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임재’? 이신칭의에만 있습니다

입력 : 2017.08.11 11:13

[이경섭 칼럼] 이신칭의에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오늘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유행하는 경건(영성) 훈련들이 대개 하나님의 임재를 표방하고 있으며, 임재의 방편에 관상,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예수 기도(Jesus Prayer) 등이 단골 메뉴로 올려집니다.

기독교 서점가의 스테디 셀러 목록에는 하나님 임재를 주제로 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1611-1691)의 '하나님의 임재연습(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프랑스의 경건주의자 '마담 귀용(Madame Guyon, 1648-1717)'의 서적 등이 랭크되고 있음은, 그만큼 임재가 기독교인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임재 자체나 임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존자이시기에 그가 현현하는 곳에 신자가 임재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며, 문제는 그것의 왜곡과 남용 때문입니다. 임재란 정확히 말하면 임재 의식(consciousness of presence)이며, 말 그대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의식하며 경험하는 것입니다.

임재의 기원은 무죄했던 에덴이며, 아담과 하와에게는 임재가 일상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만족의 근원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이를 성경은 모든 성도들의 금생과 내생의 지복으로 칭송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계 3:4).'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임재가 거두어졌습니다. 범죄 후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은, 죄인에게는 임재가 불허된다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창 3:23).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양의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을 통해(창 3:21) 임재의 회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적인 인물들로는 3백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아브라함, 모세, 다윗, 바울 등이 거론됩니다.

교회사에서는 존 번연(John Bunyun, 1628-1688),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로이드 존스(M. Lloyd Jones, 1899-1981) 같은 이들은 탁월한 임재의 경험들을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는 이 분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허락된 보편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임재가 특별한 일인 것처럼 되고, 그것을 경험하기 위해 인위적인 수단들이 동원되는 것은 분명 정상이 아닙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에는 이런 비정상의 편린들로 넘쳐납니다.

영지주의, 화체설, 성자의 유물 숭배, 경건주의, 신비주의, 그리고 오늘날 에큐메니칼적 영성훈련은 왜곡된 임재 추구의 산물들입니다. 단언컨대 이런 인위적인 수단들로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낼 순 없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성경적 근거는, 속죄소 위의 하나님 현현입니다(출 25:21).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겠다고 약속한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고 어디든 안 계신데가 없는 무소부재하신 분이심에도, 죄가 세상에 유입된 후에는 오직 그 곳 속죄소에만 임재하셨습니다.

"속죄소를 궤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1-22)." 피가 뿌려진 속죄소는 장차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실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또한 이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머무실 유일한 성전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또 다른 이름,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라는 찬송가 가사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임마누엘의 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임마누엘이심을 진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임마누엘이셔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그들 안에 있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살아계신 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하실 거룩한 처소가 되어 모든 삼위께서 그들 안에 거주하시고 동행하십니다(조지 휫필드, '지혜와 의와 거룩과 구속함이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공생애 시작 전 그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요단강 수세(受洗) 때, 비둘기 같은 성령이 그의 위에 임하신 것은, 그의 죽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실 것을 예표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직접 자신의 피뿌림을 받은 자에게만 임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5:10)'.

피뿌림이 하나님 임재의 조건이 됨은, 이방의 미신 종교에서처럼 피에 무슨 영험이 있어서거나, 하나님을 호츨하는 영매 역할을 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임재의 장애물인 죄를 없이해 준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없이한다는 것은 시종일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히 9:14)'.

그리고 임재를 불러오는 그리스도의 피는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뿌려집니다. 2천 년 전 그리스도께서 택자를 위해 흘려 놓으신 속죄의 피가 믿음을 통해 현재적으로 그들에게 뿌려집니다. 모세가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율법을 선포한 후, 송아지의 피를 율법책과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히 9:19-21), 언약을 어기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과 아울러, 언약을 어겨 죽을 죄인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아 구속받을 것을 예표했습니다.

이해를 돕는 말씀이 로마서 5장에 나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여기서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임재(화목)을 불러 온다'는 뜻이고, '믿음'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피, 임재(화목), 믿음'의 긴밀성으로 인해 '하나님이 믿음에 임재한다(엡 3:17)'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피에 임재한다(출 25:21)'가  성경에서 상호 교호적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임재를 불러오는 유일한 통로로 주장하는 이유도,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입혀 의롭다함을 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율법적(행위적) 의(義)가 임재를 불러올 수 없음은, 그것이 임재를 불러올 만큼 완전한 의(義)가 못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적(행위적) 의(義)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만이 성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의 의를 소유하는 길은, 그가 이룬 율법의 의를 믿음으로 덧입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율법적 완전을 덧입어 된 의(義)를, '믿음으로 된 의(롬 4:11)',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빌 3:9)'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반면 자기의 율법적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정죄를 이룰 뿐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종말 때까지 칭의가 유보된다고 주장하는 칭의유보자들에게는 종말때까지 하나님의 임재가 유보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타 반(反) 이신칭의론자들 역시 자신들이 추구하는 임재 형태에 따라 나름대로의 임재 수단들을 고안합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진 교인들은 타종교의 수행방법들을 차용해 임재를 실현하려 하고, 자유주의 신자들은 직관이난 신비를 통해 임재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철학적 종교인들은 명상(meditation)을 통해 임재를 꿈꾸고, 뉴 에이지(New Age)에 세뇌된 교인들은 음악 문학 예술 같은 문화를 통해 임재를 끌어내려고 합니다.

이들이 외면적으로는 매우 아카데믹하고 컬츄럴(cultural)해 보이나, 무당이 접신을 위해 강신술을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저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는 무당과 주술사만큼이나 악합니다. 이는 그들이 명분상으로는 하나님임재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실제 만나고 경험하는 것은 자아 우상(ego-god) 아니면 잡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끌어내려고 인위적인 수단들을 고안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믿음을 좌시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임재를 추구하는 것은 고답적인 것으로 치부됩니다.

구약 시대는 짐승의 피에 임재가 이루어졌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믿음으로 임재를 이끌어냈다면,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21세기 종교다원주의 시대에는 다양한 임재 방식이 동원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통한 임재' 방식은 태초부터 세워진 불변의 경륜이고, 시대를 초월한 원리입니다. 이 외에 다른 방안은 없습니다.

임재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죄의 장벽이 하나님의 임재를 막았으니, 피뿌림으로 죄의 장벽을 없이해 임재를 복구시키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외에 다른 임재 방식은 없습니다. 만일 누가 인위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임재를 경험했더라도, 그것은 필시 하나님이 아닌 악령의 임재입니다.

루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만나지 않은 하나님을 악령이라고 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된것이라고 한 것(갈 3:2) 역시, 성령의 임재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오늘 누구든지 믿음으로 의의 피뿌림을 받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와 더불어 임재의식이 따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또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임재에 만족하여 별도의 임재를 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여기저길 기웃거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오직 의의 복음에 있음을 알았기에, 오직 복음만을 구하고 복음만을 듣고 싶어 할 뿐입니다. 루터에게 천국이 열려지는 경험을 갖다 준 로마서 1장 17절, 시편 22편의 체험 역시 이신칭의의 복음이 갖다 준 임재의 경험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순간, 하나님과 루터 사이에 가로막혔던 죄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얼굴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천국도 함께 열려졌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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