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발전에도 높아지는 불안… 신앙과 확신의 근거는 어디에

입력 : 2017.08.13 19:35

[해외 서평] 앤서니 티슬턴의 <의심, 신앙, 확실성>

Anthony C. Thiselton Doubt, Faith, and Certainty 앤서니 티슬턴
앤서니 티슬턴(Anthony C. Thiselton)의 신간 <의심, 신앙, 확실성(Doubt, Faith, and Certainty)>

21세기의 과학과 지식 수준은 대중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진보하고 있다. 동시에 현대인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의 보급, SNS를 통해 그러한 정보에 쉽사리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점도 있다. 무엇이 사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해야 하는 피로가 쌓이고 있다. 정말로 곤란한 것은, 국경을 허물어가는 커뮤니케이션의 발전으로 인해, 닫힌 세계에 살아가던 사람들의 신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제 대중은 어느 학문 영역이든, 전문가 집단 간에도 파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말과 글은 넘쳐나지만 기댈 것이 무엇인지, 확실성의 기준은 무엇인지 판단하기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때로 그 어느 때보다 의심하고, 그 어느 때보다 폐쇄적이 되어가고 있다.

20세기 과학 시대에 살면서도 이런 시대를 예측이라도 한 듯한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이것을 고민했고, 그의 사후 <확실성에 관하여>라는 책 한 권이 출판됐다. 이 책은 의심과 확실성을 다루는 고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완성의 책이라 여겨지기에, 책 자체나 책 속 내용과 관련한 여러가지 논의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에겐 무언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시대에, 감히 비트겐슈타인의 그 책에 비견될 만한, 그리고 기독교 신앙까지 포괄적으로 고민하는 책 한 권이 출판되었다. 바로 앤서니 C. 티슬턴의 「Doubt, Faith, and Certainty」이다.

비록 목차나 색인 등을 제외하고 순수 본문 내용만 따지면 150쪽조차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티슬턴의 철학과 신학에 대한 지식이 농축돼, 이 주제를 향해 나아가기에 결코 쉬운 책은 아니다.

주제와 서술 방식, 분량을 볼 때, 분명 티슬턴은 나름 친절하고 대중적으로 글을 쓰려 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수준이 높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전문 용어에 대한 설명이 없을 때가 있기에, 철학이나 신학을 전공하지 않는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포켓 사전이나 입문자를 위한 용어집 정도는 미리 준비해야 할 것같다.

책은 제목처럼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티슬턴에 의하면, 의심, 신앙, 확실성은 하나의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상황에 맞게 이것들에 대한 그 다양한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1장, 의심: 의심과 질문을 통해 인간은 성숙한다

우선 의심부터 추적해 보자. 일반적으로 의심에 대해서는, 신앙의 결핍 혹은 성숙의 표지라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있다. 전자는 성경 속에서도 종종 두 마음을 품는다는 식으로 표현되고, 후자는 철학자 윌리엄 해밀턴의 재치 있는 패러프레이즈인 "믿기 위해 의심한다(we doubt in order that we may believe)"로 표현된다.

사실, 성경은 의심을 부정적으로만 표현하지 않는다(티슬턴은 이러한 실례를 왕상 10:1; 대하 9:1; 대하 31:9; 에 6:6; 시 111:59; 마 17:25; 18:12 등의 구절의 상황 및 어원적 분석을 통해 간략하게 제시한다). 즉 의심은 신뢰나 신앙과 대조되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겸손이나 자기 비판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 가능하다.

신앙은 어떠한가? 티슬턴은 '신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다른 13개의 정의를 책에서 보여주지만, 책 전체에서 주로 그것은 인지적 동의와 인격적 신뢰 둘로 나타난다.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성은 꽤나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거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이 단어 역시 다의적인 의미를 지님을 시사한다.

전통적으로 주관적(혹은 심리적) 확실성과 객관적(혹은 명제적) 확실성은 구별돼 왔다. 전자는 자신감과 다르지 않으며, 후자는 간단히 말해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명제(logically necessary propositions)'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후자는 정의상 참이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세 각의 합은 180도이다"와 같은 것은 분석 진술 혹은 동어 반복과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신앙의 문제에 있어, 확실성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티슬턴은 마지막으로 '신앙의 확실성'을 다루기 위해 철학적 논의와 함께 성령과 종말론이라는 신학적 측면도 고려한다.

(잠깐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티슬턴의 서술 방식은 복잡하다. 역사적 사상사를 추적하고, 성경의 용례를 추적하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러나 책 자체는 얇다. 그래서 요약이 쉽지 않고, 그의 전체 논지를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직접 책을 읽거나 아니면 번역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티슬턴은 의심을 우선 회의주의와 연결한다. 고대 세계에서 회의주의는 과학적 실용보다는 정서적 실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것은 의심되는 것들에 대한 판단 중지나 침묵 등과 더불어 평정을 유지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에서 회의주의는 이성과 신앙의 양립 가능성을 다루며 발전했다. 데카르트는 매우 획기적인 사상가로 지식·확실성을 얻기 위해, 즉 기존의 다소 무책임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려는 회의를 추구했고 스스로는 그것에 성공했다고 여겼지만, 많은 철학자들이 데카르트의 논증을 지나치게 인간(머릿속) 중심적이고(특히, 헬무트 틸리케의 비판) 일종의 말장난과 같은 것(특히 폴 리쾨르의 비판)이라 공격했다.

한편 티슬턴에 의하면, 단순한 회의주의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도덕적 문제 혹은 삶의 문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다시 말해, 정보습득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는 듯한 회의주의는 개인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고, 삶과 공동체로 돌보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의심, 그리고 질문을 통해 인간이 성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신앙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티슬턴은 이 과정을 적용하기 위해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과학 논쟁을 서술하고, 존 로크와 존 헨리 뉴먼의 논쟁도 서술한다.

앞서 설명했듯 맥락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짐을 감안한다면, 그 논쟁들에서 누군가가 전적으로 옳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티슬턴은 조심스레 지적한다. 사실 그렇게 함으로써 티슬턴은 신앙에 있어 의심의 긍정적인 역할에 손을 들어주는 듯하다.

◈2장, 신앙: 기독교 신앙은 반이성적이어선 안 된다

신앙은 이성과 양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단순히 '예' 라고 답하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많고, 또 다양한 학문 분야, 특히 신학에서는 비평이 발전했다. 그리고 앞서 밝혔듯, 신앙은 인지적 동의뿐 아니라 인격적 신뢰도 포함한다.

게다가 티슬턴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신뢰의 의미가 강하다고 말한다. 헬라어의 믿음/믿다를 뜻하는 피스티스/피스튜오는 신뢰/신뢰하다도 의미할 수 있다. 히브리어 알레프-멤-눈의 자음도 안전, 신실한, 확실한, 진리, 신뢰 등을 뜻하는 다양한 히브리어 단어를 낳았고, 신뢰의 개념은 거기에 포괄됐다(또한 신뢰하다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바타라는 동사도 사용했다).

즉 고대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다양한 단어는 신뢰하다는 개념과 믿다는 개념에 그렇게 날카로운 의미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구약에서 나타나는 용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믿음과 신뢰 간의 날카로운 대조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Anthony C. Thiselton 앤서니 티슬턴
▲앤서니 티슬턴. ⓒ유투브 캡처
티슬턴은 이것에 대해, 기독교 사상을 헬라어에서 라틴어로 표현하는 언어 변천 과정의 탓으로 돌린다.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명사는 '피데스'라는 라틴어 명사로, '피스튜오'라는 헬라어 동사는 '크레도'라는 라틴어 동사로 번역됐고, 이것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단순한 인지적 동의로 신앙을 보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티슬턴은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를 크게 의존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어거스틴을 존경했지만, 그가 신앙을 지성의 영역에 귀속시킨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어거스틴을 따르는 이전의 기독교 변증가들부터, 데카르트, 로크, 헤겔 등이 신앙을 합리적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키에르케고르는 "3인칭으로 신에 관하여 얘기하는 것조차도 위험"하며, 신앙이란 단지 어떤 결과가 아니라 살아내는 여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티슬턴은 인지적 동의로서의 신앙에도 이성을 위한 자리가 있음을 길게 논한다. 티슬턴은 아퀴나스, 루터, 칼빈, 계몽운동 시기(독일의 칸트, 영국의 이신론자, 프랑스의 백과사전학파), 헤겔, 게르하르트 에벨링, 판넨베르크 등의 논증을 차례로 언급하며, 이들을 통해 '이성'의 정의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또한 기독교 신앙은 결코 반이성적이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3장, 확실성: 최후의 심판은 의심을 제거할 수 있나

마지막으로 티슬턴은 확실성을 다룬다. 티슬턴에 따르면, 현대인은 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20세기와 달리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을 확인하며 살아간다.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지각 체계는 완벽하지 않다. 단순한 착시현상부터 시작해 법률, 정치, 사회, 언어의 불확실성,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과학'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특히 티슬턴은 이 자연과학의 불확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양자역학을 예로 든다. 전자 하나가 단 하나의 위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여기 그리고 저기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즉 이론상 불가분의 전자가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양자역학의 세계는 확실성보다는 불확실성을 시사하는 개연성을 드러낼 뿐이다. (*물론 티슬턴의 양자 역학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제대로 된 것인지 확인하려면, 이 부분을 직접 다루는 전문가가 서평해 주거나 혹은 독자 스스로 티슬턴의 책의 이 부분 전체를 읽어보면 더 좋을 것 같다.)

결국 이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학문 영역들에서의 확실성이나 불확실성에 대한 어떤 결정들이 기독교 신앙을 약화시킬 수 없다는 점이다. 칼 하임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등의 연구로 인해 인과법칙의 필연성은 '확실성'이 아니라 '개연성'으로 설명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존 폴킹혼도 고전물리학은 "명확하고 결정적인" 세계를 그려내지만, 양자 물리학은 "흐릿하고 변덕스러운" 세계를 그려낸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대인은 확실성에 접근할 수 있는가? 티슬턴은 세 가지 방식을 제시한다. 우선 티슬턴은 칸트의 종합 판단/분석 판단과 앞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의 <확실성에 관하여>를 통해 간접적으로 힌트를 얻는다. 그리고 직접적으로는 개혁파 인식론을 적극 옹호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앨빈 플랜팅가에 크게 의존하는 것 같다.

기독교인의 믿음은 근거를 갖춘 다른 경험적 명제 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어진 환경 속에 그 믿음도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함을 인지한다. 그리고 플랜팅가는 신 존재에 대한 믿음은 정신병이나 맹목일수도 있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닐 수 있음을 논한다. 그는 칼빈 등을 따라, 시각이나 청각처럼 "신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이 있음을 논한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시각이 안좋아지거나 청각이 안좋아질 수 있듯이, 제기능을 못할 수 있다.

그리고 플랜팅가는 기독교 신앙에 도전하는, 그가 '파기자들(defeaters)'이라 부르는 것을 다룬다. 플랜팅가는 이 단어를 믿음을 파기하는 요소들(주로 비평)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구체적으로 고등 비평, 다원주의, 악의 문제 등이 파기자들에 속한다.

그러나 그러한 파기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플란팅가는 앞서 말한 그러한 문제들을 차분히 다루며, 명제 묶음과 축-명제를 고수한 비트겐슈타인처럼 그러한 믿음 체계를 세워나간다.

마지막으로 티슬턴은 확실성의 문제를 (기독교) 철학에서 신학으로 끌고간다. 오스카 쿨만은 현재 교회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지만, 미래에는 거룩해질 존재이므로 이미 거룩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확실성의 문제도 이와 유사하다. 판넨베르크는 딜타이를 인용하여, 인간의 삶의 사건들의 의미가 마지막에 측정될 수 있듯 종말이 모든 의미를 드러내어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존 힉은 보다 직접적으로, '종말론적 검증(eschatological verification)'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다. 존 힉의 두 여행자 비유가 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믿고, 다른 한 사람은 그런 길은 없다고 믿는다. 이 둘은 동일한 것을 경험해도 다르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길에 끝에 천국이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는다면, 둘 중 한 사람은 옳았고 다른 한 사람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와 같이 미래에 신앙에 대한, 특히 딜레마들이 해결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존 힉은 사후 지속되는 인격성, 판넨베르크는 부활을 통해 각각 이 깨달음에 참여할 것이라 주장한다(그리고 티슬턴은 이 지점에서 폴 리쾨르의 정체성의 지속에 대한 변호를 다룬다).

한편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그리고 최후의 심판에서 중요한 요소는 심판에 대한 기대이다. 성경 시대 인물들에게 최후의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 실현의 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은 모든 의심을 제거하고 지식과 확실성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인가? 예수의 비유나 바울의 편지를 살펴보면, 현재의 모호한 것들이 미래가 되면 명확해질 것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외에도 다른 신약의 서신들도 유사한 입장을 보여준다. 폴 틸리히도, 현재의 연약함이 미래에는 극복될 것으로, 그리고 위르겐 몰트만도 고대 이레나이우스의 총괄갱신 이론, 즉 만물의 회복을 현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성령에 대한 신앙이 등장한다. 바울은 성령을 첫 열매(아파르케), 보증(아라본)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성령은 종말과 연결된다. 티슬턴은 바울의 성령론을 착실히 주석해 나가며, 종말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신자들은 성령을 통해 잠재적 확실성 가운데, 확고한 확실성을 고대(苦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더 쉽게 설명하고 요약할 수 없음에 용서를 구한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반드시 책 전체를 읽어야 그의 논지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이 책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 왜 의심하는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등 현대인이라면 으레 고민하고 힘겨워하는 것들에 대해 시대에 맞게 생각하는 법을 일깨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 다른 신념 체계에 속한 이들과 대화하는 법을 돌아보게 만든다.

티슬턴은 참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현대 지식사회 속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불안하고 흔들리는, 그리고 책 읽을 시간을 내기 힘든 우리를 위해 이렇게 훌륭한 책을 이토록 '얇게' 써 주었기 때문이다.

진규선 목사(서평가)

※본 서평의 저작권은 알맹2에 있습니다. 가격: 20달러(2017년 4월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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