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초월과 자기희생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

덩케르크
▲도버해협 한가운데서 독일군의 공격에 의해 조난당한 연합군 병사들을 구출하는 소형요트 문스톤 호. 실제로 다이나모 작전시 700여 척의 민간 소형선박이 징발되어 군인들의 구조에 나섰다.
전편에 명시했듯, 영화 <덩케르크>는 '구원(deliverance)'이라는 주제를 다룬 영화다. 이 영화에 표현된 구원이 비록 복음적인 개념은 아니라도, 기독교의 구원론에 담긴 세부 요소들을 반영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 가운데 가장 명료하게 부각되는 요소는 구원받는 자가 처한 절망의 사태, 그리고 구원하는 자가 실천하는 숭고한 희생 간의 극적인 대비이다. 그리고 이 둘이 대비되는 교차점에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miracle)'이 기다리고 있다.

구원받는 자와 구원하는 자의 교호적 관계를 성립시키는 바로 이 기적에 대하여, 놀란 감독은 관객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우리들의 삶에 일어날 수 있는 참된 기적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그 기적은 누가 어떻게 일으키는 것인가?

<덩케르크>의 감상평 대부분은 영화가 보여주는 사실감과 현장감을 칭송하고 있다. 혹자는 참전군인들이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이 영화가 선사하는 극사실적 현장감은 구원이 기적에 의해 실현된다고 믿는 놀란 감독의 메시지를 강하게 지지하도록 만든다.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병사들의 냉막한 절망은 기적이 결코 저절로 쉽게 발생하는 일이 아님을 강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자가 실낱 같이 남아 있는 소망을 놓치지 않을 때, 그리고 구원하는 자가 누구도 감히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단을 내릴 때 기적은 일어난다.

영화 <덩케르크>는 구원이라는 기적이 이처럼 힘겹게 일어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숭고하며 소중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구원과 초월: 덩케르크 함락 직전에 내린 히틀러의 결정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즉 당시 독일군이 덩케르크를 빠르게 함락시키지 않은 이유는 역사가들의 관심을 끄는 논제였다. 전술적으로나 사기로나 모든 면에서 승리가 확실한 상황이었는데 독일군 수뇌부, 특히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는 왜 이런 기회를 방치해 두었을까?

결과론적으로 본다면 히틀러와 독일군의 입장에서 이는 명백한 오판이었다. 다이나모 작전의 성공은 이후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에서 독일군이 겪게 될 실패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1940년 5월 당시 상황에서는 히틀러의 결정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대략적으로 세 가지의 이유가 존재한다.

덩케르크
▲다이나모 작전 당시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살포한 유인물. 영화는 이 유인물이 덩케르크 시가지에 흩날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첫째, 독일군에게 잠시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전편 칼럼에 설명한 바 있듯, 전격전(blitzkrieg)의 주력은 분명 기갑부대였다. 그 외 공군, 포병, 보병 등은 기갑부대의 진격을 원활하게 하는 조력 역할을 맡았다. 빠른 속도로 전개된 전격전 때문에 기갑부대는 제대로 된 정비 없이 계속해서 전장을 달려야 했다. 누적된 피로감으로 인해 잠시나마 휴식과 정비의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당시의 시점에서 아직 수도 파리와 남부에 남아 있는 프랑스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기갑부대를 무리하게 운용하기가 어려웠다. 덩케르크 시내가 기갑부대 운용이 어려운 환경이었던 점도 진격이 지연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둘째, 히틀러 입장에서는 군사적 위압을 통해 항복을 유도하는 것이 전력 보존과 향후 영국과의 관계 설정 측면에서 유리해 보였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은 사기를 거의 상실한 상태였고, 영국군 역시 전쟁 초반부터 독일과의 교전을 비교적 주저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로 인해 히틀러는 덩케르크에 고립돼 있는 영국 측 병력을 궤멸시키기보다 항복을 유도하여 포로로 잡는 것이 향후 영국과의 전쟁이나 협상 등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영화 첫 장면에서는 바로 이런 내용이 반영된 듯 루프트바페(Luftwaffe, 독일 공군) 항공기가 공중에 살포하고 간 항복 권유 유인물이 덩케르크 시내에 흩날린다.

덩케르크
▲히틀러와 괴링. 괴링은 루프트바페 창설자로서 전쟁 초기 뛰어난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독일군을 난관에 빠뜨리는 오판을 계속한다.
셋째, 독일군 수뇌부 내부에서 육군과 루프트바페 간의 공적 다툼이 일어났다. 루프트바페 창설자이자 최고위 장성인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은 독일 육군, 특히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이 이끄는 기갑부대의 신화적 전공을 질시했다. 이에 그는 덩케르크에 갇힌 연합군의 처리를 육군이 아닌 루프트바페에 맡겨 달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간 루프트바페가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전에서 육군의 활약에 힘입어 훌륭한 활약을 보였던 데다, 히틀러 또한 자신에게 높은 충성심을 보이던 괴링을 편애하던 터라 이 요청은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다.

루프트바페 폭격기와 전투기는 연합군 병력의 수를 조금씩 줄여가며 공포감을 조성해 대규모 항복을 유도하려 했다. 결국 괴링의 공적에 대한 욕심과 작전수행 방식 때문에 덩케르크의 완전한 함락은 열흘이나 지연됐다.

이처럼 독일군이 포위된 연합군에게 시간을 허락한 데는 정황상이나 계산상으로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히틀러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며 주저하는 바람에, 덩케르크 내에 고립된 병사들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사안은 다이나모 작전과 관련해 연합군 지휘부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에 속한 것이었다. 다이나모 작전의 처음 목표는 이틀 간 45,000명의 병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틀의 시간이 지나면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진격해 오리라는 게 영국군 지휘부의 예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내린 독일 육군 진격 중지 명령은 구조를 받아야 할 연합군 병사들과 이들을 구해야 할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한 마디로 초월의 영역에 속한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그들의 능력 바깥의 영역에서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 충족된 덕에, 45,000명이 아니라 338,226명을 구출하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덩케르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수상을 역임한 윈스턴 처칠. 다이나모 작전 중 병사들의 생환 자체가 위대한 승리라고 역설했다.
◈구원과 생명: 생환 자체를 승리로 인식한 영국 지휘부

<덩케르크>는 초월의 영역에서 부여된 이 중요한 희망을 바탕으로, 병사들을 지옥같은 절망에서 건져내는 구원자들의 활약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놀란 감독은 그들의 활약상 자체보다 이런 활약을 근본으로부터 지배하는 인간 이해의 단면에 우선 주목하게 한다. <덩케르크>에 등장한 구원자들의 숭고함은 바로 이 인간이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영화는 사람의 생명을 그 자체로 고귀하게 바라본다. 비교적 높은 인권의식을 가진 평화로운 환경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나, 전 세계가 전쟁의 광기에 휩쓸려 있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이는 도달하지 못할 이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인명 경시와 광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참전국 지도자들의 행태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 1878-1953)은 다이나모 작전이 거행된 이듬해인 1941년 8월, 악명높은 최고 사령부 명령 270호(Order No. 270), "생이 끝날 때까지 싸우라"를 내렸다. 이 명령은 소련 병사가 독일군에게 생포되거나 항복하는 것조차 배신행위로 규정했고, 실제 생포되거나 항복하는 경우 본국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보복을 가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맹위를 떨치던 일본군의 옥쇄(玉碎) 명령과 반자이 돌격(バンザイ突撃) 또한 인명 경시의 대표적 사례로 유명하다. 독일군의 유대인 학살이나 대소련 전선에서의 잔혹상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다.

덩케르크
▲열차 밖 시민들의 환호에 크게 놀란 병사들. 이들의 생환 자체를 승리로 인식한 당시의 분위기를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병사의 생환을 우선시하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송양지인(宋襄之仁) 취급을 받던 상황에서, 영국 정부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후퇴 명령 자체는 향후 영국 정부가 전쟁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소형 민간선박까지 전부 징발해 병사들을 구조하게 한 일, 그리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퇴각한 병사들을 거국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일은 당시로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결단이었음이 분명하다.

독일군이 내부 사정으로 진격을 중지하고, 영국의 해군, 공군, 그리고 민간인이 희생적으로 활약한 끝에 다이나모 작전은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성공 국면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에 처칠과 영국 정부는 다이나모 작전의 지향점과 그 성과를 단순한 군사적 성공이 아닌 국가적∙인류적 성과로 포장해서 홍보한다.

비록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다분히 반영된 것이긴 했으나, 이런 홍보가 이 작전의 성공을 가능케 한 영국 해군, 공군, 그리고 민간선박의 숭고한 업적을 가리는 것은 아니다. 놀란 감독은 연합군은 선이요 독일군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지양하기 위해, 영화 속에서 단 한 번도 독일군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독일군의 공격이 악인 이유는 그것이 독일군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악에 짓눌려 있던 병사들이 구조되어 생명을 건진 일은, 당장 전황의 유불리를 넘어 그 자체로 축복받은 일임이 분명하다.
 

덩케르크
▲영국 의회에서 대국민 연설 중인 처칠.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각국 지도자가 발표한 연설들 중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연설로 지목된다.
그리고 이런 고무적 분위기 속에서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우리는 해안에서 싸울 것입니다)"라는 제목의 역사적인 대국민 연설을 영국 의회에서 거행한다. 여기에서 해안은 중의적 표현으로, 대륙과 접한 영국 해안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덩케르크 해안을 지목하고 있다.

처칠은 덩케르크 해안에서 구출된 병사들이 결코 패잔병이 아니며, 생존이라는 고결한 가치를 위해 분투했고, 결국 기적을 경험하고 승리를 쟁취한 자들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는 전쟁이 한창 격화되고 있던 유럽 전역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는 사건이었다. 다이나모 작전은 분명 연전연패 중 수행된 철수 작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큰 불명예로 기억되어야 할 일이었지만, 처칠과 영국 정부는 이를 오히려 승리의 사건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전 세계에 각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비록 전쟁에서는 패배하고 있었으나 명분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덩케르크에서 구사일생으로 철수한 병력이 기차역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민들은 개선한 군대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감격스러운 태도로 병사들의 생환을 환영한다. 이처럼 구원하는 공로를 가진 자만 아니라, 공로 없이 구원받은 자까지도 동일하게 환영하는 정서는 어디로부터 유래된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덩케르크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 당시의 정경을 기억한 한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전쟁터 한가운데 목숨을 걸고 달려온 수백 척의 중소형 민간선박들이 보인다.
◈구원과 희생: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 그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

사정이 그러했다 한들, 단지 군인들의 힘으로만 다이나모 작전이 완수되었다면 영국 국민들이 느끼는 감동은 크게 반감되었을 것이다.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Little Ships of Dunkirk)'은 지금에 와서는 마치 고유명사처럼 인식되는 용어로, 다이나모 작전 중 연합군 퇴각을 위해 징발된 700여 척의 중소형 민간 선박들을 지칭한다.

징발된 배들은 5월 26일부터 6월 4일까지 영국 램스게이트(Ramsgate)를 거점 삼아 다이나모 작전이 진행되던 내내 군인들을 구조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일화가 유명해진 이유는, 일단 참여를 자원한 민간선박의 수가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었던 데다, 대부분의 선주와 선장들이 배를 해군 수병들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항해를 감행했다는 점이다.

선박회사들은 자사의 유람선을 급파했고, 영국 귀족과 상류층들은 초호화 레저용 요트를, 어부들은 자신들의 어선을 몰아 덩케르크로 향했다. 이들 중 일부는 루프트바페의 포격, 그리고 U보트의 뇌격에 희생됐다. 이처럼 덩케르크 해안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원해 달려간 민간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은 오늘날까지도 덩케르크 정신(Dunkirk Spirit)의 핵심으로 지목되고 있다.

덩케르크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은 해군 구축함이 들어올 수 없는 얕은 물까지 접근해서 병사들을 구조했다.
당시 작전에 참가했던 가장 유명한 선박들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로열 대포딜(Royal Daffodil) 호: 영국 머시 강(River Mersey) 유람선으로, 다이나모 작전실행 1년 전인 1939년 건조돼 당시로서는 최신형 선박에 속했다.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5회에 걸쳐 해협을 왕복했고, 작전에 참가한 민간선박 중 가장 많은 수의 병력(7,461명)을 구조한 것으로 기록됐다. 6월 2일 여섯 대의 루프트바페 항공기에 피격됐으며, 갑판에 폭격을 맞아 구멍이 뚫린 상태에서 구사일생으로 영국으로 귀환했다.

선다우너(Sundowner) 호: 1912년 타이타닉(Titanic) 호 침몰 당시 2등항해사로 일하다 구조된 찰스 라이톨러(Charles Lightoller)가 소유한 선박이다. 해군의 징발에 라이톨러는 5월 30일 그의 장남 로저 라이톨러(Roger Lightoller)와 해안경비대원 제랄드 애쉬크로프트(Gerald Ashcroft)를 데리고 직접 덩케르크로 출항했다. 이 세 명은 130명의 병력을 구출했다.

탬진(Tamzine) 호: 길이가 4.6m밖에 안 되는 초소형 어선으로, 작전에 참가한 민간선박 중 가장 작은 배로 기록되었다. 현재 램스케이트 해양 박물관(Ramsgate Maritime Museum)에 전시되어 있다.

클랜 맥앨리스터(Clan MacAlister) 호: 6,900톤짜리 중형 수송선으로, 당시 참가한 민간선박 중 가장 큰 배였다. 이 선박은 인원수송 자체보다 다른 용도로 사용되어 유명해졌다.

클랜 맥앨리스터 호는 배의 크기 때문에 5월 29일 덩케르크 해안의 얕은 물에 좌초됐는데, 좌초될 때 균형이 잘 맞춰진 채로 바닥에 내려앉았고 갑판이 수면 위로 높게 나와 있어 루프트바페 조종사들이 출항 대기 중인 구조선으로 오해했다. 이 때문에 루프트바페 스투카(Stuka) 폭격기의 유인용 타겟 역할을 했다. 이 배 덕분에 작전기간 동안 다른 배들 수십 척이 폭격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덩케르크
▲오늘날까지도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을 기리기 위해 이처럼 기념행사가 벌어진다.
선박들의 일화를 살펴보면 현장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소형 선박들의 실제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전체 구조 인원 33만 8,000여명 중 80%에 가까운 병력은 해군의 대형 구축함들이 수송했다. 약 5-6만여 명의 인원만이 민간선박에 의해 구조됐다. 그러나 이 사실이 자기를 희생할 각오로 작전에 뛰어든 소형 선박 선장과 선원들의 숭고함을 퇴색시키지는 않는다.

영화 <덩케르크>는 자기 아들과 함께 직접 전쟁터로 배를 모는 소형요트 선장 도슨(Mr. Dawson)을 등장시켜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을 기리고 있다. 독일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Bf109전투기의 공격에 흔들리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배를 몰아 수십 명의 병사들을 구출하는 모습은 덩케르크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사례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 모범사례는 영국 본토 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의 전초전 격인 도버해협 상공전에 참가한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Spitfire) 파일럿들에 의해 그 정점을 찍는다. 기지로 귀환할 수 있는 연료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구조선을 공격하는 스투카 폭격기를 눈 앞에 두고 갈등하는 파리어(톰 하디 분)의 모습은 당시 영국 공군 파일럿 대부분이 실제 경험했던 일이다.

덩케르크
▲도버해협 상공전 중 격추된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 전투기. 다수의 파일럿들이 이 전투에서 희생적인 활약을 펼치다가 전사했다.
영국 공군기들은 영국 본토에서 이륙해, 도버해협을 절반 이상 건넌 상태에서 루프트바페 전투기들과 교전을 벌여야 했다. 반면 루프트바페 전투기들은 덩케르크 해안 봉쇄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기지에서 가까운 해안 지역에서 주로 작전을 벌였다. 따라서 도버해협 상공전은 조종사들이 무리한 기동을 감수해야만 하는 불리한 상황에서 전개됐다.

이 전투는 결국 적기보다 우월한 성능의 기체, 그리고 헌신적 투혼을 발휘한 파일럿들 덕분에 영국 공군의 승리로 종결됐지만, 단 열흘 간의 교전에도 영국 공군은 177기의 기체를 잃었다. 이는 영국 공군력이 휘청거릴 정도의 심각한 피해였다.

영화에서 기지로 귀환할 것인가, 귀환을 포기하고 교전을 벌일 것인가를 고민하던 파일럿은 결국 생환을 장담하지 못할 결정을 내리고 만다. 그는 기지 귀환을 포기하고 구조선을 침몰시키고 있는 독일 폭격기를 공격한다. 공군 파일럿 파일럿의 결정은 '덩케르크의 소형 선박들'을 운전하는 선장 및 선원들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그리고 이 결정은 생환을 위해 서로 생존경쟁을 벌이던 덩케르크 해안의 연합군 병사들의 모습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구원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버려가며 남을 구하는데, 구원받는 자들은 그 덕에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자기 살기에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구원하는 자들의 희생이 더 숭고한지도 모른다. 그들은 의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다. 놀란 감독은 소형요트 선장 도슨과 파일럿의 모습을 통해 이런 것이 구원자의 숙명임을 강변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기적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보존(conatus essendi)의 본능에 함몰돼 사는 이들에게 타자(他者)를 위한 희생이란 그 자체가 실행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얼굴: 레비나스와 타자의 얼굴

전편에 잠시 언급한 바 있듯,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유대계 프랑스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통역병으로 프랑스 군에서 복무했으며, 독일군 포로가 되어 유대인 수용소에 5년간 수감됐던 인물이다. 그는 전쟁의 뼈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타자 현상학(phenomenology of the Other) 혹은 타자 윤리학을 정립한 인물로 유명하다.

덩케르크
▲타자의 얼굴.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익명적이고 어둡게만 보일 뿐이다.
레비나스가 규정하는 타자(l'autre)는 자아가 인식하거나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자,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자다. 타자를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식, 정의, 규정이란 자기 존재를 바탕으로 타자를 임의대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경우 타자는 늘 자기 존재를 위한 수단 혹은 희생물로 전락한다.

레비나스는 서구 문명이 내포하고 있는 이 고질적인 주지주의적 자기중심성으로부터 탈출(l'évasion)하는 것만이 현대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 대안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를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죄성의 빚을 갚아야 할 상대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그는 유대교 토라(תּוֹרָה) 전통, 칸트의 도덕신학(Kantian moral theology), 후설의 현상학(Husserlian phenomenology), 그리고 독일의 유대계 사상가이자 윤리학자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 1886-1929)의 사상을 종합해, 타자의 얼굴(le visage de l'autre)이 부여하는 윤리적 명령이라는 테제를 정립한다. 로젠츠바이크는 사람의 실존이 죽음, 즉 무(nothingness)와 얼굴을 맞댄 공포로 점철되어 있다고 사유했다.

레비나스는 사람의 얼굴이 죽음을 맞대고 있다는 로젠츠바이크의 사유를 수용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의 얼굴이란, 자아가 유발하는 죽음을 맞대고 있는 타자의 실존 그 자체다. 왜 나의 존재는 언제나 타자의 죽음을 유발하는가? 앞서 말했듯 모든 자아는 근원적으로 자기보존의 본능에 지배돼 있고, 이 본능은 결코 자기와 다른 것, 자기가 알 수 없는 낯선 것, 자기 존재에 위협이 되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 <덩케르크>는 놀란 감독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해석학적 관점에서 레비나스적 독법이 가능한 작품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단 한 번도 독일군의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 오직 연합군 측의 얼굴만, 그것도 구원받는 자와 구원하는 자의 얼굴을 대비시켜 조명한다.

덩케르크
▲죽음을 대면한 타자의 얼굴들. 그들의 죽음에 빚을 지고 있는 자아는 이들의 얼굴에 새겨진 윤리적 명령을 읽어내야 한다.
다수의 평론가들이 지적했듯, 독일군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덩케르크>는 전쟁이 유발하는 죽음의 위협 그 자체가 비인간적 악이라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독일군 편에는 우리가 맞대야 할 타자의 얼굴이라는 것이 없다. 이는 곧 비인간성을 넘어 그 정체조차 파악할 수 없는 집단적이고 무인격적인 존재에의 집착을 지목하고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연합군과 영국 민간인 측을 바라보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쪽 편은 오직 얼굴들로 가득차 있다. 이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죽음의 위협 앞에 세워져 있고, 그로 인해 얼굴에 두려움과 긴장을 감추지 못한다. 특히 잔교 위를 가득 채운 병사들이 다가오는 슈투카 폭격기를 바라보며 내보이는 얼어붙은 표정은, 레비나스적 관점으로 본다면 자아를 바라보는 타자의 얼굴의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기적이란, 이처럼 오직 죽음의 위협으로만 가득 채워진 자아와 타자의 병존(竝存)을 탈출하는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적은 덩케르크 정신을 형성한 자들, 즉 자기의 죽음을 불사하고 타인의 생명을 구하려 한 이들에 의해 실현된다.

죽음의 위협 앞에 자기 얼굴을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는 구원하는 자들 또한 해안에 고립된 병사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이들은 타자로 다가오는 고립된 병사들의 얼굴에서 자신들의 존재로부터 유발되는 윤리적 책임을 목도한다.

그리고 이는 곧 자기 존재를 희생함으로써 타자를 살리는 구원자의 숙명으로 그들을 견인해 간다. 구원받는 자와 구원하는 자 사이를 가로질러 있는 심연과도 같은 근원적 저주는 오직 구원하는 자의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극복 가능하다.

영화 <덩케르크>에 표현된, 혹은 영화 속에서 길어낸 얼굴의 윤리학은 이 영화가 구원과 기적에 대한 서사임을 재차 확증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록 무신론적 화법으로 서술되기는 했지만, 심유한 구원론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는 영화라고 평할 수 있다.

<덩케르크>에서 구원하는 자들의 숭고함을 가슴에 스며들도록 전달하는 근원적 요소들은 바로 초월과 자기희생에 대한 기독교적 성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