성적인 아니무스의 특성은 겉으로는 매우 여자다운 여성에서조차 완고하고 냉혹한 힘을 지니는 특성을 보인다. 어떤 여성이 고집불통이어서 냉혹하고 도저히 접근하기 어려운 성격의 소유자로 자신과 갈등하고 있다면, 바로 그녀에게서는 아니무스가 맹위를 떨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남성적인 특성으로서의 아니무스

일반적으로 남성은 여성에 비해 외향적이다. 남성은 여성과는 달리 대개 외부세계에 관심이 많다. 남성은 사회적인 지위, 권위와 법, 명예를 존중하고, 정치, 기업, 국가, 그리고 학문하는 데도 큰 관심을 보인다. 남성은 사고와 판단, 이념이나 사상, 그리고 철학 등에 관련되는 추상적인 것 등을 좋아한다. 남성적인 것의 원형으로서의 모상(模像)인 '아버지'는 바람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것, 창조적 기풍, 입김, 영(靈, Pneuma), 호흡(Atman), 정신(Geist)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은 인간, 법과 국가, 이성과 정신에 관계된 것을 결정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동적(動的)인 힘, 바람과 폭풍, 뇌상과 번개 같은 강력한 힘으로 상징된다. 이러한 남성적인 특성은 융의 아니무스 개념에 일치되고 있다.

아니무스는 여성에게 무의식이 인격화한 남성상이다. 이 아니무스는 그 특성상 선과 악이라는 양면을 나타낸다. 물론 남성의 아니마도 선과 악이라는 양면을 나타내지만, 아니무스가 에로틱한 공상이나 분위기(mood)의 모습을 취하여 나타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이는 아니무스는 곧잘 숨겨진 그리고 성스러운 확신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확신이 소리를 높여 집요하게 남성의 목소리를 갖고서 역설되든가, 혹은 잔혹하고 감정적인 방법으로 과해질 때는 여성의 마음 저변에 내재해 있는 남성적인 측면이 쉽게 인정된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매우 여성스러운 여성에게서조차 아니무스는 여전히 단단하고 잔혹한 힘일 수가 있다. 어떤 여성의 내면에 아주 완고하고 차가우며 결코 가까이 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누구라도 갑자기 그것과 마주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런 여성의 생각 중에서 아니무스가 쉴 새 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 있다.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라든가, "이 장면에서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양쪽 모두 마찬가지로 나쁘다" 등이다.

아니무스는 예외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분명한 의견을 갖는다. 아니무스의 의견은 대부분의 경우 올바른 것이므로 좀처럼 그것에 반대할 수가 없지만, 그것이 개개의 장면에 들어맞는 경우는 드문 것이다. 그것은 당연한 의견이긴 하지만 핵심을 벗어난 것이기 쉽다.

3) 아니무스의 본질

아니무스의 특성은 논리나 판단, 그리고 의견이나 견해, 합리성 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심리적인 경향은 남성이 분석하고 판단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거쳐서 적당한 결론에 이르게 됨을 의미한다. 이는 여성이 막연한 느낌이나 기분, 예견이나 육감, 그리고 감수성을 중요시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그런 점에서 아니무스의 특성은 아니마와는 다르게 수용하고 포용하기보다는 끊고 중단하고 내치는 특성을 보인다. 남성이 여성과는 다르더라도 과감하게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아니무스의 특성 때문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아니무스는 가정보다는 사회와 국가를, 구체적 감정보다는 추상적인 이념이나 학설, 그리고 보편적인 진리에 관심을 더욱 기울이게 된다.

아니무스의 특성은 아니마의 경우처럼 여성에게서 한 남자의 모습으로 인격화된다. 이런 경우의 여성은 대개 엄격한 판단이나 논리적인 귀결을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이해가 더 쉬울 것이다. 이런 경우의 아니무스는 예기치 않게 남성의 경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태를 조건을 짓는 상황이 부가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아니무스는 한 인격으로 나타나지 않으며 오히려 다수로 나타난다.

웰즈(H.  G. Wells)의 소설 《크리스티나 알베르타의 아버지》에서 여주인공은 그녀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상위에 있는 도덕적인 법정의 지배를 받고 있다. 법정은 가차 없이 예리하고 고지식하게, 무미건조하고 깐깐하게, 그녀가 무엇을 하고 어떤 동기에서 하는지 그때마다 말하고 있다. 웰즈는 이런 법정을 양심의 법정(Court of Conscience)이라 부른다. 이렇게 심판하는 다수의 법관, 즉 일종의 판사단은 아니무스의 인격화에 해당한다. 아니무스는 마치 교부(敎父)의 집회나 그 밖의 권위자들의 모임과 같은 것으로 설교 단상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나아가 아니무스의 까다로운 판단은 주로 말과 의견들이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어린 시절부터 주워 모아서 평균적인 진리, 정당성, 그리고 합리성으로 압축한 것, 다시 말하면 많은 전제(前提)를 모아놓은 일종의 사서(辭書)로서 언제나 의식적이고 능력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없을 때는 즉시 어떤 의견을 가지고 거들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때로는 건강한 인간 이성의 형태로 나타나며, 때로는 편협한 의견의 형태로, 그리고 어떤 때는 "사람들은 늘 그래왔어" 혹은 "누구나 그렇게 말하지 않아, 그건 이렇고 이래"라는 등으로 교육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무식의 소치의 형태로 나타난다.

2. 아니무스의 특징

아니무스의 특성은 남성적인 특성이라는 아니무스의 특징을 포함한다. 아니무스의 특성은 그대로 남성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아니무스가 무의식의 내적인 인격에서 내면에 관계에 작용하여 인격의 원만성을 이루는 것으로 역할을 한다면, 이는 진정한 자기됨의 본질에 관여하는 것이 된다. 이런 아니무스의 특징은 남성적인 측면을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더 상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1) 논리적 판단과 의견에 작용하는 아니무스

논리적 판단이란 합리성을 기본으로 하여 감정이나 분위기에 좌우되는 것과는 매우 합리성과 연계되어 있다. 남성이 분위기보다는 논리적인 판단을 좋아하고 그것을 분석하는 것에 압도되는 요건으로 말하는 이유이다. 이는 남성이 사실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 우위성을 드러내는 것이지만, 어려운 난제를 논리적으로 판단하여 그 해답을 구하게 되는 것, 그리고 기분이나 감정에 이끌리지 않고 사실에 입각하여 누가 보더라도 적절한 판단력을 동원하여 보편성이나 원만성에 이르는 것 등은 모두 아니무스의 특성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상의 원리를 꿰뚫는 법칙을 발견한 것이나 치밀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 영원히 불변하는 진리를 발견한 것, 어려운 난제를 두고 명쾌한 해답이 되는 원칙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의 기초가 되는 것을 제안하여 활용되는 것 등은 모두 아니무스의 의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아니무스의 특성은 아니마의 변덕스러운 기분의 정취나 막연한 느낌, 그리고 환상의 조각들에 이끌리거나 떠넘기는 아니마와는 매우 대조된다.

아니무스의 특성은 반드시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것만은 아니다. 여성도 논리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남자 이상으로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여 정확한 판단과 명쾌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은 대개 외향적이거나 대담한 여자일수록 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현상은 여성이 남성적인 경향에 강하게 사로잡힌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모르는 내적인 인격의 무의식의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런 아니무스가 여성의 내면에서 작용하면 지적인 여성에게서는 지적이며,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경향에 대하여 융은 "그러나 이런 논쟁은 근본적으로 하찮은 약점을 터무니없는 중요사로 삼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또는 그 자체로는 분명한 논의에, 핵심에서 벗어난 전혀 다른 것을 끌어들임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을 야기한다. 이를 알지 못한 채 여성은 단지 남성을 더욱 화나게 하는데 목표를 두고 아니무스에 더욱더 완벽하게 빠져버린다. '미안하지만 내 말이 언제나 맞아'하고 말하게 된다"고 말한다.

판단이나 의견은 아니무스의 특성에 의해 작용되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지만,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측면도 있다. 여성의 이와 같은 경향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서 오직 아니무스의 외향화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니무스는 여성에게서 의식적인 관계기능에 속하기보다는 무의식과의 관계기능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여성이 단순히 외부 상황에 의식적으로 깊이 생각해야할 상황이라면, 자기의 의견을 떠올리는 대신에 아니무스는 착상으로서 안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도 남성처럼 판단이나 의견에 더 많이 사로잡히는 경우도 있지만, 그 특성은 조금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자의 판단이나 의견은 오로지 사실성에 입각하여 그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으로 남자의 판단이나 의견은 사실적인 이치와 그 논리적 귀결의 특성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남성이 분위기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성을 근거로 하는 논리적인 타당성에 근거를 두어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경우이다. 이는 무의식에서 작용하여 의식으로 드러난 결과로 볼 수 있다.

2) 이념이나 사상에 작용하는 아니무스

아니무스의 이념과 사상과 남성이 그토록 자랑하는 특성이기도 하다. "남성의 논리적인 사상을 여자는 못 이긴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남성은 아니무스의 특성으로 인해 여자와는 달리 더 명쾌하게 사물이나 상황을 판단할 수 있다. 남성의 무의식이 예민하게 작용하여 여자가 느끼지 못하는 부분을 예리하게 추론하고 사고하여 타당성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다.

이런 아니무스의 특성은 아니마의 기분에 좌우되어 이끌리는 감정적인 과정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자를 능가하는 특별한 부분으로 인정되는 요건이다. 이로 인해 남성은 여성보다도 어떤 일에 대해서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더 치밀하게 점검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성이 오랜 생각의 과정을 거쳐서 이끌어내는 사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남성은 그 사고의 추리성을 동원하여 체계적으로 대비하여 사건이나 일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이념이나 사고란 말 그대로 뇌의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어떤 상황이나 일에 대하여 일정한 근거를 가지고 대처하는 생각의 과정을 통한 결론이다. 이는 순수한 논리적인 과정이라는 뇌의 작용을 거친 것으로 여성의 본능적인 감각을 우선하여 판단하는 경향과는 다른 점이다. 이러한 이념이나 사고에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합리적인 타당성에 이르지 않은 것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결과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 말하게 되는 경향이다.

반면 이념이나 사고는 어떤 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의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여 실제와는 다른 경우도 있다. 이는 남성이 어떤 이념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생각을 하는 동안에는 그 결과가 누가 보기에도 보편타당한 귀결이 아니라는 것을 도출할 때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남자가 하는 생각이 모두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하면 대개 남자들은 자신이 하는 말에는 상당한 논리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표출하여 인정하기를 바라기도 하지만, 그것은 남성의 개인에 따라서는 상당한 편차를 보이는 특성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니까 남성이 여성에 비해서는 이런 특성이 잘 발달되어 있다고 보지만, 모든 남성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 강인함과 경직성에 작용하는 아니무스

강인함과 경직성은 남성이 갖는 매우 특징적인 것이라고 해야 한다. 남성의 강인함과 경직성은 여성이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강인함은 우선 신체적인 힘을 우위적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성질이나 태도에서도 유연하지 못하기에 매우 경직된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남성이 본능적으로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에서 작용하여 여성이 그런 강한 남성으로 대해주기를 바라는 특성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남성의 강인함은 여성이 가장 남성다운 특성으로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여성은 강인한 남성을 좋아하고, 또 그런 강인함을 기대하기에 여성은 남성이 강하게 대응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기대하는 특성이 있다.

강인함은 성격적으로는 딱딱함, 달리 말하면 경직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남성의 강인함은 딱딱하여 쉽게 끊어지는 특성이나 약간은 단절되는 특성의 경직된 성질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강인함은 여성의 부드러움에 비하여 모든 것을 일사분란하게 처리하는 특성으로 작용할 수 있다. 여성의 부드러움과 유연성에 비하여 남성은 끊고 맺는 딱딱함으로 대응하여 갑작스런 결론을 내리고 우유부단하게 대응하여 사태를 효과적으로 처리하는데 장점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남성이 강인함을 갖고 대처하면 '남성답다!'고 평가되어 남성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대신에 여성처럼 부드럽게 유연하게 대응하면, 강인함이 결여되는 것으로 평가되어 남성적 가치가 하락되는 것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다만 강인함과 경직은 겉으로는 강한 것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전혀 반대의 효과도 있을 수 있다. 강인함과 경직성이 부드러움과 유연성을 이기지 못하는 때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4) 아니무스는 싸움과 투쟁에 작용하는 아니무스

싸움과 투쟁은 매우 남성적인 특성이다. 싸움과 투쟁은 어떤 사건이나 사실에 힘을 기반으로 하여 밀어붙이는 특성이라는 점에서다. 남성의 싸움과 투쟁은 여성과는 달리 남성이 '싸움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된다. 남성이 유달리 힘을 내세우는 것이나 싸움에 모든 심리적인 에너지를 집중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남성에게서 싸움의 본성은 힘을 겨루어 대결할 때나 전쟁할 때 더 많이 작용된다.

지금은 옛날과 같이 야전에서 싸우는 특성을 보기 어려운 시대이지만, 농경시대에는 남성이 힘을 자랑하여 국가를 수호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형태가 모두 이런 남성의 싸움본성을 드러내는 특성이다. 최근에 우리는 이런 싸움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적지만, 그 옛날에는 이런 싸움과 투쟁하는 용기를 보이는 남성의 투지를 얼마든지 보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남성의 싸움본성을 우리는 이제 TV의 사극(史劇)이나 대하드라마에서나 보고 있을 뿐이다.

싸움이나 투쟁은 일단은 국가를 수호하기 위하여 국방의 의무를 준수하는 특성에서 이해된다. 남성이 국가를 수호하고 방어하는 특성은 정확하게는 남성적인 특성이지만, 이는 여성과는 다르게 남성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남성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싸움의 특성 때문에 남성의 성장과정에서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역할이 더 크게 나타난다. 투지가 있고 용감한 특성을 가진 아버지에게서 자라나는 아동은 그만큼 남자다운 기백이나 정신을 가질 수 있는 점이다. 이런 점은 남성이 생활전선에서 가정의 생계를 위하여 부담을 지는 것과도 다르지 않는데, 이는 남성이 여성과 다르게 심리적인 부담을 지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의 부담을 지는 특성에 대하여 여성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남성들이 어깨에 부담을 짊어지고 있는 심리적 고통과 상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남성은 때로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그리고 그 절박함을 완화하기 위해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방향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의 남성들은 대개 결혼이든 일이든 혹은 살아가는 생존의 세계에서의 적응을 위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평을 해소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외부에서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한다.

5) 도전과 진취에 작용하는 아니무스

도전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직면하는 특성이고, 진취는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실제로 남성은 여성과는 달리 어떤 것에 대하여 도전하려는 특성이 있다. 이런 특성은 여성이 그것을 구분하여 수용하거나 포용하는 것과는 대립된다. 여성이 어떤 것을 내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를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남성은 그것이 논리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구분하고 정확하게 따지는 것과 비교되는 점이다.

이는 남성이 여성과는 달리 수용하고 포용하기보다는 그 다른 것을 구분하고 따지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이유로 남성이 도전적이거나 진취적일 때는 "매우 남성스럽다"거나 참으로 남성적이라고 말하는 반면에, 남성이 도전적이거나 진취적이지 못 할 때 "남성답지 않다"고 말하게 된다.

남성의 도전과 진취의 특성은 남성의 부성애적인 특성에서 이해된다. 이런 남성의 특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버지는 유약함을 보이지 말아야 하고 언제나 아버지다운 강인함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되는 편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은 매우 약한 아버지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아이들에게는 힘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렸을 때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아버지답게 꾸짖어야 하고, 그에 따른 강인함으로 아이들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던 것이 아이가 성장해서는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쌓은 힘을 보여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은 위치에 있는 경우의 아이들은 그 힘의 덕분으로 그만큼 사회생활을 편리하게 또는 유리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힘을 가진 아버지를 두었을 경우에 그만큼 든든함을 느끼는 반면에, 힘이 약한 아버지를 두었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힘을 잃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경우도 일어난다.

아니무스의 특성은 남성이 갖는 특성이면서도 아버지가 갖는 부성애의 특성이라고 전술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정도를 부성적인 것으로 또 어떤 점을 부성적인 것인 아닌지에 대해서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것에 대한 구분은 겉으로는 심리적인 측면과 자아실현적인 측면이 종합되어 평가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심리적으로 남성적인 힘을 가진 것과 아울러 사회적으로 든든한 배경을 구축한 것으로 아버지다운 능력이 평가되는 것이라는 점에서다.

이런 현상은 물론 순전히 심리학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한 개인의 특성이 인격이라는 측면에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힘을 기준으로 평가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성적인 아니무스의 특성은 대개 개인의 심리적인 특성에 따라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정당하고 생각되는 것이다.

3. 정리

지금까지 우리는 내적인 인격으로서 아니무스에 대해서 기술했다. 앞 장에서 고찰한 대로 아니마는 인격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여성적인 특성이고, 남자 안에 있는 원래의 여성적인 특성으로서 존재하는 정신의 원형이었다. 그 원형은 다시 근본적으로 여성에서 정신을 이루는 바탕으로서 남성적인 특성을 갖는데, 그것이 바로 아니무스였다. 여성에는 어느 정도 남성적인 특성이 정신에는 반드시 있고 본래 있는 특성으로 내재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남성적인 특성이 여성에서 내부적으로는 정신의 특성을 이루면서도 외적으로는 인격으로 표출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니무스는 남성의 특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건이라는 점이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